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 장준환 감독은 사람들이 상상하듯, 여성을 지우지 않았다


진실로 참되고 옳음이
죽어지고 숨어야 하는 이 계절엔
나의 뜨거운 노래는
여기 언 땅에 깊이 묻으리.
1960년. 3.15부정 선거 직전 동아일보에 발표한
유치환의 시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 중에서.



[엔터미디어=황진미의 편파평론] △이 영화 찬(贊)△. (본문 중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실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1960년, 1987년, 2016년. 민주주의의 위기가 극에 달했을 때, 평범한 사람들의 저항이 터져 나왔다. 역사는 한 세대를 주기로 낡은 껍질을 벗었다. 영화 <1987>은 87항쟁을 그린 첫 영화로, 2016년 촛불의 파고 속에서 준비되었다.

2015년 <카트>의 시나리오 작가 김경찬은 <1987>의 시나리오에 착수했다. 몇 번의 수정과정을 거친 시나리오는 그해 12월 장준환 감독을 만났고, 이후 강동원을 필두로, 김윤석 등 스타급 배우들의 출연이 하나 둘 확정됐다. 영화는 점점 몸집이 커졌고, 2016년 10월 촛불정국이 열리기 직전 CJ 엔터테인먼트가 투자사로 합류하면서 현재의 블록버스터급 영화로 만들어졌다. 영화를 준비하는 시기는 박근혜의 블랙리스트 정치가 작동하던 시절이었으나, 촬영이 이루어진 2017년 봄과 여름은 촛불로 불의한 정권을 몰아내고 새로운 정권을 세운 때였으니, 만든 이들의 감회가 어떠했으랴. 참으로 절묘하게 1987년의 뜨거운 노래가 우리 앞에 당도했다.



◆ 에두르지 않고, 역사를 정조준 하는 힘

영화는 1987년 시민항쟁을 정조준 한다. 역사적 사건을 재현하면서, 제한을 두거나 에둘러 가지 않는다. 사건이 어떻게 일어났고, 본질이 무엇인지를 당대의 시대정신을 담아 조명한다. 이것이 얼마나 대단한 미덕인지 알기 위해서는 다른 영화와의 비교가 불가피하다. 가령 <택시운전사>는 아무것도 모른 채 광주에 온 택시기사의 시선을 통해 광주의 참상을 보여준다. 관객은 그의 눈을 열쇠구멍 삼아 사건을 보게 되지만, 그 사건이 어떻게 일어났으며, 사건의 본질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기 어렵다. 즉 ‘아무것도 모르는 주체’라는 알리바이가 재현의 제한점이자, 서사의 시치미로 작용한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자. <오래된 정원>은 1980년대의 민주화운동을 후일담처럼 회고하면서, 1990년대식 냉소와 회한의 정서를 곁들인다. 1980년대 투쟁이 어떤 성격을 지닌 것이었고, 어떤 성과를 이룬 것인지 헤아리기도 전에, 쿨 한 환멸과 자기부정의 정서로 건너뛰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상하다. 87항쟁을 정면으로 그린 영화가 왜 그동안 없었을까. 1980년 광주를 다룬 텍스트들이 불과 15년 만에 <모래시계><꽃잎> 등의 형태로 나왔던 것이 비하면, 늦은 감이 있다. 그것은 일단 의문의 여지가 없는 자명한 사건으로 여겨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역사적 진실이나 판단에서 다툴 것이 없고, 모두가 안다고 생각하는 사건이기에 흥미가 적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보다 더 큰 이유는 87항쟁의 성취가 이후 굴절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승리의 서사로 다루기엔 낯간지럽고, 미완의 역사로 다루기엔 곤혹스러운 면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87항쟁은 현재의 6공화국을 낳은 사건으로, 지금의 헌정질서의 연속선상에 놓인다. 따라서 동시대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객관적 거리두기가 힘들다. 어쩌면 30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비로소 객관적 거리두기를 통해 역사적 사건으로 돌아보는 것이 가능해진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장준환 감독이 영화의 연출을 맡은 것은 매우 적확해 보인다. 당대의 주역이었던 세대의 자화자찬이나 자기냉소가 아니라, 그 바로 아래 연배(89학번)로서 87항쟁의 의의와 한계를 정확히 인지하고 목도했던 사람의 눈이 필요했다.

