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든슬럼버’, 새로운 문제의식과 젊은 감각은 칭찬할만하다

[엔터미디어=황진미의 편파평론] △이 영화 찬(贊)△. (본문 중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실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골든 슬럼버>는 동명의 일본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이다. 사회문제를 반영한 가독성 높은 소설을 쓰는 것으로 유명한 작가 이사카 코타로가 2008년에 출판한 작품으로, 2009년에는 일본에서 영화로 만들어졌다. 영화는 이듬해 한국에서도 상영되었지만,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이번에 개봉한 리메이크 작 <골든 슬럼버>는 강동원 주연으로 일단 관객의 주목을 받는데 성공했다. 영화는 평범한 택배기사가 테러범의 누명을 쓰고 쫓기는 내용을 담은 속도감 넘치는 탈주극으로, 정치 음모론을 바탕에 깔고 있는 영화치고 대단히 젊은 감각을 보여준다.



◆ 음모론, CCTV, 하수구

영화 <골든 슬럼버>는 선거운동에 관한 뉴스와 택배기사 김건우가 모범시민 상을 수상했다는 뉴스 클립을 짧게 보여주며 시작된다. 모범시민 상을 받은 후 약간의 유명세를 얻은 김건우는 오랜만에 연락 온 친구 무열(윤계상)을 만난다. 보험이나 들어달라는 부탁이겠거니 생각하며 흔쾌히 만났는데, 어째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순간 광화문 한복판에서 폭탄이 터지고, “암살, 테러, 아무도 믿지 마라” 등의 알 수 없는 말을 남기고 무열이 갑자기 죽는다. 이후 김건우는 영문도 모른 채 쫓기는 신세가 된다. 그것도 대선 후보를 암살한 테러범이라는 어마어마한 누명을 쓰고. TV 뉴스에는 김건우가 테러범임을 입증하는 사진과 목소리로 도배가 된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골든 슬럼버>는 대선 판을 좌지우지하는 막강한 배후 권력을 암시한다. 그들은 김건우를 표적 삼아 엄청난 조작사건을 터뜨린다. 왜 하필 김건우 인가? 모범시민으로 얼굴이 알려진 그가 테러범이 되면, 모든 관심이 김건우 개인에게 쏠려 사건의 본질이 쉽게 묻히기 때문이다. 솔깃한 논리이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사건의 실체보다 중요한 것은 이미지이다. 드라마<피노키오><조작> 등이 경고했듯이, 미디어가 쏟아내는 이미지에 의해 누구나 하루아침에 영웅이 되기도 하고 살인범이 될 수도 있다.



여기에 영화 <조작된 도시>가 경고했듯이, 사건의 증거나 수사 과정이 조작되는 일도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런 상상도 가능하지 않을까. 만약 검찰조직을 장악한 막강한 세력이 미디어의 속성을 잘 활용한다면, 얼마든지 대중들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린 채 선거 국면에서 원하는 결과를 얻지 않겠냐고. 정치와 미디어에 관한 그럴듯한 음모론이 아닐 수 없다.

영화는 높은 속도감으로 정신없이 쫓기는 김건우를 보여준다. 남들보다 순박하고 쉽게 사람을 믿고 오지랖이 넓은 김건우가 엄청난 음모에 휘말려 옴짝달싹할 수 없는 위기에 빠지는 과정은 흥미롭다. 김건우는 무열이 남긴 연락처를 통해 전직 국정원 요원 민씨(김의성)를 불러내고, 그의 도움으로 간신히 위기에서 벗어난다. 민씨는 원작에는 없던 캐릭터로, 조직의 음모에 대항하기에 역부족인 김건우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 만든 장치이다. 민씨의 조력으로 김건우의 탈주에 속도가 붙고, 조금씩 진실을 추적하는 과정이 나름 참신하다.

영화는 CCTV로 뒤덮인 도시에서 감시자 역할을 하는 교통관제센터 ‘57분 교통정보’와 그러한 감시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하수구 맨홀을 중요한 이미지로 제시한다. 요컨대 교통관제센터는 천개의 눈으로 도시 곳곳이 감시되고 우리의 일상사가 이미지화 되고 있다는 사실을 시각화하기에 가장 걸맞은 공간이다. 또한 하수구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도시의 이면을 상징하는 공간으로 음습한 조작과 음모론을 다룬 영화에서 다뤄질만한 장소이다. 특히 쏟아져 내리는 하수에 의해 쓸려 내려가는 장면 역시 ‘쏟아지는 이미지의 홍수에 휩쓸리는 개인’이라는 작품의 주제의식과 잘 맞아떨어진다.



