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술 권하는 사회의 휴식 같은 로맨스

[엔터미디어=TV삼분지계] ◾편집자 주◾ 하나의 이슈, 세 개의 시선. 각자의 영역을 가지고 대중문화와 관련된 글을 쓰고 있는 정석희·김선영·이승한 세 명의 TV평론가가 뭉쳐 매주 한 가지 주제나 프로그램을 놓고 각자의 시선을 선보인다. 엔터미디어의 [TV삼분지계]를 통해 전문가 세 명의 서로 다른 견해가 엇갈리고 교차하고 때론 맞부딪히는 광경 속에서 오늘날의 TV 지형도를 그려볼 수 있는 단초를 찾으실 수 있기를.

바야흐로 로맨스의 계절이다. 길고 지루한 겨울을 끝내고 새 봄을 맞은 방송사들은 저마다 한편 이상의 로맨스를 선보이고 있다. JTBC 새 금토드라마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는 그 중에서도 유독 눈에 띈다. 멜로의 대가 손예진의 원톱드라마인데다, 멜로에도 사회극을 절묘하게 결합시키는 복합장르 연출의 거장 안판석 감독의 복귀작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기대대로, 첫 주 방영을 마친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는 단순한 로맨스 이상의 이야기를 선보였다. 손예진의 멜로 연기 못지않게 여성드라마이자 직장인 드라마로서의 현실감이 화제를 모은 이 작품의 첫 주를 [TV삼분지계]가 분석해봤다.



◆ 직장인의 현실적 애환에 더 눈길이 간다

우리 사회 곳곳에 똬리를 튼 권력의 암투와 부조리를 통쾌하게 꼬집어온 안판석 감독이 이번 드라마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를 통해서는 평범한 사랑 얘기에 집중할 계획이라 했다. 그러나 벌써부터 중·장년층 여성들 사이에서는 청춘 남녀의 사랑 얘기보다 직장인의 현실적인 애환이 화제다. 모임에서 만난 한 어머니는 음주가 잦은 딸을 동네 창피하다며 나무라기만 했는데 어쩌면 극 중 윤진아(손예진)와 같은 속사정이 있는지도 모르겠다며, 직장 그만두고 싶다는 넋두리가 괜한 투정이 아니었나 보다며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그런가하면 식탐 많은 남편이 끼니때마다 부하 직원들에게 실례를 하면 어떡하느냐 한 걱정을 하시는 분도 계셨고. 실제로 직원들끼리 밥 먹는 모습이며 노래방 장면에 뜨끔한 이들 꽤 있지 싶다. 책읽기가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많은 것들을 알려준다지만 공감도 높은 드라마 또한 그 못지않게 우리 삶에 영향을 준다. 오히려 문제를 공론화 시킨다는 점에서 드라마가 한 수 위가 아닐는지.

커피 전문회사에서 매장을 관리하는 슈퍼바이저 윤진아는 매사 긍정적인 자세 덕에 ‘윤 탬버린’이라 불릴 정도로 윗선의 신임을 얻었지만 그런 만큼 안팎으로 치어 고단한 신세다. 나이는 먹어가고, 미래가 불투명한 마당에 연애도 틀어지고, 집에서는 결혼 압박이 날로 더해지고. 그 와중에 만난 감로수 같은 새로운 사랑. 우여곡절 끝에 사랑이 결실을 맺거나 또 다시 어그러지거나 그것이 해피엔딩이 아님을 우리는 잘 안다. 윤진아가 혼자만으로도 행복한 사람으로 성장해주기를.

방송 칼럼니스트 정석희 soyow59@daum.net



◆ ‘술 권하는 사회’의 휴식 같은 로맨스

제목엔 밥이 들어가고 배경은 커피회사인데 술 마시는 장면이 제일 많이 나오는 드라마.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의 첫 인상을 요약하면 그렇다. 과잉노동과 성추행을 견뎌야 하는 직장, 이별을 통보한 순간에도 발렛비를 내달라는 치졸한 전 애인, “과년한 딸”의 ‘남부럽지 않은’ 결혼이 지상과제인 가족 등 서른다섯 윤진아(손예진)를 둘러싼 현실은 그 자체로 ‘술 권하는 사회’다.