장준환 감독의 데뷔작 <지구를 지켜라!>는 외계인이 등장하는 황당한 외피 속에, 1980년대 운동권이 품었던 문제의식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자본가에 의한 노동자의 착취, 산업재해, 노조탄압, 폭력 등이 직접적으로 묘사되어 있는 반면, 그것을 노동자의 단결로 해결하겠다는 전망은 버렸다. 영화는 노동자이자 학교폭력 피해자였던 청년이 망상적 주체가 되어, 지구를 지키겠다며 자본가-외계인에 맞서는 처절한 소동극을 보여준다. 그리고는 반전을 통해 그것이 망상이 아닌 실제였음을 선언한다. 이는 87항쟁을 이끌었던 주체들이 품었던 문제의식을 선연하게 보여주면서도, 87항쟁이 형식적 민주주의를 얻는 것에 그쳐 더 이상의 변혁으로 나아가지 못했던 한계를 보여준다. 주인공 병구는 87항쟁이 자본주의적 모순을 방기한 채 멈춰선 바로 그 자리에 남아, 분열적 주체가 되어 지구가 산산조각 나는 파국을 꿈꾸게 된 것이다.



장준환 감독의 후속작 <화이> 역시 다면체로 분열된 아버지의 도상을 보여주며, ‘나쁜 아버지(들)’을 어떻게 할 것인지를 묻는 영화이다. 지금껏 우리를 키운 ‘나쁜 아버지(들)’은 내가 속한 세계를 지배하는 원리이자 힘이다. 그것에 맞설 수 있는지, 그것을 이길 수 있는지, 그것을 죽일 수 있는지, 영화는 묻는다. 신학적, 정신분석학적 의미를 담은 비유이자,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질문이 아닐 수 없다. 영화는 자신의 본성을 자각한 아들이 내 안의 두려움을 이겨내고, 나쁜 아버지들을 모조리 죽이는 단호한 서사를 통해, 급진적인 문제의식을 드러낸다.

장준환 감독이 그동안 알레고리로 말해왔던 것이 실제 역사를 다룬 영화 <1987> 속에 담겼다. 영화는 역사적 사건을 정조준하며, 일체의 타협이나 주저함이 없다. 또한 사건의 감흥에 도취되어 교훈을 강제하거나 후대에게 가르치려는 우를 범하지도 않는다.



◆ 미학적 성취

영화 <1987>은 미학적으로도 굉장한 성취를 보여준다. 영화의 플롯과 장르가 상당히 실험적이다. 영화는 하나의 사건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점점 외연을 넓히면서 이름 없는 사람들의 참여로 동심원처럼 퍼져가는 구성을 갖는다. 이는 한 두 명의 영웅이 87항쟁을 이끌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명의 저항이 퍼즐처럼 맞춰지고, 여기에 평범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붙으면서 항쟁이 될 수 있었다는 사건의 정의와 맞물린 것이기에, 시나리오 개발 단계에서부터 고수된 방식이다. 문제는 이럴 경우에 등장인물이 많고 서사의 중심점이 이동하기 때문에, 플롯을 다루기가 몹시 힘들다. 하지만 영화는 흐트러짐 없이 확장된 결말을 향해 달려간다.

한 인물이 자기 몫을 해내고 빠지면, 바통을 이어받은 후속 주자가 다음 이야기를 이어간다. 여러 인물들이 나옴에도 불구하고, 흐름이 매끄럽고 인물들 간의 안배가 조화로운데, 이는 순전히 감독의 힘이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시작해서 이한열의 노제로 끝나는 동안, 장르도 물 흐르듯 변화한다. 앞부분은 거의 정치 스릴러적 면모를 띄고, 후반부는 가족 로맨스의 느낌이 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다큐멘터리의 느낌이 난다. 이러한 장르의 변주는 상업영화로서의 긴장과 쾌감을 잃지 않으면서도, 관객의 감정을 몰아가며 역사적 사건에 몰입하게 만든다.



