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슬러’, 아가씨와 여의사에게 동시에 사랑받는 아저씨라니

“주인공이 그럭저럭 일상을 보내는데,
그럭저럭 여자에게 인기를 끌어요.
왜 인기가 있는지 왜 인간적으로 매력이 있는지
그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 없어요.”

-가라키 아쓰시



[엔터미디어=황진미의 편파평론] ▲이 영화 반(反)▲. (본문 중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실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극장가가 온통 <어벤져스-인피니티 워>로 뒤덮인 가운데, 소수의 영화들만 스크린을 지키고 있다. <챔피언><당갈><레슬러> 등 공교롭게도 모두 근력을 겨루는 스포츠를 다룬 영화들이다. <당갈>과 <레슬러>은 자식을 레슬러로 키워내는 아버지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더욱 공통점을 지닌다. <당갈>은 성차별이 극심한 인도에서 사회적 편견이 맞서 딸을 레슬러로 키워내는 아버지의 이야기로 상당한 감동을 지닌다. <레슬러>도 과거 국가대표 레슬링 선수였지만 지금은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의 아빠’가 되는 것이 꿈인 중년남자를 그린다.

친근한 얼굴의 유해진이 아들 뒷바라지에 매달리는 홀아버지 역할을 맡아 기대만큼의 연기를 보여준다. 간간히 터지는 유머도 있고, 레슬링 장면이 뿜는 활력도 나쁘지 않다. 영화는 두 개의 갈등 축을 지닌다. 첫째는 아들의 친구이자 가족처럼 지내는 이웃의 가영(이성경)이 귀보(유해진)에게 돌연 사랑고백을 하는 것이다. 둘째는 가영의 고백이 사춘기 아들의 반항심에 불을 지르면서, 부자갈등이 시작된다.



◆ 두 개의 갈등의 축

영화 <레슬러>는 코미디나 가족극으로 무난한 흐름을 지닌다. 하지만 영화가 설정한 두 개의 갈등 축을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뜬금없어 보이는 가영의 고백을 어떻게 볼 것인가? 영화에서 가영의 감정은 꽤 진지하게 다루어진다. 가영은 정말로 그런 감정을 품고 있으며, 그것도 아주 어렸을 때부터 시작된 감정이다. 영화는 가영의 감정을 여느 사랑처럼 ‘발그레 두근두근’한 마음으로 묘사하지만, 그런 감정을 서사적으로 진척시키지는 않는다. 결국 가영의 감정은 사춘기의 오도된 열정으로, 그로 인한 파급효과는 약간의 오해로 인한 분란쯤으로 갈무리 된다.

이런 용두사미가 일반적이진 않다. 다른 영화들과 비교하면 확연한 차이가 느껴진다. 영화에서 장난처럼 언급된 <데미지>, 그리고 <아메리칸 뷰티>, <도쿄연애사건> 등에 자식뻘의 젊은 여자와 중년 남자 사이의 연정이 나온다. <데미지>에서 아들의 연인과 사랑에 빠진 아버지의 감정은 농밀하며 둘의 사랑은 아들의 죽음이라는 ‘데미지’를 불러온다. <아메리칸 뷰티>는 딸의 친구에게 연정을 품는 중년 남자의 욕망을 중산층 가족 윤리의 파탄이라는 프레임을 통해 냉소적으로 바라본다. <레슬러>와 설정이 가장 비슷한 영화는 <도쿄연애사건>이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소녀가 친구의 아버지에게 자신의 이상형이라며 적극적으로 구애한다. 무기력해 보이던 중년남자는 못 이기는 척 받아준다. 원래 그는 꽤 오랫동안 바람을 피우고 있었는데, 엉킨 애정의 실타래는 결국 피를 부른다. 평범해 보이는 소시민의 일상 뒤로 흐르는 욕망이 치정극으로 치닫는 결말이 뜨악하다.



반면 <레슬러>은 가영의 연정이 결코 장난이 아님을 강조하면서도, 귀보가 이를 받아주지 않는 것으로 그린다. 결국 가영의 감정은 공중에 흩어지는 상태로 마무리되고, 서사는 재빨리 두 번째 갈등의 축으로 옮겨간다. 즉 뭔가 흥미로운 이야기를 전개하는 듯 싶었지만, 밑밥만 던진 채 슬그머니 빠져나오는 식이다. 둘의 관계를 진척시켰을 때, 봉착하게 될 도덕적 곤경과 물의를 감당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애초부터 가영의 사랑은 무엇을 위해 나온 것일까. 답은 두 가지이다. 첫째는 부자의 갈등을 지피기 위한 땔감으로 사용된 것이고, 둘째는 귀보 혹은 그가 대변하는 평범한 아저씨들의 내적 자신감을 높이기 위함이다.



