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들을 위한 스탠드업 코미디쇼 ‘래프라우더’ 리뷰

[엔터미디어=이승한의 TV키워드사전] 흔히 한국이 스탠드업 코미디의 불모지라 생각하기 쉽지만, 한국이라고 스탠드업 코미디가 영 없었던 것은 아니다. 따지고 보면 박미선이 처음 유명세를 얻었던 콩트 코미디 ‘별난 여자’ 또한 넓은 의미에서의 스탠드업 코미디였다. 물론 신불출에서 시작되어 장소팔·고춘자를 거쳐 온 이 계보는 영미권 스탠드업 코미디보단 일본의 만자이(漫才) 전통에 더 가깝지만, 우리 코미디 역사에 스탠드업의 계보가 있었다는 것만은 사실이다.

계보가 끊긴 자리에서 새로 길을 내려는 걸까. 최근 들어 한국에도 스탠드업 코미디를 적극적으로 소비하고 실천에 옮기는 이들이 늘고 있다. 해외 유명 스탠드업 코미디언들의 공연에 한글 자막을 달아 유튜브를 통해 유통하는 이들이 늘어나는가 하면, 2015년 7월에는 여성 코미디언들이 만든 훌륭한 코미디 작품들을 함께 소비하는 모임인 ‘페미니스트 코미디 클럽’이 발족하기도 했다. 작가 유병재는 2016년 JTBC 예능 <말하는 대로>에 출연하며 자기 방식으로 한국형 스탠드업 코미디의 가능성을 점쳐보고, 2017년 8월 첫 공연 <블랙코미디>를 선보이기도 했다.

한국형 스탠드업 코미디의 부흥을 바라는 마음으로, 지난 주말 서울에서 열린 두 편의 스탠드업 코미디 공연을 소개한다. 유병재의 [B의 농담]에 이어 오늘 소개할 공연은 페미니즘 프로젝트 ‘와일드블랭크프로젝트’와 여성 생활 매거진 ‘헤이메이트’가 함께 개최한 여성 스탠드업 코미디쇼 [래프라우더]다. 두 리뷰를 함께 보며, 한국형 스탠드업 코미디의 오늘과 잠재적 가능성을 함께 조망할 수 있길 바란다.



◆ “울면서 밖에 할 수 없었던 이야기를 웃으며 같이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청계천변 수표동 공구상가 안쪽 골목의 오래된 건물, 스탠드업 코미디쇼 [래프라우더](Laugh Louder)가 열린 칵테일 바 ‘신도시’는 ‘정말 이런 곳에 칵테일 바가 있나’ 싶은 곳에 입주해 있다. 드릴과 용접봉, 볼트류를 파는 오래 된 건물의 계단을 묵묵히 오르고 또 오르면 비로소 등장하는 이 기묘한 칵테일 바. 행사를 공동기획한 ‘와일드블랭크프로젝트’의 기획자 홍진아씨가 관객을 환영하며 꺼낸 멘트 역시 “여러분 5층까지 계속 의심하며 올라오셨죠? 저도 여기 처음 올 때 그랬어요.”였다.

아는 사람들은 알지만 아직 접해본 적 없는 이들에겐 의심스러운 공간이라니, 어쩐지 공간의 성격이 [래프라우더]의 성격과 비슷하다는 인상이 들었다. 팟캐스트 <독일언니들>과 <영혼의 노숙자>를 통해 일찌감치 Matt돼지의 차진 입담을 접해본 사람들이라면, 혹은 윤이나 작가의 에세이집 <미쓰윤의 알바일지>를 읽어봤거나 그와 사석에서 이야기를 나눠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래프라우더]가 어떤 모양새로 나올지 짐작이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경험이 아직 없는 이들에게 [래프라우더]는 다소 생소한 기획이었을지도 모른다. 한국에서 소규모 클럽 스탠드업 코미디 공연이 열린다는 것도 낯선 일이고, 여성 코미디언이 여성 관객을 위해 준비한 여성 코미디라는 것도 신기했을 마당에, 심지어는 첫 공연의 테마가 ‘여성과 섹스’라니. 여성은 남성보다 덜 웃기다는 세계 공통의 뿌리 깊은 편견과, 남성이라면 몰라도 여성이 자신의 성욕을 공공연하게 이야기하는 건 수치스러운 일이라는 한국의 보수적인 성 관념을 동시에 뛰어넘겠다는 포부이니, 잘 모르는 이들에겐 “그게 한국에서 가능한 일인가” 싶었으리라.