영화의 촬영은 매우 뛰어나다. 박처원(김윤석)의 얼굴이 전두환 사진의 유리에 비치는 것이나, 거울에 비치는 모습은 인상적이다. 욕조에 담긴 박종철의 얼굴이 그대로 영정사진이 되는 것이나, 교회 스테인드글라스에 어른거리는 김정남의 그림자도 처연함과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대규모 군중장면과 클로즈업을 오가는 카메라 워크도 일품이다. 특히 여러 번 등장하는 이한열의 운동화 한 짝이 클로즈업되는 샷도 감정을 응축시킨다.

영화는 캐릭터 열전을 방불케 한다. 분량에 관계없이 출연을 자청했다는 배우들 덕에 감독은 원 없이 배우를 썼을 것이다. 쟁쟁한 배우들이 적재적소에 배치되어 존재감을 뿜는다. 가령 박종철의 아버지와 삼촌 역할을 한 김종수와 조우진의 애끓는 연기는 관객의 감정을 몰입시킨다. 특히 눈물을 삼키는 부검 장면이나 강가에서 뼛가루를 뿌리며 오열하는 장면은 명장면으로 꼽을 만하다.

유일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나오는 인물인 박처원(김윤석)은 첫 등장부터 무시무시한 포스를 풍긴다. 김윤석의 얼굴과 체격이 낯설게 느껴지는데, 이는 특수 분장과 약간의 패딩을 넣은 의상, 카메라 앵글 등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박처원은 한국전쟁 때 가족을 잃고 월남한 반공지주의 아들로, 지독한 레드콤플렉스를 지닌다. 스스로 애국자라고 확신하고 있으며, 위로 각하를 모시고 아래로 부하를 챙기는 권력 조직형 인간이다. 박처원에 대한 묘사는 87항쟁이 싸워서 이기고자 했던 독재세력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알려준다. 그것은 냉전과 분단의 산물인 반공 극우 세력이자, 폭력과 위계를 본령으로 삼는 권위주의적 관료세력이다. 영화는 적의 얼굴을 명확히 보여주기 위해 그의 전사를 알려주면서도, 그에게 인간주의적인 면모를 부여하여 선악을 물타기 하는 우를 범하진 않는다.



◆ 여성 캐릭터를 둘러싼 오해

영화에서 가장 도드라진 인물은 연희(김태리)이다. 모두 실존인물인데 반해 연희만 창작된 인물이고, 이름을 가진 유일한 여성 캐릭터이다. 굳이 허구의 인물인 여성캐릭터를 넣은 이유를 묻자, 감독은 ‘연희도 허구의 인물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역사에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수많은 연희가 있었다. 연희는 그 시대의 평범한 사람이자 대학생이자 여성이라는 역할을 짊어진 인물’이라는 답변을 하였다. 이후 몇 번의 인터뷰에서 연희와 관련된 질문에 답하면서, 감독의 답변이 와전되었다.

감독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다루면서 영화 속 대다수 인물들이 남성 실존인물들로 채워졌기 때문에, 여성인물을 넣기 위해 김정남 캐릭터를 여성으로 바꾸어볼까도 생각했지만 그것은 고증 때문에 불가하였고, 연희 캐릭터에 집중하게 되었다.’고 말했는데, ‘고증 때문에 불가’라는 말만 따로 떠다니면서, 마치 ‘역사에 기록된 여성이 적었기 때문에, 영화에도 당연히 여성을 담지 않았다’고 말한 것처럼 오해가 퍼졌다.



이 대목이 민감한 것은 나름 연원을 지닌다. 역사의 고비마다 함께 투쟁해 놓고, 상황이 끝나면 여성을 들러리로 취급했던 일이 지겹도록 많았기 때문에, 감독이 고증 운운하며 투쟁의 역사에서 여성의 존재를 지운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품는 것이다. 또한 당시 적극적으로 투쟁을 이끌었던 여성 실존인물들, 가령 은수미(국민운동본부 제헌의회), 심상정(85년 구로동맹파업주동자로 수배 중), 김진숙(해고노동자, 박종철 사망 직전 남영동 분실에서 고문, 이후 87년 노동자대투쟁 주도) 등도 있었고, 항쟁을 이끌던 조직 민청련에는 여성부가 있었을 만큼 여성의 참여와 문제의식이 높았다. 영화에 이들이 등장했더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겠지만, 영화는 박종철 고문치사에서 이한열의 노제까지 사건에 집중해야했고,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직접 관련된 실존인물들(검경, 의사, 기자 등)은 예외 없이 남성이었다.

