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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만갑’, 손예진이 소지섭 열등감 달래는 요정이라니
기사입력 :[ 2018-03-21 14:19 ]
‘지금 만나러 갑니다’, 이러니 여혐 콘텐츠로 읽을 수밖에

나는 사람이라네
남편의 아내 되기 전
자녀의 어미 되기 전에
첫째로 사람이라네

나혜석 <노라> 1926 <신여성>



[엔터미디어=황진미의 편파평론] ▲이 영화 반(反)▲. (본문 중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실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영화 <지금 만나러 갑니다>는 2003년에 출간된 동명의 일본 소설을 원작으로 삼는다. 일본에서 원작소설이 굉장한 인기를 끌었고, 2004년에 만들어진 영화도 상당히 흥행했다. 2005년에 한국에서 개봉하였을 때 큰 반향을 얻진 못했지만, 이번 리메이크 판에 대한 관객의 반응은 뜨겁다. 오랜만에 나온 멜로에 대한 반가움과 손예진, 소지섭을 향한 호감이 주효한 것으로 보인다.

<지금 만나러 갑니다>는 고전적인 판타지 멜로의 특징을 지닌다. 남편과 아들을 두고 요절한 여주인공이 1년 만에 살아 돌아온다는 동화적 판타지에, 학창시절 첫사랑의 설렘이 담긴다. 여기에 나름 반전도 있고, 원작보다 강화된 코믹함까지 재미의 요소이다. 하지만 영화의 메시지를 음미해보면, 도저히 지지하기 힘들다. 지극히 반여성적인 가치관을 깔고 있는 ‘여혐 콘텐츠‘이기 때문이다.



◆ 무해한 음모 수준의 문화 콘텐츠

“여성의 교육수준과 소득수준이 상승함에 따라 하향 선택결혼이 이루어지지 않는 사회관습 또는 규범을 바꿀 수 있는 문화적 콘텐츠 개발이 이루어져야 함. 이는 단순히 홍보가 아닌 대중에게 무해한 음모 수준으로 은밀히 진행될 필요가 있음”

2017년 국책연구기관인 보건사회연구원에서 열린 저출산 대책 포럼에서 원종욱 선임연구위원이 발표한 ‘결혼시장 측면에서 살펴본 연령계층별 결혼 결정요인 분석’이란 보고서의 결론 부분이다. 뜬금없이 왜 이걸 가져왔냐고? 영화를 보는 순간, ‘이것이 바로 그 무해한 음모 수준으로 개발된 문화 콘텐츠로구나’ 하는 느낌이 팍 들었기 때문이다.



수아(손예진)는 시골 고등학교에서 ‘범접하지 못할 정도로’ 전교 1등을 하는 우등생으로 서울의 대학에 진학했다. 수아를 짝사랑했지만 졸업할 때까지 말 한번 못 붙여본 우진(소지섭)은 체육 특기생으로 지방대학에 갔다. 군복무까지 마친 뒤에야 겨우 첫 데이트를 하게 되었고, 이후 편지를 주고받으며 관계를 이어갔다. 그런데 우진의 건강에 이상이 발견된다. 운동도 대학도 그만둔 우진은 수아에게 결별을 고한다. 수아가 찾아왔지만 외면하였고, 보고 싶어 서울로 찾아갔다가 잘 살고 있는 수아를 보고 돌아섰다. 이후 연락이 끊겼던 수아에게 갑자기 연락이 온다. 세 번의 데이트와 수십 통의 편지가 전부였지만, 수아는 대학원 진학도 포기하고 부모의 반대도 무릅쓴 채 우진과 결혼한다. 그리곤 임신 유지가 건강에 위험하다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아들을 낳는다. 이후 건강이 나빠져 32살에 죽고, 1년 후 살아 돌아온다.

이상하지 않는가. 영화는 우진이 남성으로서 느끼는 열등감을 보여준다. 즉 실패한 운동선수에다 건강 이상까지 있는 자신이 수아의 짝으로 부족하다고 느끼고 돌아서는 우진의 심정을 자세히 묘사한다. 여기까지는 현실 논리를 담고 있다. 하지만 수아가 왜 우진과 결혼하기 위해 모든 것을 포기했으며, 심지어 엄마가 되기 위해 목숨까지 내놓았는지는 현실 논리의 바깥에 있다.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영화는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오는 어마무시한 판타지에 영화의 승부처라 할 만한 반전을 가져온다. 그런데 이는 역설적으로 수아의 결정이 현실 논리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다는 방증이 아닌가.