‘설치고 말하며 더 크게 웃는 여성들을 위한 스탠드업 코미디쇼’라는 부제가 붙은 [래프라우더]의 지향점은 분명하다. “여성이 다른 여성들 앞에서 큰소리로 이야기하는 경험, 여성의 이야기에 다른 여성들이 웃는 경험, 여성으로서 불편하지 않은 코미디를 즐기는 경험”이 그것이다. 행사를 공동기획한 ‘헤이메이트’의 기획자 황효진씨는 [래프라우더]를 기획하게 된 계기를 이렇게 설명했다. “시작은 3월 8일 여성의 날에 열린 ‘왜안돼’ 페스티벌이었어요. 경력단절여성을 위한 소셜벤처 위커넥트와 와일드블랭크프로젝트가 같이 주최한 페스티벌인데, 제가 (모더레이터로 참여했다가) 보고 너무 놀란 거예요. 아, 여성들이 이렇게 나와서 말을 잘 할 수 있구나. 말하는 사람이 여성이고 듣는 사람이 여성일 때 분위기가 얼마나 좋은지를 보고 놀랐고요. 여성들끼리만 통하는 농담이 있다는 것도 그때 크게 느끼게 된 거예요. 여성이 앞에 나와서 누군가에게 이야기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느꼈고요. 사실 이때까지는 여성들이 그런 이야기를 울면서 밖에 할 수 없었는데, 이런 이야기를 우리가 웃으면서 같이 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울면서 밖에 할 수 없”는 이야기. 한국의 미디어가 여성으로서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여성을 그리는 방식은 대체로 이런 식이었다. KBS <아침마당>을 위시로 한 아침 토크쇼들을 떠올려보라. 여성이라서 경험한 경력단절, 여성이라서 경험한 성적 대상화와 유무형의 성폭력, 여성이라서 경험한 차별 등을 이야기할 때, 한국의 미디어는 일단 여성이 손수건으로 눈물을 찍어내는 모습을 먼저 보여준다. 한국사회의 남성우위 구조에 대해 이야기할 때, 화자는 최대한 박해 당한 피해자의 자리에 서서 보는 이들의 연민을 자아내는 액션을 취해야 비로소 “이제껏 얼마나 힘들었을까”라는 공감을 살 수 있었다. 그런 방식이 아니라 웃으면서 구조를 공격하는 자리에 선 여성들은 ‘기가 세다’랄지 ‘드센 여자’라는 레이블링을 당해야 했다. 순결한 피해자와 마녀라는 단순한 이분법으로 포괄되지 않는 여성들이 설 자리는 그리 많지 않았다. [래프라우더]가 지향하는 자리가 아마 그 자리가 아니었을까? 자기 위치에서 일하고 욕망하고 살아가는 평범한 여성들의 삶을 눈물 없이 웃으며 이야기 할 수 있는 자리.



◆ 공감에서 오는 물개박수 “나팔관이 어디 있는 건지는 내가 알겠어!”