사실 영화는 87항쟁에서 여성의 존재를 생략하지 않았다. 박종철의 부검을 밀어붙이는 검사는 ‘부천 성고문 사건’을 언급하며, 이번에는 경찰 마음대로 안 된다고 못을 박는다. 박종철의 물고문 사건 이전에 권인숙의 성고문 사건이 있었고, 그런 희생들이 쌓여 부검이 이루어지게 되었음을 짚는 것이다. 박종철 유족의 동선에는 민가협 어머니들의 모습이 잡힌다. 연희가 처음으로 경험한 종로의 기습 시위를 주도한 것은 여학생들이었다. 동아리에서 광주항쟁 비디오를 틀며 설명하는 선배도 여자이다. 그리고 연세대 정문 시위와 마지막 미도파 시위에도 수많은 여성들이 포착된다. 영화는 보지 않은 사람들이 상상하듯, 여성을 지우지 않았다.



연희가 강한 캐릭터가 아니어서 실망이라는 반응도 있다. 하기야 <모래시계>의 혜린(고현정)이나 <응답하라 1988>의 보라에 비해, 연희의 캐릭터가 강렬하진 않다. 하지만 그리 밋밋한 캐릭터는 아니다. 그는 당시 선뜻 운동에 발 담그지 못하고 고민하는 젊은이의 대표단수로, 다른 인물들이 이미 완성된 캐릭터인 반면 유일하게 성장하는 캐릭터이다. 이는 그의 부족함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관객이 감정이입할 수 있는 창구이자, 관객의 감정을 끌고 당대의 정서 안으로 들어가는 실질적인 주인공이다.

연희는 백지상태에서 ‘잘생긴 오빠’나 ‘끌려간 삼촌’에 의해 수동적으로 의식화되는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만화동아리에서 왜 이런 비디오를 보여주느냐”고 따진다. 그리고 “이런다고 세상이 달라지냐. 그러다 잘못되면 남은 가족들은 어떻게 하냐?”고 묻는다. 연희는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아가씨라서 운동에 회의적인 것이 아니다. 연희의 아버지는 파업 노동자였다가 동지들의 배신으로 화병을 얻어 술을 마시다가 죽었다는 언급이 나온다. 연희는 운동하는 주체가 떠안아야 할 고통과 책임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기에, 천천히 자신을 벼르는 중이다. 그는 기관에 끌려갔다 논길에 버려지는 공포를 체험한 뒤, 혼자 고민하고 결단하여 위험한 임무를 수행한다. 그리고 마침내 “호헌 철폐, 독재 타도”의 선창과 함께 버스 위에 오른다.



이후 그가 보게 될 것은 무엇일까. 기만적인 6.29 선언, 789 노동자 대투쟁, 그리고 야당 분열과 노태우 당선, 삼당 합당과 1991년 분신정국, 그리고 변절에 이르기까지. 실망과 내상을 입고 다시 마음이 닫힐지도 모른다. 하지만 영화는 모두가 알고 있는 그 환멸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영화 속 등장인물들이 자기 몫을 다한 뒤, 재빨리 다음 인물에게 바통을 넘기듯이, 하나의 사건도 제 몫의 진전을 이루고 사라질 뿐이다.

그러니 1987년의 미완의 혁명을 아쉬워할 것도 부끄러워할 것도 없다. 역사 속에서 그것은 진정으로 가슴 벅찼던 한 조각의 혁명이었고, 또 다른 혁명의 불씨를 꺼트리지 않는다면 다음 세대와 더불어 한 발, 한 발 느리게 나아갈 것이니까. 열사의 이름이 외쳐지는 광장에서,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

칼럼니스트 황진미 chingmee@naver.com

[사진=영화 <1987>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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