◆ 남성의 열등감을 위무하기 위해 태어난 요정

영화 <지금 만나러 갑니다>는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온다는 극단적인 설정을 쓰면서도, 그가 사람인지 유령인지 좀비인지 설명하지 않는다. (<희생 부활자>의 구구절절한 설명을 상기해보라.) 어떤 세계관에 의해 그것이 가능한지 최소한의 설명도 생략한다. 다만 수아가 자기 예언처럼 써놓은 그림책의 내용을 세계관의 근거로 삼는다. 영화의 반전은 나름 오묘하지만, 결국 수아가 “나는 나의 미래를 보았다”는 자기 확신에 근거하여 그리 행동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얼 의미하는가. 수아는 사람이든 유령이든 상관이 없을 정도로 애초부터 판타지적인 존재이며, 자기충족적인 세계관 속에 놓인다는 것을 드러낸다. 예컨대 수아는 현실의 질감과 무게를 지닌 사람이 아니라 남성의 판타지 속에 거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상관이 없는 것이다.

예컨대 수아는 남성의 열등감을 위무하기 위해 남성의 머릿속에서 태어난 요정이다. ‘범접하기 힘든 전교 1등’이었던 동창과 겨우 사귀게 되었는데, 지금은 운동선수로서 미래도 끝장나서 먼저 헤어지자고 선언한 우진이 수아를 찾아온 장면을 상기해보라. 일본판에서는 다른 남학생의 우산이었지만, 한국판에서는 다른 남학생의 승용차를 타는 수아와 그걸 지켜보는 빗속의 우진. 이는 남성의 열등감을 극적으로 드러내는 클리셰적 장면이 아닌가. 여기서 수아가 그 남학생의 품에 안기는 것을 상상하면 <건축학 개론>의 ‘썅년 타령’(혹은 ‘강간이나 당해라’)가 되는 것이고, ‘차라리 잘 되었다’고 쓸쓸히 돌아서면 흔한 순정남의 서사가 된다.

그런데 굉장히 행복한 망상의 회로가 하나 더 있었으니, 바로 우진의 버전이다. 수아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지금 만나러 갑니다”하고 달려와 내 품에 안기는 것이다. 아니, 왜? 음...그건 나도 잘 모르지만, 수아가 갑자기 어떤 확신에 차서 학업, 꿈, 가족 등을 버리고 나와 결혼해 지방 소도시의 불안정 노동자의 아내가 되어 살뜰하게 살림을 하고, 또 나의 아들을 낳아서 엄마로서 무한 행복을 느끼는 것이다. 그러니까 왜? 그건 아마도, 여자란 다른 무엇보다 누군가의 아내와 엄마로 사는 것에 궁극적인 행복을 느끼는 존재이고....음...그리고 수아도 나를...원래부터 좋아했던 거지. 맞아, 걔도 날 짝사랑하고 있었던 거야!