◆ 엄마이자 아빠였던 귀보의 깨달음

영화 <레슬러>의 부자 갈등은 특별하지 않다. 아들에게 모든 자아를 의탁한 아버지에게 아들이 정신적으로 독립하려는 이유기가 그려진다. 색다른 점이 있다면, 귀보가 성웅(김민재)에게 아빠이자 엄마 역할을 동시에 하고 있는 점이다. 귀보는 아내와 일찍 사별하고 아들을 키워왔다. 동네에서 체육관을 운영하며, 아들의 트레이너를 자처하는 귀보는 자신이 못다 이룬 꿈을 아들을 통해 실현하려 든다는 점에서 ‘아버지의 욕망’을 지닌다. 한편 그는 ‘살림하는 남자’이다. 아들에게 새 밥을 먹이고 자신은 묵은 밥을 먹는다. 주부 습진을 달고 살며, 혼잣말을 궁싯거리는 그는 영락없는 ‘엄마’이다. 귀보는 아들과의 관계에서 느끼는 서운함을 엄마(나문희)와 자신의 관계를 떠올리며 성찰한다. 즉 엄마가 그러하듯, 자신도 아들에게 지긋지긋한 존재임을 깨닫는 것이다.

영화는 귀보와 성웅의 갈등이 제법 심화되는 것을 보여준다. 성웅이 그동안 열심히 해 온 운동조차 자신이 원한 게 아니었다고 말하며, 경기 도중 난동을 부리는 장면은 꽤 큰 변곡점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모든 일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봉합된다. 성웅은 경력에 오점을 남기지 않고 다시 운동을 하게 된다. 바뀐 것은 귀보이다. 귀보는 아들이 레슬링을 원해서 하는 것이라 믿어왔지만, 어린 아들이 원했던 것은 ‘아버지와 함께 하기’였고, 아버지가 하는 것이 레슬링이기 때문에 레슬링을 하고 싶다고 말한 것이다. 그렇게 시작한 이후 성웅은 아버지가 자신의 성취를 보고 기뻐하면 자신도 기뻤다. 이처럼 부모의 욕망과 자식의 욕망이 겹쳐진 상태는 흔하며, 부모가 자식의 욕망이라 생각해왔던 것이 실은 자신의 욕망을 자식에게 대리시키고 있었음을 깨닫는 것은 중요한 성찰이다. 하지만 영화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지 않는다. 더욱 주목할 점은 영화가 아들의 깨달음을 같은 비중으로 다루지 않는다는 점이다. 즉 영화가 방점을 찍는 것은 아버지의 깨달음과 내면적 성장이다.

이쯤 되니 가영이 왜 뜬금없이 귀보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고, 그 갈등이 더 심화되지 않은 채 흐지부지 끝나는지가 분명해진다. 가영은 귀보의 내면에 활력을 불어넣는 환상의 치어리더로 존재했던 것이다.



◆ 스무살 아가씨와 삼십대 여의사에게 동시에 사랑받는 아저씨

성웅이 가영에게 묻는다. 아버지가 왜 좋으냐고. 가영은 귀보가 ‘살림하는 남자’라는 점을 높이 평가한다. 또 ‘우유를 단숨에 마셔서 좋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런 이유들이 납득되는 것은 아니다. 어차피 가영의 말은 사랑에 빠진 사람에게 이유를 묻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지를 증명할 뿐이다. 그나마 가영의 욕망은 불가해한 것으로 인정되며 탐문되기라도 한다. 아예 질문조차 되지 않는 것은 선을 도나(황우슬혜)의 욕망이다.

영세한 체육관을 운영하며 스무살의 아들을 키우는 40세 홀아비에게 70대 노모가 끊임없이 맞선을 주선할 수 있다는 설정도 놀랍거니와, 그렇게 성사된 맞선 자리에서 벌어진 일은 더욱 놀랍다. 30대 미모의 여의사 도나는 귀보의 무관심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굉장한 호감을 드러낸다. 영화는 아예 도나를 ‘살짝 맛이 간 또라이’로 그린다. 귀보는 물론이고 자신도 그렇게 인정하는 ‘또라이’라니, 전형적인 ‘후려치기’가 아니고 무엇이랴.



물론 세상에는 독특한 애정관을 지닌 여자들이 존재한다. 문제는 영화 안에 독특한 애정관을 드러내는 여성 캐릭터가 둘이나 등장하는 것이다. 40대 평범한 홀아비를 스무살 아가씨와 30대 미모의 여의사가 동시에 사랑한다. 심지어 두 여성의 열렬한 구애에도 불구하고, 귀보는 둘 중 누구와도 맺어지지 않는다. 그녀들의 사랑은 해프닝처럼 처리되고, 귀보가 아들에 대한 집착에서 놓여나는 것으로 영화는 끝난다. 그렇다면 이 두 여성은 뭘까. 과연 리얼리티를 지닌 존재일까, 아니면 귀보의 내면적 판타지를 위해 동원된 존재일까.



