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기사’ 장미희·서지혜·신세경, 입체감 부여하는 세 여성 캐릭터

[엔터미디어=TV삼분지계] ◾편집자 주◾ 하나의 이슈, 세 개의 시선. 각자의 영역을 가지고 대중문화와 관련된 글을 쓰고 있는 정석희·김선영·이승한 세 명의 TV평론가가 뭉쳐 매주 한 가지 주제나 프로그램을 놓고 각자의 시선을 선보인다. 엔터미디어의 [TV삼분지계]를 통해 전문가 세 명의 서로 다른 견해가 엇갈리고 교차하고 때론 맞부딪히는 광경 속에서 오늘날의 TV 지형도를 그려볼 수 있는 단초를 찾으실 수 있기를.

<흑기사>의 타이틀롤은 수호(김래원)다. 고색창연한 ‘흑기사’ 칭호에 걸맞게, 연인을 위해 아낌없는 사랑을 바치는 그는 동화에서 막 빠져나온 듯한 전형적인 키다리 아저씨이자 백마 탄 왕자님으로 그려진다. 수호가 이 고전적이고 낭만적인 로맨스 플롯을 충실히 따라가는 동안, 여기에 팝업과 같은 입체감을 부여하는 것은 세 여성 캐릭터다.

운명이 뒤바뀐 두 여성 해라(신세경)와 샤론(서지혜), 이들의 운명을 바꾼 또 다른 여성 백희(장미희)는 온갖 욕망과 애증과 질시 등의 복합적 서사를 엮어내며 밋밋할 수 있었던 드라마를 흥미롭게 만든다. [TV 삼분지계]가 ‘흑기사’보다 세 여성 캐릭터에 주목한 이유다. 전작 <착하지 않은 여자들>에 이어 세대를 초월한 여성들의 다채로운 관계에 주목한 김인영 작가의 신작을 각각 해라, 샤론, 백희와 이를 연기한 배우들을 통해 들여다본다.



◆ 신세경, 1인 다역을 오가는 입체적 표정

미약하고 어렸던 첫사랑 소년이 능력 있고 성숙한 흑기사가 되어 나타나자 해라(신세경)는 말한다. “내 꿈은 신데렐라가 아니라 자수성가에요. 방해하지 말아주세요. 제발.” 하지만 신데렐라 동화의 시대나 지금이나 현실은 여전히 가난하고 연고 없는 여성이 홀로 성공하기엔 불가능한 구조다. 부유한 부모의 갑작스러운 사망과 함께 빈털터리가 된 해라의 처지와 그녀 부친으로부터 도움을 받다가 가출해 세계적 사업가로 성공한 수호(김래원)의 대조적인 삶의 궤적을 보라. 현실을 통째로 전복하지 않는 한, 로맨스 드라마가 가난한 무연고 여성에게 허용하는 성공 판타지의 최대치는 사랑과 결혼을 통한 신분상승에 머문다. 수호가 흑기사로 활약하는 동안, 해라는 전형적인 신데렐라의 운명을 벗어나지 못한다.



대신 해라의 이야기는 비슷한 운명을 공유한 샤론(서지혜)과의 대립을 통해 비로소 흥미로워진다. 드라마는 둘이 운명적으로 상호 반전된 관계임을 반복해 보여준다. 전생에서 백희(장미희)에 의해 신분이 뒤바뀌었고, 수호와의 관계에서는 혼례복 오해로 운명이 엇갈린다. 이 반전 모티브는 현생에서 재회한 둘의 대화에서도 되풀이된다. 샤론은 해라에게 행운을 주는 대가로 “우리 인생을 바꿔요. 내가 당신이 될게요”라고 말한다. 7회에서 수호의 사랑을 받고 싶은 샤론이 해라로 변신했을 때 같은 모습의 둘이 한 컷에 담긴 장면은 이들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비춘다. 로맨스에서 끊임없이 경쟁하는 ‘전형적 여주인공과 서브 악녀’의 대립은 여성들의 동일한 제한적 조건에서 탄생한 동전의 양면 같은 관계라는 사실이다.

신세경의 연기는 전생을 넘나드는 복합 서사에서 이제까지의 필모를 종합한 듯한 풍부한 매력을 보여준다. 한 맺힌 분이의 표정에서는 자연스럽게 SBS <육룡이 나르샤>의 분이가, 샤론이 빙의한 해라에게서는 김인영 작가와 첫 번째로 협업한 MBC <남자가 사랑할 때>의 도발적인 미도가 떠오른다. 1인 다역의 입체적 표정이 그 어느 때보다 아름답다.