◆ 살림의 요정

수아와 우진의 사랑 이야기일 뿐인데, 여기서 ‘여혐’ 이데올로기를 읽는 것이 이상한가. 영화는 여성에 대한 뚜렷한 이데올로기를 설파한다. 여자는 아무리 공부를 잘하든, 꿈이 무엇이든 간에 궁극적인 삶의 목적은 아내이자 엄마가 되는 일에 있다는 확신으로 영화는 가득 차 있다. 이는 수아가 우진에게 달려와 결혼하는 순간뿐 아니라, 죽었다 살아나는 기적의 상황에서도 관철된다. 수아는 기억을 잃은 채 우진과 아들 앞에 나타난다. 내가 누구인지도 알지 못하는 혼란스러운 상태에서, 미심쩍은 말을 해대는 부자를 따라 그들 집으로 간다. 하지만 곧 그들의 아내이자 엄마라는 정체성을 받아들이고 적응한다. 기억이 있든 없든, 자신을 누구라 생각하든, 여자는 금방 누군가의 아내이자 엄마의 자리에서 충족감을 느끼며 사는 것이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되었을 때, 여자는 아들에게 살림을 가르친다. 그러니까 살아생전 아내와 엄마로 충실히 살아가던 여자가 죽은 지 1년 만에 되살아나는-예수의 부활을 뛰어넘는-엄청난 상황에서 오직 살림을 가르치고 떠나는 이적을 행하신다. 요컨대 여자의 본분은 오직 살림인지라, 그가 죽은 뒤 집구석을 엉망진창으로 해놓고 사는 남편과 아들을 돌보기 위해 부활하시고, 잠시 머물면서 우진에게는 삶의 활력을 불어넣어주고, 아들에게는 살림을 가르치는 애프터서비스를 완벽하게 수행하고 다시 죽는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살림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여자는 그의 재능과 욕망이 무엇이든 간에, 궁극적인 삶의 의미가 아내이자 엄마로 살아가는데 있다는 거짓 신화를 유포하는 텍스트들은 많다. 아내와 엄마 되기 이외에 야심을 품은 여자들을 악녀로 묘사하거나, 실패하여 처벌받는 서사를 풀어내는 전통적인 방식은 물론이고, 커리어우먼의 불안한 심리를 강조하면서 그가 아무리 사회적인 성취를 거두더라도 공허한 인생일 수밖에 없음을 설파하는 데카당한 방식까지 나름 다양하다. 하지만 이처럼 노골적으로 여자의 삶의 의미가 오로지 아내이자 엄마로 살아가는 것에 있다고 세뇌하는 뻔뻔한 텍스트는 처음이다. 살림은 여자의 본능인지라, 수재였던 수아가 학업을 포기하고 결혼과 동시에 주부로 사는 것은 당연하고, 홀아비가 된지 일 년이 다 된 우진이 여전히 살림에 서툰 것도 당연하다. 왜? 그는 남자니까. 그런 남자의 서툶을 책임지는 것 역시 여성의 항구적인 임무라서 죽어서까지 제 갈 길을 가지 못하고 애프터서비스를 하러 돌아온다.

마틴 루터 킹이 소년이었을 때 “어떻게 흑인이 소젖 짜기와 소똥 치우기를 못하는지” 의아하게 쳐다보았다는 백인 이야기에는 기막혀하면서도, 여자라면 당연히 살림의 달인일거란 인식에는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1920년대에 나혜석은 “나는 사람이라네. 남편의 아내 되기 전, 자녀의 어미 되기 전에, 첫째로 사람이라네”라 선언했건만, 근 백 년이 지나도록 여자는 아내이거나 엄마일 뿐 사람이 아니다. 얼마나 사람이 아니면, 사람인지 유령인지 좀비인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불명확하게 그리랴.



◆ 남성의 비대한 자의식이 빚은 망상?

영화 <지금 만나러 갑니다>의 본질은 사랑이므로 ‘여혐’ 이데올로기 비판은 부차적이며, 수아가 우진을 많이 사랑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많은 문제가 해결된다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예컨대 수아의 결단을 사랑에 의한 자발적 선택으로 이해하고, 수아의 부활도 간절한 그리움의 발로로 이해하면 된다는 말씀이다. 일리가 있다. 그렇지 않아도 수아가 우진을 많이 사랑했음을 납득시키기 위해 한국판에서는 소지섭을 캐스팅하고, 육상선수가 아닌 수영선수로 설정을 바꾸어 잠시나마 그의 멋짐을 전시하려는 성의를 표하지 않던가.

그러니 영화의 본질인 사랑에 집중해보자. 영화의 대부분은 우진의 1인칭 관점으로 이루어져 있다. 반전을 통해 수아의 관점이 등장하며, 수아도 우진을 짝사랑하고 있었다는 설명이 덧붙는다. 그런데 이 반전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까. 혹 우진의 자의식이 개입된 것은 아닐까. 왜 이런 의심을 하느냐고? 짧게 출연한 공효진이 등장한 장면이 아무래도 이상하기 때문이다.



고운 한복 차림의 그녀에게 홍구(고창석)는 “신사임당 같은 여자”라고 말한다. 하필 홍구가 운영하는 빵집 이름이 ‘선녀 제과’다. 선녀 제과에 선녀 옷을 입은 그녀의 출현은 비현실적인 질감을 갖는다. 홍구가 그녀와 대화하는 유일한 장면에서 그녀는 주어를 여러 번 헷갈리게 말한다. 하지만 마지막 말은 분명히 전달된다. “우진이 아닌 당신이 잘생겼다”는 것이다. 공효진이 배시시 웃으며 고창석에게 잘생겼다고 말하는 이 장면을 어찌 보아야 할까. 혹시 홍구의 망상이 아닐까.