준비된 좌석 65석이 그리 많은 좌석은 아니었지만, [래프라우더]는 클라우드 펀딩 플랫폼 ‘텀블벅’에 페이지를 개설한지 하루 만에 매진을 기록하며 목표금액 150만원을 훌쩍 넘긴 261만원을 모금하는데 성공했다. 생각보다 적은 좌석 수에 빨리 매진이 되자, 티켓을 구하고 싶었는데 놓쳤다는 이들의 목소리도 적지 않았다. 보고자 하는 이의 숫자는 창대하나 준비된 자리의 수가 미약한 탓에 아쉬워하는 이들이 많았던 셈이다. 워낙 시장에 공급이 없어서 그 수요가 확인된 적이 없었을 뿐, 여성이 여성의 언어로 여성들에게 코미디를 선보이는 체험을 바라는 잠재적 수요가 유의미하게 존재했던 것이다. 그렇게 운 좋게 티켓을 구한 이들이 일요일 저녁 칵테일 바 ‘신도시’를 가득 메우자, 무대 한쪽 구석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있던 윤이나 작가가 마이크를 들고 성큼성큼 무대 위로 올라온다. ‘4차산업혁명의 시대, 기계는 어떻게 인간을 이기는가?’라는 제목을 단 그의 코미디의 주제는, 여성용 자위기구였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세계문학전집을 보다가 <채털리 부인의 사랑>에서 깊은 깨달음을 얻고 일평생 여성이 느낄 수 있는 오르가즘을 찾아 헤맸다는 그는, 여성의 성욕에 대해서 찾아볼 수 있는 정보가 부박했던 시절을 회고했다. “너무 안타까웠던 게, 제가 20대일 때만 하더라도 인터넷에 지금처럼 다양한 정보가 없었어요. 자꾸 해부도를 보여주는 거야! 클리토리스라는 단어도 알겠는데, 그게 어디 있냐는 거죠.” 윤이나 작가는 남자 청소년의 자위에 대해서는 자연스러운 성장 발달 과정의 일부로 여기며 자세한 설명과 지도가 따라 붙는 반면, 여성의 성적 쾌락에 대해서는 좀처럼 이야기하기를 꺼리는 한국 사회의 분위기를 적극적으로 농담의 소재로 차용했다. “나는 오히려 나팔관이 어디 있는 건지는 알겠어!”라는 그의 말에, 객석을 가득 메운 여성 관객들이 물개박수를 치며 폭소를 터뜨렸다. 모두들 여성의 성에 대해 이야기할 때 나팔관과 자궁의 위치를 보여주는 해부도를 보여주며 임신과 출산을 강조할 뿐, 쾌락으로서의 성을 이야기하는 건 터부시하는 암묵적인 분위기가 무엇인지 공감했던 것이다.

윤이나 작가의 뒤를 이어 올라온 팟캐스트 <영혼의 노숙자>의 진행자 Matt돼지는 스탠드업 코미디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에 독일에서 한국으로 돌아온 스탠드업 코미디언이다. 이미 영화 <피의 연대기>측이 기획한 행사 <생리 파티>를 통해 스탠드업 코미디 데뷔 무대를 가졌던 Matt돼지는 여유 있는 애티튜드로 관객들과 호흡했다. ‘미션 임파서블: 한국에서 성욕 강한 여자로 살아남는 법’을 주제로 시작한 이야기는 물 흐르듯 펼쳐졌다. 여성이 상품의 일부인 양 남성들에게 끊임없이 제공되는 나이트클럽에 환멸을 느끼고 자신이 주체적으로 상대를 물색할 수 있는 클럽으로 유흥의 무대를 옮긴 이야기, 그러나 상대의 얼굴도 보지 않고 뒤로 접근해서 아랫도리부터 들이대는 남자들에게 식겁한 이야기가 펼쳐질 때마다 관객들은 박수로 환호했다. “그냥 그런 문화니까 내가 감수해야 하는 거구나 싶었어요. 그런데 내가 독일에 갔는데, 뒤로 오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거야! 갑자기 잔을 들고 삭 내 앞으로 오는 거야. 아니면 옆에서 말을 걸거나. 그때 알았어요. 아, 이게 잘못 된 거였구나.”

한국과 독일을 오가며 확인한 한국의 폐쇄적인 성 문화에 대해 이야기하던 Matt돼지는, 한국 여성이 성에 소극적인 이유를 이야기하다가 미디어 속에서 재현되는 여성상을 정면으로 지적한다. “한국 여자 중에 섹스에 집중을 못하겠다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데, 제 생각엔 여성의 몸에 대한 남자들의 시선에서 여성들이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인 거 같아요. TV나 미디어만 봐도 정말 날씬한 사람들만 많이 나오잖아요 보통 웬만큼 괜찮아서는 자신의 몸에 자신감을 가지기 힘들어요. 그러니까 내 친구도 포즈에 따라 자기 몸이 어떻게 보일지가 너무 신경 쓰여 가지고 집중을 못하겠다는 거지. 그래서 할 때마다 약간 유체이탈 하듯 자신의 몸을 내려다 본대! 집중을 못 한다는 거야!” 날씬하고 몸의 굴곡이 큰 체형의 여성만을 반복해서 전시하는 동시에, 성욕에 대해서 주체적으로 말하는 이들은 배제함으로써 남성들의 욕망에 응답하기 좋은 여성만을 남기는 한국 미디어의 폐해에 대해 공감한 관객들은 때로는 한숨으로, 때로는 환호성으로 공연에 호응했다.