◆ 신뢰, 우정, 연대

‘골든 슬럼버’는 ‘황금빛 낮잠’ 이란 뜻으로, 비틀즈의 노래 제목이다. 비틀즈가 해체 위기에 있을 때, 폴 메카트니가 멤버들을 다시 모으고 싶은 마음을 담아 부른 노래로 알려져 있다. 영화의 제목이 ‘골든 슬럼버’인 이유는 학창시절 밴드활동을 했던 김건우의 추억과 멤버였던 친구들과의 우정을 중요한 모티브로 삼기 때문이다.

김건우가 하루아침에 테러범이 되어 쫓기고 무열이 죽어버리자 함께 밴드활동을 했던 친구들은 동요한다. 어리둥절한 친구들에게 감시의 권력이 밀착해온다. 수사에 협조하라는 겁박을 받는 친구들의 선택이 엇갈린다. 그러나 영화는 큰 줄기에서 신뢰와 우정을 말한다. 모든 친구들이 내뱉는 일성은 “김건우가 그럴 리 없다”는 것이다. 과연 영화는 착해빠진 김건우, 사람을 쉽게 믿는 김건우, 오지랖이 넓어 자주 손해를 보는 김건우의 캐릭터를 자주 언급하고 강조한다. 김건우의 성격이 영화의 주제와 밀착해 있기 때문이다. 착해빠진 그의 성격은 그를 모범시민이 되게 함으로써 음모세력의 표적이 되게 했지만, 그런 음모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힘이 되기도 한다.



김건우는 거대 조직과 맞서기에는 턱없이 무력한 존재이다. 김건우 뿐만이 아니라, 평범한 시민 누구라도 마찬가지이다. 음모의 실체를 알기는커녕, 도망 다니는 것조차 버겁다. 그에게는 거대 조직을 무너뜨릴 힘이 없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죽어야만 했던 그의 생존은 거대 조직을 무너뜨리는 무기가 된다. 오직 살아남기 위한 그의 발버둥은 거대 조직의 음모를 드러내게 하고, 스스로 무너뜨리게 하는 힘을 지닌다. 생존이 곧 적극적인 저항이 되는 것이다. 그를 살아남게 만드는 것은 바로 신뢰와 우정이다.

김건우에게 처음 음모의 실체를 언급한 무열은 김건우의 착함을 알기에 자신의 목숨을 버리며 진실의 일부를 발설하였다. 민씨 역시 처음엔 김건우를 협상물로 쓰려했지만, 그가 지닌 순수한 마음에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움직인다. 반신반의했던 친구들이 하나 둘 돌아서며 나름의 저항을 하는 것이나, 하다못해 이웃 아주머니가 김건우를 보고도 못 본 척 해주는 것은 김건우에 대해 평소 신뢰가 있었기 때문이다. 선영(한효주)를 비롯한 친구들이 “내 친구 김건우”를 믿고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도움을 준 것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데, 여기서 선영을 제외한 친구들의 면면이 제대로 부각되지 못한 것은 다소 아쉽다. 이 대목이 드러나야 하는 영화의 후반부에 뒷심이 딸리면서, 지리멸렬해진 바가 없지 않다. 그러나 영화는 이러한 구도를 통해 꽤 중요한 메시지를 던진다.



아무런 힘도 없는 평범한 시민들이 대규모 이미지 조작을 하는 막강 세력에 무엇으로 맞설 수 있는지를 영화가 힌트처럼 보여주기 때문이다. 대규모 이미지 조작만으로 완벽하게 장악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사람들 사이의 직접적인 관계이다. “그 사람 그럴 사람이 아니에요”라는 구체적인 믿음은 직접적인 접속과 소통을 통해 일어난다. 사람들 사이의 연결과 접촉이 늘어나고 신뢰를 바탕으로 한 연대가 살아있다면, 대규모 이미지 조작에 맞설 수 있다. 여기서 사람들 사이의 연결은 대면접촉 뿐만이 아니라 사회관계망 서비스(SNS)도 포함하는 개념이다.

사람들 사이의 개별적인 관계와 긴 시간을 두고 꾸준히 쌓아온 신뢰의 네트워크가 존재한다면, 거대조직이 이미지 조작을 시도하더라도 한순간에 휩쓸리지 않을 수 있다. 영화에서 조작된 이미지가 단시간에 사회를 휩쓸었지만 김건우가 버티는 동안 사람들 사이에 의문이 제기되고 여론에 역풍이 부는데, 이는 주목해야할 지점이다. 거대조직의 이미지 조작에 대응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바로 힘없는 개인들 사이의 관계임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영화는 다소 어설펐지만, 영화가 품고 있는 메시지는 매우 소중하다. 또한 김건우가 거대조직의 음모를 간파하고 싸우는 엘리트가 아니고, 진지한 기자회견을 하는 대신 연예기자의 카메라에 노출되는 결말은 민주화세대와 감각을 달리하는 지점이다. 정치 음모론을 바탕으로 하지만, 새로운 문제의식과 감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음미할만하다.

칼럼니스트 황진미 chingmee@naver.com

[사진=영화 <골든 슬럼버>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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