◆ ‘근거 없는 인기남’ 서사

기타무라 가오루가 쓴 <와세다 글쓰기 표현 강의>에는 ‘근거 없는 인기남’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저자와 대담하던 가라키 아쓰시는 남성 작가들의 소설 중 많아서 곤란한 작품으로 ‘근거 없는 인기남 소설’을 꼽았다. “주인공이 그럭저럭 일상을 보내는데, 그럭저럭 여자에게 인기를 끌어요. 왜 인기가 있는지 왜 인간적으로 매력이 있는지 그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 없어요.” (p.222)

그러고 보니, <전차남><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지금 만나러 갑니다> 등의 일본 영화들이 모두 여기에 속한다. 특별할 것은 없지만 무해해 보이는 남자 주인공을 여러모로 우월한 여자 주인공이 아무 이유 없이 좋아하고 심지어 헌신한다. 이런 ‘근거 없는 인기남’ 소설이 2000년대 초반에 쏟아져 나오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일까. 짐작컨대 일본사회에서 비혼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된 것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불과 수십 년 전까지만 해도 일본은 거의 모든 사람이 일생에 한번 이상 결혼하고, 결혼하지 않으면 제대로 된 사람으로 대접받기 어려운 ‘개혼 사회’ 였다. 그러나 2000년을 거치면서 비혼인구가 크게 늘었다. 50세까지 법적 혼인 기록이 없는 인구가 남자의 경우 1980년의 5.57%에서 2010년의 20.2%로 크게 증가했고, 여자의 경우도 1980년의 4.45%에서 2010년의 10.6%로 증가했다. 지금은 이보다 더 늘어서, 일본 남자 4명 중 1명이 결혼하지 못한다는 말이 횡행한다.



이처럼 뚜렷한 비혼의 추세에서, 일종의 ‘백러시’ (문화적 반동) 현상으로 평범한 남자들이 아무 이유 없이 우월한 여성들의 구애를 받는 ‘근거 없는 인기남’ 콘텐츠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러한 경향은 지금 한국에서도 진행 중이다. <지금 만나러 갑니다>는 한국에서 리메이크 되면서, 원작의 서사에 조연들 이야기까지 곁들여 이러한 특징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고창석이 분한 캐릭터에 공효진이 분한 캐릭터가 “잘 생겼다”며 들러붙는다. <레슬러>에서 유해진이 분한 캐릭터에게 황우슬혜가 분한 캐릭터와 이성경이 분한 캐릭터가 들러붙는다. 물론 아무런 이유도 없다. 미모의 여의사는 자타가 공인하는 ‘똘끼 충만 미친년’이고, 스무살 아가씨는 사춘기 청소년이 선생님을 좋아하듯이 철이 없어 그러는 것이란다. 그리곤 이들의 사랑은 남자 주인공의 자신감을 불어넣는 것 이외에 아무런 서사적 흔적도 남기지 않은 채 유야무야 흩어진다. 자신감의 요정들이다.



◆ 취약한 남성적 자아를 메우기 위해 동원한 요정들

자신의 꿈도 잊은 채 자식에게 헌신하던 부모가 자식을 정신적으로 놓아주고, 자신이 원래 하고 싶어 했건 것을 찾아 마침내 여행을 떠난다는 이야기는 1990년대 중년 여성 주연의 TV 단막극의 단골 소재였다. 동일한 서사를 남자를 주인공으로 풀어나가기 위해, 그 남자를 뜬금없이 좋아하는 여자들이 필요하다. 아니 왜? 남자는 오직 여자에게 사랑받는 존재가 됨으로써만 자기 가치를 증명할 수 있기 때문에?

영화는 이제 여성호르몬이 나와서 아줌마랑 비슷해졌다고 느끼는 중년남성, 가족을 위해 힘들게 돈도 벌고 가사노동도 좀 하느라 남성적 자아가 취약해졌다고 느끼는 중년남성의 내적 자존감을 보충하기 위하여, 반드시 그를 남자로 좋아해줄 여자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듯하다. 그 발상도 우습거니와, 이를 위해 동원된 여자가 하나는 ‘딸 같은’ 스물 살이고, 또 하나는 미모의 엘리트 여성이라는 점도 남성의 욕망을 투명하게 드러낸다. <당갈>에서 인도의 아버지는 편견에 맞서 딸을 레슬러로 키우는 반면, 한국의 아버지는 여전히 아들을 통해 자신의 못다 한 꿈을 이루게 한다는 가부장적 서사를 놓지 않으면서, 한껏 위축되고 저하된 남성적 자아를 ‘이유 없이 나를 좋아해주는 여성’이라는 판타지를 통해 보충하려 든다. 어쩜 이리도 속이 빤히 보이는지, 쫄쫄이 유니폼을 입은 남성들의 군무를 보는 것 마냥 민망함이 밀려온다.



칼럼니스트 황진미 chingmee@naver.com

[사진=영화 <레슬러>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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