◆ 우리도 말하고 웃을 수 있는 사람들이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객석에 앉은 남성 관객들의 반응이었는데, 60여석 중 다섯 개 정도의 좌석을 메우고 있던 남성 관객들 또한 윤이나 작가와 Matt돼지의 농담에 함께 박수를 치며 웃었다. 침대에서 정확하게 만족시켜주지 못하는 남자들의 답답함이나, 한국 사회에서 여성이 받는 취급에 대한 날 선 농담들이 남성 관객들에게 더러 불편하지 않았을까 하는 걱정은 기우였다. 물론 제 돈 주고 공연에 왔으니 그런 농담을 유쾌하게 소비할 준비가 되어 있는 관객들이었겠지만, 여성을 주 소비층으로 놓고 구성한 코미디에 함께 웃는 남성 관객들이 존재한다는 건 [래프라우더]가 지닌 잠재적 확장성을 암시하는 광경처럼 보였다. 남성 코미디언이 들려주는 남성의 성에 대한 농담에 함께 웃는 여성 관객들이 있는 것처럼, 여성 코미디언이 직접 여성의 성에 대한 농담을 들려줄 수 있으며 그를 함께 소비할 남성 관객의 수요 또한 존재한다는 걸 확인할 수 있는 귀한 시간이었다.

1부를 윤이나 작가와 Matt돼지의 공연으로 채운 [래프라우더]는, 2부에서는 직접 자신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하는 관객들을 무대 위에 세웠다. 1부에서 여성의 성에 대한 이야기가 자연스레 오가는 걸 본 관객들은, 자신에게도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는 걸 깨닫고 자발적으로 제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마초적인 남자친구에게 맞추느라 주체적이던 면모를 깎아냈다가 이별 후 다시 삶과 성의 자치권을 획득한 이야기를 들려준 관객, 주체적인 성 생활을 노년까지 이어가는 것을 꿈으로 삼은 이야기를 들려준 관객, 자신이 파트너와 대등하고 안전한 관계를 만들어 간 과정에 대해 들려준 관객 등, 살면서 자신이 한 체험에 대해 웃으며 이야기하고 싶은 이들의 용기에 객석은 환호성을 보냈다. 여성 또한 말할 수 있고 웃길 수 있는 존재라는 당연한 사실을, 단순히 윤이나 작가와 Matt돼지의 공연만이 아니라 직접 무대에 올라 새삼 확인하는 자리였던 것이다.

물론 [래프라우더]의 첫 공연 성공에 대해 냉정하게 평가하자면 못할 것도 없다. 만족시켜야 할 관객의 수가 적었고, 공연에서 어떤 이야기가 나올지 대부분의 관객들이 짐작하고 있었으며, 관객의 대부분이 여성이었기에 공감을 사기가 더 쉬웠다는 점들은 얼핏 [래프라우더]가 성공이 보장된 쇼였던 것처럼 보이게 만들기 쉽다. 그러나 본래 스탠드업 코미디쇼의 절대 다수는 소규모 클럽 공연으로 시작했다는 점이나, 무대에 오르는 코미디언들은 관객들이 두루 공감할 만한 주제를 선호한다는 점, 그리고 아무리 여성들끼리 모여 있는 자리라 해도 민감한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매번 성공하긴 어렵다는 점을 감안하면, [래프라우더]가 거둔 성공의 의미는 결코 작지 않다. “우리는 같이 웃을 준비가 됐고, 이런 이야기에 웃고 싶은 분들이 많다는 것을 확인한 만큼, 다음 번에도 이 [래프라우더]라는 행사를 이어가려고 해요. 가능하다면 전국투어까지 행사를 이어가 보려고 합니다.” 쇼를 기획한 황효진씨의 말에 관객들은 환호로 답했다. 다음 공연을 열 종자는 그렇게 그 자리에서 확보한 듯 보였다.

이승한 칼럼니스트 tintin@iamtintin.net

[사진제공=래프라우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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