‘1987’, 그 날이 오는 걸 가능하게 한 그들을 위한 헌사

[엔터미디어=정덕현의 그래서 우리는] 1987년을 경험했던 세대라면 아마도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한참을 일어서지 못할 게다. 엔딩크레딧과 함께 찬찬히 보여지는 당대의 스틸컷들 속에서 풍겨 나오는 동시대의 매캐하지만 가슴 뜨거웠던 공기를 고스란히 느낄 수밖에 없을 테니. 그 엔딩에 흘러나오던 ‘그 날이 오면’을 영화관을 벗어나서도 진종일 귓가에서 들을 수밖에 없을 테니 말이다. 영화 <1987>은 당대의 암울했던 공기와 그걸 깨치고 나오기 위해 온몸을 던졌던 대학생들, 기자들, 법조인들, 종교인들, 교도관들 아니 길거리의 택시운전사부터 가겟집 주인아주머니까지 한 마음이 될 수밖에 없었던 시절의 공기를 있는 그대로 먹먹하게 전해준다.

영화는 1987년 6.10 민주화 운동을 촉발시킨 고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부터 시작하지만 사실 그 연원을 따라가면 1980년 광주 민주화 운동과 전두환 군부독재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987년 대학생들이 만화 동아리에 모여 광주의 참상을 담은 비디오를 보며 숨죽여 분노하고 흐느껴 울었던 그 하나하나의 마음과 감정들이 모여 비로소 그 해의 봇물 터지듯 광장으로 터져 나온 민주화의 목소리들이 있었을 터였다.



그래서 영화는 한 사람의 이야기로 흘러가기보다는 제목에 담긴 것처럼 1987년 그 시절에 함께 했던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들이 중첩되어 거대한 민주화의 흐름으로 이어지는 그 과정을 담는다. 고문으로 숨진 고 박종철 열사가 있었고 그걸 은폐하려는 대공수사처에 반발하다 결국 검사복을 벗어야 했던 최검사(하정우)가 있었으며, 이를 어떻게든 기사화하기 위해 잠복 취재도 마다하지 않은 윤기자(이희준)가 있었다.

대공수사처에서 토사구팽 되어 결국 진실을 터트리는 조반장(박희순)이 있었고, 그 진실을 담은 옥중서신을 전달하다 붙잡혀 모진 고문을 당했던 교도관 한병용(유해진)이 있었다. 또 시대의 불의에 맞서 온몸을 던지다 스러져간 고 이한열 열사가 있었으며 삼촌인 한병용의 고문과 이한열 열사의 죽음을 경험하며 비로소 민주화 운동의 전면에 서게 되는 87학번 대학 신입생 연희(김태리)가 있었다.



영화는 그래서 진실을 숨기려는 자와 그걸 밝히려는 자들의 팽팽한 대결로 이어지고 조금씩 알려지는 진실이 물꼬를 만들어내며 차츰 민주화 운동에 참여해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처음에는 무자비하게 진압하는 백골단으로부터 은신처를 마련해주는 아주머니처럼 마치 아들 같고 딸 같아 인지상정으로 도움을 주던 그 마음이 이제는 더 이상 남이야기가 아니라는 걸 알고는 거리로 나가게 되는 과정들. 그저 대학 신입생으로서 미팅과 노래에 심취하며 데모는 왜 하냐던 연희가 결국 그 데모대에 합류하는 이야기는, 1987년 드디어 더 이상 타자가 아닌 내 일로 당대의 문제들을 받아들였던 시대의 공기를 잡아낸다.

대학 선배인 이한열이 수줍게 자신의 동아리에 들라며 제시했던 유인물에서 ‘그 날이 오면’이라는 노래 악보가 그려져 있는 걸 본 연희는 심드렁하게 “데모를 한다고 그 날이 오냐?”고 묻는다. 하지만 연희 스스로 목도했듯이, 길거리를 가득 메운 사람들과 그들이 외치는 “호헌철폐 독재타도”의 목소리들과, 지나는 차들이 일제히 경적을 울려대며 민주화의 뜻을 한 목소리로 내던 ‘그 날’은 결국 오고야 만다.



버스 위에 올라선 연희는 구름떼처럼 시청 앞을 가득 메운 인파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 날이 오면’은 그저 가정이었다는 걸 확인하게 되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것이 가능했던 건 그 많은 사람들의 고귀한 희생과 용기와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걸. 영화 <1987>은 바로 ‘그 날’이 오는 걸 가능하게 한 많은 ‘그들’을 위한 헌사가 아닐 수 없다.

정덕현 칼럼니스트 thekian1@entermedia.co.kr

[사진=영화 <1987>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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