스포츠센터 여직원(손여은)이나 수영장의 여러 중년여성 등 영화 속 거의 모든 여자들은 우진에게 호감을 표하거나 잘생김을 찬양한다. 어쩌면 영화는 나름 일관되게 사랑이라는 것이 남성의 비대한 자의식과 근거 없는 자부심이 빚은 망상임을 보여주고 있으며, 고창석-공효진의 수상쩍은 장면은 그 흔적으로 존재하는 게 아닐까. 그러고 보면 ‘신사임당’에 대한 홍구의 마음이 자기가 좋아하는 것인지 우진에게 소개시켜주려는 것인지 모호하게 그려져 있다. 그렇다면 홍구와 우진은 분화되지 않은 하나의 자아인 것은 아닐까. 홍구는 우진 부자 외에 부활한 수아를 만난 유일한 사람이다. 꼭 다중인격이 아니더라도, 자신보다 우월한 여자들이 나를 좋아한다고 믿으며, 여자는 신사임당이거나 선녀이거나 살림의 요정으로 믿고 싶은 한 덩어리의 남성적 무의식이 홍구와 우진이라는 표현형으로 발현된 것은 아닐까.

이쯤 되니 실로 오싹해진다. 사실은 고창석의 외모를 지닌 남성이 자신을 소지섭처럼 생겼다고 착각하는 것이라면. 짝사랑하던 수아와 상상 속에서 살림을 차린 것이라면. 연고가 없는 여자를 데려와 감금하고 부활한 수아로 살게 한 것이라면. 이 모든 심리스릴러적인 상상이 황당하게 들릴지라도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온다는 판타지보다는 현실적이다. 이 모든 억측들을 배제하고, 수아의 사랑을 사실 그대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수아의 부활을 믿어야 하는데, 이는 종교의 영역에 속한다. 너희가 살림의 요정을 믿느냐.



◆ 일본과 한국에서 울려 퍼지는 ‘백 러시’의 돌림노래

혹자는 일본 원작의 리메이크 영화를 두고, 원종욱의 발표와 연결시켜 논지를 전개하는 건 무리라고 생각할 것이다. 일견 맞는 말이다. 그런데 일본은 한국보다 앞서 저출산 문제를 겪은 나라이고, 우에노 치스코의 저작에서 보듯이 한국과 우열을 가리기 힘든 ‘여혐사회’다. 저출산 위기가 심각해진 2000년대 초 일본에서 원종욱의 발표와 같은 구체적인 논의는 없었다할지라도 여성들을 결혼과 출산으로 유도해야 된다는 이데올로기적 압박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목적에 꼭 맞는 원작을 찾아 리메이크하는 것도 ‘무해한 음모 수준의 문화콘텐츠를 개발하라’는 명령에 부응하는 일이다. 요컨대 영화가 일본원작이든 아니든 여성들을 결혼과 출산으로 밀어 넣으려는 사회적 압력을 반영한 콘텐츠로 읽기에 무리가 없다. 크게 보면 <지금 만나러 갑니다>가 일본에 이어 한국에서도 흥행하는 현상은 동아시아 ‘여혐 문화권’ 안에서 15년의 시간차를 두고 울려 퍼지는 ‘백 러시’의 돌림노래로 읽힌다.



‘백 러시’는 실제로 존재한다. 원종욱은 징계를 받았지만, ‘무해한 음모 수준의 문화콘텐츠’는 계속 제작되고 있다. 젊은 여성이 삼촌뻘의 남자와 짝이 되거나(<나의 아저씨><미스터 선샤인>), 심지어 친구의 아버지를 사랑하기도 하고(<러브슬링>), 전문직 여성이 순박한 산골남자와 맺어지는(<데릴남편 오작두>) 텍스트들이 이 자장에 놓인다. ‘미투’ 운동에서도 음모를 찾으려 애쓰는 음모론자들이여, 이 음모에 주목하라. 진정한 음모론자라면 문건까지 공개돼 있는 확실한 음모를 그냥 지나치지 못할 것이다. 비혼을 외치는 여자들의 뇌파를 조종하여 하향선택결혼을 유도한다니, 인생을 걸고 파헤쳐볼만한 가공할 음모가 아닌가.

칼럼니스트 황진미 chingmee@naver.com

[사진=영화 <지금 만나러 갑니다>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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