칼럼니스트 김선영 herland@naver.com



◆ 서지혜, 인생 캐릭터와의 만남

“사랑 받는 느낌은 어떤 건가요. 난 이백년을 기다렸는데.” 샤론(서지혜)의 가슴 저미는 탄식을 듣는 순간 이번 생에서는 문수호(김래원)가 그의 마음을 한번쯤 어루만져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과거 회상 장면의 스님 말씀대로 ‘아끼는 마음’ 없는 집착에 불과하지만. 이렇듯 악한 자의 편을 들어주고 싶어지는 상황. 악역이 흥할 경우 생기는 부작용이다. 캐릭터가 확실하고, 이야기가 개연성이 생기고, 거기에 탄탄한 연기력이 보태지면 악역일지라도 정을 주게 된다. MBC <하얀 거탑>의 장준혁(김명민)이나 MBC <선덕여왕>의 미실(고현정)이 그랬던 것처럼.



심지어 샤론은 기나긴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지 못하는, 대신 스스로에겐 더 없이 관대한 허술한 인간의 전형이 아닌가. 그럼에도 시청자는 샤론의 반전 매력에 점점 빠져든다. 느린 걸음이되 차근차근 흐트러짐 없이 걸어온 서지혜가 비로소 인생 캐릭터를 만났다. 샤론은 <흑기사> 속 어떤 인물과 붙여 놓아도 흥미진진하다. 오랜 세월 고락을 함께 해온 장백희(장미희)는 두 말할 것도 없고, 부자가 되라는 샤론의 조언에 따라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는 박철민(김병옥)도, 정체가 모호한 양장점 점원 양승구(김설진)도 샤론과 함께라면 한편의 드라마가 되니 말이다. 앞으로 샤론과 눈썰미 빼어난 숙희(황정민) 씨 사이에는 어떤 해프닝이 벌어질지, 해라(신세경)의 전 남자친구 최지훈(김현준)과의 조력 관계는 그대로 유지될 지, 이것저것 궁금한 것이 많다. 어쨌거나 부디 샤론이 마음의 평화를 찾기를.

방송 칼럼니스트 정석희 soyow59@daum.net



◆ 장미희, <흑기사>의 마법을 완성하는 조각

<흑기사>는 여러 모로 희한한 드라마다. 수호(김래원)와 해라(신세경)가 이끌고 가는 중심 줄거리는 사실 무난하다. 전생에서부터 이어져 온 사랑의 역사가 현생에서도 이어지고, 남자는 온갖 고난을 겪으면서도 여자가 원하는 삶을 선사해주기 위해 최선을 다 한다. 이 악물고 부와 명예를 손에 거머쥔 남자는, 오랜 기다림 끝에 만난 여자를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 그 힘을 아낌없이 쓴다. 키다리 아저씨 서사에 판타지 설정을 조금 덧붙인 수호와 해라의 이야기는 그리 특별할 게 없고, 크게 특별할 게 없는 이 이야기를 연기하는 김래원과 신세경은 언제나처럼 믿음직한 멜로 연기를 선보인다.

<흑기사>의 진짜 재미는 오히려 악역인 샤론(서지혜)과 백희(장미희)에게서 나온다. 뒤틀린 욕망 때문에 분이(신세경. 해라의 전생)와 명소(김래원. 수호의 전생)를 죽음으로 몰고 간 죄로 불로불사의 형벌을 받게 된 샤론과, 그 모든 비극의 배후에 있던 백희는 200여년의 세월을 각기 다른 결말을 꿈꾸며 버틴다. 샤론은 다시 한번 명소/수호를 만나 이번만큼은 자신이 사랑받는 꿈을, 백희는 자신이 지은 죄업을 씻어 부디 죽음을 맞이할 수 있기를 바라며. <흑기사>는 수호와 해라의 인연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운명적인 사랑이라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 과거와 현재를 오가지만, 동시에 그 긴 시간 동안 샤론과 백희가 어떻게 그 세월을 버텨냈는지도 함께 보여준다. 선역들이 정석적인 정통 멜로의 길을 걷게 두는 동안 미워할 수 없는 악역들을 이용해 극에 흥미를 더 하는 포석은, <흑기사>를 보는 이의 선호에 따라 누구를 진짜 주인공으로 삼아 극을 볼 것인지 선택할 수 있는 입체적인 텍스트로 만들었다.



노렸다고 밖에 볼 수 없는 장미희의 캐스팅 또한 볼 만한 지점이다. 세월의 흐름에도 빛이 바래지 않은 압도적인 고혹미와 젊은 감각을 자랑하는 장미희에게 200여년간 불로불사한 백희 역할을 맡기는 순간, <흑기사>가 부리려 했던 흑마술은 절반 이상 완성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 말이 믿기지 않으면 9화 중반부, 샤론이 “군산으로 물자가 모이던 시절, 매일 밤 큰 마작판이 열리던 기차역 근처 술집에 등장해 판을 싹쓸이 하던 두 젊은 남자”를 회상하던 장면을 보라. 압도되지 않을 도리가 있나.

칼럼니스트 이승한 tintin@iamtintin.net

[사진=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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