첫 회 오프닝부터가 이 드라마의 성격을 잘 드러낸다. 진아가 관리하는 한 가맹점에서 사소한 것 하나까지 꼼꼼하게 점검 목록을 확인하는 모습을 다큐멘터리처럼 담아냈다. 이미 수천 번도 더 되풀이했을 일과의 한 풍경을 뚝 떼어 내온 것 같은 장면이 롱테이크로 덤덤하게 흘러간다. 로맨스를 표방하는 드라마에서, 별 예사로울 것도 없는 여주인공의 일상을 이렇게까지 세세하게 비추며 시작한 사례가 또 있을까. 이 작품의 무게중심이 철저하게 윤진아의 삶에 있음을 말해주는 도입부다.



“가족 같은 사이”였던 친구 동생 서준희(정해인)와의 로맨스가 설득력을 얻을 수 있는 것도 윤진아의 이야기를 튼튼하게 설계했기에 가능하다. 드라마는, 무례한 애인의 이별 통보로 진아의 피로가 극에 달한 바로 다음 장면에서, 긴 타국 생활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서준희의 첫 등장을 비추며 그가 진아의 지친 삶에 안식 같은 존재가 될 것임을 예고한다. 실제로 준희는 진아가 일과 사람에 치일 때마다 브레이크 타임처럼 나타나 이완의 순간을 마련해준다. 굽 높은 구두를 신고 유독 바쁘게 뛰어다녔던 날, 무거운 걸음을 옮기는 진아 앞에 자전거를 타고 경쾌하게 등장한 3년 만의 첫 재회신부터가 그랬다. 일상의 피로와 ‘썸’이 휴식처럼 뒤섞이는 순간을 기막히게 그려내는 로맨스다.

칼럼니스트 김선영 herland@naver.com



◆ 안판석 월드 속 여성의 연대

절친의 남동생과 감정을 키워가는 30대 직장 여성의 이야기. 기본 줄거리만 놓고 보면 이미 12년 전 MBC <여우야 뭐하니>에서도 등장한 설정이니 그리 새로울 건 없다. 하지만 잊으면 안 된다.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는 안판석의 멜로다.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전반의 공기는 매캐하다. 직장상사들은 무능한 것으로도 모자라 성추행을 밥 먹듯 하고, 그런 상사의 무능을 대신 수습해야 하는 진아(손예진)는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할 지경이다. 전 애인 규민(오륭)은 진아가 무색무미의 ‘곤약’ 같다며 결별의 책임을 진아에게 돌리고, 그런 사정을 모르는 엄마(길해연)는 규민이 명문가 자식이니 빨리 결혼하라고 진아의 등을 떠민다.

전작들을 통해 익히 증명된 것처럼, 안판석 월드를 구성하는 이들은 대체로 복잡하게 나쁜 사람들이다. 대단한 악의가 있는 게 아니라, 속물적인 욕망을 무신경하게 주변에 휘두름으로써 삶의 피로도를 높이는 사람들. 그리고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속의 그들은 멜로 드라마 톤으로 부드럽게 순화된 버전이 아니라, 당장이라도 안판석의 전작 JTBC <밀회>에 던져둬도 위화감 없이 어울릴 만큼 사실적인 버전으로 말하고 움직인다.



반면 진아가 아주 오래된 절친 경선(장소연)과 함께 술잔을 기울이며 마음을 달래는 장면이나, 자신을 존경하며 자신이 걸어온 길을 따라 걷는 후배직원 예은(이주영)과 교감하는 장면들은 저 싸늘한 세계 속에서도 유달리 따뜻한 도피처처럼 연출됐다. 진아가 살고 있는 삶을 가장 근사치까지 이해할 수 있는 이들이기에, 그들과 함께 있는 순간들이 한없이 무해하고 온화하게 그려진 것이다.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는 기획 의도에서 진짜 사랑을 “타인의 기쁨과 슬픔, 희열과 고통을, 그 질감을 가감 없이 그대로 느낄 수” 있는 것이라 정의한 바 있다. 당연히 준희(정해인)와의 연애를 염두에 두고 적은 기획 의도겠지만, 적어도 2화까지만 놓고 보면 진아의 기쁨과 슬픔을 가장 잘 이해해주는 이들은 동료 여성들이다. 연상연하 이성애 멜로 드라마 뿐 아니라, 여성이 동료 여성들과 연대하는 자매애 멜로로의 가능성도 농후하게 품고 있다는 점에서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의 시작은 몹시 흥미롭다. 아직 준희와 진아의 연애는 시작도 안 됐는데, 벌써부터 마음이 말랑말랑하다.

칼럼니스트 이승한 tintin@iamtintin.net

[사진=JT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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