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디 플레이어 원’, 3부작 준비하는 제작진을 위한 조언

[엔터미디어=듀나의 영화낙서판] 스필버그 감독의 신작 <레디 플레이어 원>을 두 번 봤고 모든 감상이 즐거웠다. 아마 이 영화도 블루레이로 구입해 마르고 닳도록 보면서 놓친 부분을 챙길 것 같다. 아니, 레퍼런스 이야기가 아니다. <레디 플레이어 원>에서 레퍼런스가 그렇게까지 중요한지 모르겠다. <샤이닝>과 <아이언 자이언트>에 대해서는 알면 도움이 된다. 공동각본가인 잭 펜의 할리우드 데뷔작 <라스트 액션 히어로>의 인용을 발견하고 으쓱거리는 재미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대부분 여벌의 재미로 얼마든지 교체가 가능하다. 내가 놓치고 싶지 않은 것은 스필버그가 ‘시네마’라는 매체를 다루는 태도와 어법과 디테일이다. 이 매력이 <레디 플레이어 원> 이후 가볍고 빠르게 만든 <더 포스트>에서 더 많이 느껴지는 건 아이러니지만.

하지만 <레디 플레이어 원>에 대해 긍정적인 이야기는 여러 차례 했고, 오늘은 좀 다른 이야기를 할까 한다. 예를 들어 올리비아 쿡의 캐스팅 같은.

일단 난 올리비아 쿡이 이 영화에서 정말 좋았다고 생각한다. 원래 주목하는 배우였고 새 영화 <서러브레드>와 <허영의 시장> 미니 시리즈도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이 인형처럼 예쁘장한 배우를 어렸을 때부터 얼굴에 있는 배내 점 때문에 외모 컴플렉스가 있는 인물로 캐스팅한 건 좀 어이가 없다. 남자 주인공 웨이드가 쿡의 캐릭터 사만다를 처음 보고 “난 실망하지 않았어” 어쩌고 하며 위로하는 장면은 그냥 입력이 되지 않는다. 얼굴에 배내 점이 있건, 없건 사만다는 그 반경 몇 킬로 안에서 가장 미인이었을 것이고 한 1분 정도 지나면 아무도 그 얼룩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게 영화의 내용과 맞는가? 글쎄다. 원작에서 사만다는 쿡처럼 미인으로 그려지지 않았다는 점을 잊지 말기 바란다. 웨이드는 여전히 사만다의 외모에 만족하지만 그건 “영화배우 같은 미모는 아니지만 그래도 내 취향이야”에 더 가까웠다. 하지만 영화는 사만다가 아름답지 않은 무언가가 되는 걸 금하는 것 같다.

영화 속에서건, 원작 속에서건 사만다/아르테미스를 싫어하긴 어렵다. 사만다는 정의롭고 영리하고 용감하다. 사만다의 아바타 아르테미스는 영화 속에서 가장 공들여 묘사한 캐릭터로, 이 캐릭터의 표정 연기에 들인 공은 영화 속 나머지 캐릭터들의 표정연기에 들인 공과 거의 맞먹는다. 사랑받게 만들어졌고 실제로도 사랑받는 인물이다. 바로 그게 걸린다. 사만다는 남자주인공 웨이드에게 사랑받을 가치가 있는 인물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를 넘어서거나 거스르는 어떤 행동도 하지 않는다. 모든 좋은 것들을 다 부어 만들었지만 갈 수 있는 길에는 한계가 있는 것이다.

<레디 플레이어 원>은 엑스 세대 미국인 남성 오타쿠의 소망성취 환상이 폭주하는 영화이고 그게 나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사랑과 욕망에 대한 정직함은 관객들과 작품을 연결시키는 중요한 통로이다. 하지만 한 사람의 소망이란 공간의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레디 플레이어 원>의 세계는 백인남자가 아닌 사람들이 들어가기 쉽지 않다. 그걸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건 영화의 배경이 되는 오아시스의 창조자 할러데이의 짝사랑 상대 키라이다. 우리는 키라를 사랑한 남자들에 대해서는 상당히 자세하게 안다. 하지만 정작 키라는 그 남자 중 한 명이 만든 게임 속에 갇힌 이미지만으로 존재한다. 웨이드의 단짝 H는 동성애자 여성의 정체성보다 명예남성의 역할이 더 중요한 것 같고 피날레는 그냥 악당의 손발에 불과하다.



<레디 플레이어 원>의 세계가 꼭 우리의 미래와 이어지라는 법은 없다. 그래도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21세기 중반의 게임 세계도 영화 속에 반영된 중년 백인 남자 오타쿠의 환상의 연장선에 있을까? 만약 지금의 투쟁과 그로 인한 결과가 반영된다면 그 미래는 어떤 모양일까?

스필버그는 영화가 끝나면 “게임은 적당히 하고 가끔 나가서 놀아라”라고 말한다. 많이들 이 메시지를 꼰대스럽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게 꼰대스럽고 아니고를 떠나 무척 절실하다고 생각한다. 중증 오타쿠인 두 각본가(그 중 한 명은 원작자 어니스트 클라인 자신이다) 그리고 주인공 웨이드가 이에 동의한 건 이것이 오아시스의 미래와 연결되어 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일단 아무리 가상 세계가 좋다고 해도 언제까지 곧 무너질 수도 있는 트레일러 파크에 살 수는 없는 게 아닌가.

그리고 무엇보다 오아시스의 세계는 화려하지만 끔찍하다. 이 세계의 시민들이 파고 있는 건 모두 과거의 유물들이다. 1980~90년대 서브컬처에 대한 집착이야 이스터 에그 찾기 때문이라고 해도 이처럼 현대와 실제 세계에 관심이 없는 세대는 위험하다. 암만 봐도 이들 세계는 창작자들이 멸종하고 팬덤만 남은 곳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 팬덤이라는 것이 얼마나 반동적이 될 수 있는지는 지난 몇 년의 경험이 이미 입증했다고 본다.



허구의 재료로만, 팬덤의 몽상으로만 만들어진 세계는 공허할 수밖에 없으며 필연적으로 퇴보한다. 오아시스의 환상은 누군가가 바깥으로 나가 변화하는 세상에 참여함으로서 존재할 수 있다. 그렇게 나간 사람들이 현실의 재료를 갖고 창작을 해야 새롭게 성장하고 소비할 판타지가 나오고 그래야만 젊고 새로운 팬덤이 형성되는 것이다. 모두가 오아시스에 머문다면? 그 세계는 자기 살을 뜯어먹다가 결국 굶어죽을 것이다.

<레디 플레이어 원> 엑스 세대 추억 팔이는 재미있었다. 하지만 이는 한 번이면 족하다. 소문을 들어보니 어니스트 클라인은 소설의 3부작을 계획하고 있다고 한다. 제목은 <레디 플레이어 투>, <레디 플레이어 쓰리>로 나가나보다. 그는 보다 캐릭터 중심적인 이야기를 계획하는 모양인데, 그렇게 큰 기대는 안 된다. 그의 재능이 거기에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 시리즈가 추억 팔이를 넘어 21세기 중반의 현실에 보다 치중한다면 3부작의 의미는 충분하다고 본다. 속편에서는 웨이드를 제외한 다른 친구들이 자기만의 이야기를 찾기 바란다.

칼럼니스트 듀나 djuna01@empas.com

[사진=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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