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터미디어=백우진의 잡학시대] 무라카미 하루키는 일본 사회에 속하지 않았다. 그는 일본에서 자랐지만 서구 문화 속에서 살았다.

하루키는 태어난 시기와 장소부터 경계인이었다. 1949년 교토에서 태어났다. 과거 일본의 수도였으나 전쟁 후엔 미국에 점령된 땅이었다. 이후 성장기는 대부분 고베 교외에서 지냈다. 항구 도시 고베에서는 여러 언어가 북적댔다.

그는 십대에 소설과 미국 문화에 푹 빠졌다. 도스토예프스키·스탕달·디킨스·커포티·피츠제럴드 같은 작가의 작품과 하드 보일드 탐정 소설을 탐닉했고, 재즈를 즐겼다. 와세다대 영화과에서 공부했다. 부모의 뜻을 거슬러 도쿄에 ‘피터 캣’ 재즈클럽을 열었다. 이후 10년 가까이 매일 이 클럽을 꾸려가는 데 바쳤다.

영어 매체와 인터뷰할 때 하루키는 통역자를 쓰지 않는다. 직접 깊은 목소리로 천천히 엑설런트한 영어를 말한다.

때로는 일본어보다 영어를 더 편하게 여긴다. 첫 소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를 쓸 때엔 도입부를 영어로 작성하고 나서 일본어로 옮겼다. 그래서일 게다. 하루키 소설의 일본어 문장은 마치 영어에서 번역된 듯한 느낌을 준다. 그의 작품 여러 권을 영어로 번역한 제이 루빈의 말이다.

하루키는 영어를 일본어로 옮기는 작업도 많이 했다. 피츠제럴드·커포티 등 미국 작가의 소설을 번역했다.

그런 하루키도 영어에서 미끄러진다. 그는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 뉴욕 타임스의 마라톤 기획 기사에서 본 영어 문구를 인용하고 직접 번역해 소개했다. 내가 본 아래 문구는 하루키의 영어-일본어 번역을 다시 한글로 옮긴 것이다. 하지만 일본어-한글 번역에 오차가 거의 없음을 고려할 때, 한글 번역문은 하루키의 해석과 다르지 않으리라고 본다.

Pain is inevitable, Suffering is optional.
아픔은 피할 수 없지만, 고통은 선택하기에 달렸다.

모호하다. ‘아픔’은 뭐고, ‘고통’은 또 뭘까. 그는 “정확한 뉘앙스는 번역하기 어렵다”며 이렇게 설명한다.

가령 달리면서 ‘아아, 힘들다! 이젠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고 치면, ‘힘들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이젠 안 되겠다’인지 어떤지는 어디까지나 본인이 결정하기 나름인 것이다.

복잡하다. 원문으로 돌아가자. 어긋난 단어가 ‘suffering’이다. 네이버 사전은 동사 ‘suffer’를 첫째 ‘시달리다’ ‘고통받다’로, 둘째로는 ‘겪다’라고 풀이한다. 이런 뜻으로는 잘 통하지 않는다.

미리엄-웹스터 사전에는 ‘(죽음·고통·슬픔을) 견뎌낸다’는 풀이도 나온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이 옮겨야 더 정확하다.

고통(苦痛)은 피할 수 없지만, 인고(忍苦)는 선택할 수 있다.

한 언어를 다른 언어로 옮기는 일은 참 어려운 작업이다. 하루키 같은 이의 영어 번역에도 실수가 나온다.

하물며 부끄러움을 모르는 한국 번역에 있어서랴! 스티브 잡스 전기에 오역이 많아 말이 많다. 저자 이름부터 틀렸다. 오역 논의가 더 공개적으로 활발히 이뤄져야 한다.

오역은 피할 수 없지만, 오역을 인정하고 수정하는 일은 선택할 수 있다.

* 월간중앙 12월호 '스티브 잡스 오역 공방의 진실' 참조
* 일본엔 무라카미 작가가 둘 있다. 다른 한 명은 무라카미 류. 그래서 일본에서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이름을 줄여 말할 때 ‘하루키’라고 한다고 들었다.


칼럼니스트 백우진 <안티이코노믹스><글은 논리다> 저자 cobalt@joongang.co.kr


[사진=문학동네]
[자료]
IHT, Murakami’s strange realities, 22-23 Oct. 2011
중앙SUNDAY, “내 마음 속엔 수많은 서랍이 있다, 그 서랍이 창작의 샘”. 185호(25 Sep.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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