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터미디어=듀나의 영화낙서판] 이번 주에 막을 내린 <인형의 집>은 내가 완주한 두 번째 일일연속극이었다. 첫 번째 연속극은 <사랑해 당신을>이라는 주찬옥 각본의 아침연속극이었는데 기억하는 사람이 있는지 모르겠다. 그 사이에 줄거리를 따라간 많은 드라마가 있긴 했지만 한 에피소드도 빼놓지 않고 완주한 건 여전히 두 편 뿐이다. 하여간 이 드라마를 보느라 굉장히 많은 시간을 투자했기 때문에 몇 마디 감상을 이야기하고 그렇게까지 즐겁다고 할 수 없었던 이 여정을 마무리해야 할 것 같다.

이 드라마를 보기 시작한 이유는 두 개였다. 우연히 채널을 돌리다가 남편과 남편의 정부인 정신과 의사에게 가스라이팅 당하는 여자를 보았는데, 이 상황을 어떻게 맺을 것인지 궁금했다. 그리고 궁금해서 검색해보니 이 드라마의 설정은 내가 좋아하는 세라 워터스의 소설 <핑거스미스>와 비슷했다. 정확히 말하면 박찬욱이 <핑거스미스>를 번안한 <아가씨>의 각본을 쓰는 동안 잘라낸 부분을 모아 이야기를 짠 것처럼 보였다. 물론 KBS 일일연속극이니 끝까지 비슷할 리는 없었지만 궁금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드라마를 안 보신 분들을 위해 설정을 요약해보자. 흔해 빠진 출생의 비밀 이야기다. 재벌 3세인 은경혜와 은경혜집 집사인 금영숙의 딸이고 디자이너 지망생인 홍세연은 사실 갓난아기 때 뒤바뀌었다. 금영숙이 심장병에 걸린 딸을 살리기 위해 일을 저지른 것이다. <핑거스미스>에서도 나오는 이 설정을 박찬욱이 <아가씨>에서 잘라낸 이유는 한국 드라마에 지나치게 많이 쓰이는 설정이라 국내 관객들이 몰입하기 어려울 것 같기 때문이었다. 하여간 진상 고객과 직원으로 만난 두 주인공은, 홍세연이 은경혜의 퍼스널 쇼퍼가 되면서 가까워지나 은경혜가 둘의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되면서 좋았던 관계는 파탄을 맞는다.



<인형의 집>의 설정 자체는 좋다고도, 나쁘다고도 할 수 없다. 애증이 오가는 극단적인 상황은 재미있는 드라마의 재료가 된다. 하지만 <인형의 집>의 각본은 재료의 가능성을 충분히 살릴 만큼 좋지 못하다. 곧장 말하면 그럭저럭 견딜만하다가 중반 이후로 사정없이 나빠진다.

의도와 습관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덜컹거린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다. <인형의 집>의 설정에서 가장 분명하게 차별화되는 부분은 이 이야기의 중심이 흔한 캔디 캐릭터인 홍세연이 아니라 악역인 은경혜라는 것이다. 은경혜는 이미 뺑소니 경력이 있고 갑질로 유명한 악질 고객이지만 지난 30년 동안 가족과 남편으로부터 정신적 학대를 당한 사람이다. 그냥 악당으로 밀어붙이기엔 동정의 여지가 많고 변화의 가능성도 있다. 당연히 각본이 아무리 악역으로 밀어붙이다고 해도 시청자들은 이 인물을 불안하게 흔들리는 회색으로 보며 최종 판단을 보류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 회색을 최대한 살리는 것이 드라마의 목표여야 한다.

드라마는 여기에서 처절하게 실패하고 마는데, 그건 두 사람의 갈등을 만들기 위해 쓰는 이야기 도구들이 기존 막장 연속극의 재료에서 한 치도 벗어나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작가들의 한계 때문일 수도 있고 제작진이 일일연속극의 관습에서 벗어난 스토리 전개를 시청자들이 받아들이지 않을까봐 두려워해서였을 수도 있다. 우리가 굳이 어느 쪽인지 알아야 할 이유는 없다. 중요한 건 설정의 재료와 일일드라마의 관습이 충돌한다는 것이다. 은경혜는 만족스러운 관습적 악녀가 되기엔 지나치게 허약하다. 언제 쓰려져도 이상하지 않은, 정신적으로 불안한 심장병 환자다. 반대로 관습적 악녀의 스토리 전개는 은경혜 캐릭터가 입체적으로 발전하는 것을 막는다. 대부분 막장 연속극이 그렇듯 <인형의 집>도 마지막 3회에서 얼렁뚱땅 화해하며 끝을 내는데, 그 때까지 계속 엉뚱한 길로 질주하며 감정선을 망쳐놓았기 때문에 설득력이 심각하게 떨어진다.



지금까지는 각본의 질 문제이며, 이는 굳이 비난할 무언가는 아니다. 끝까지 쓰기 전까지 자신이 무엇을 쓰고 있는지 아는 작가가 몇이나 되겠는가. 자신의 이야기를 통제하지 못하는 건 슬픈 일이지만 잘못은 아니다. 하지만 이 드라마의 수상쩍은 윤리학은 사정이 다르다.

윤리적 문제점은 이 드라마에서 착한 인물로 설정된 두 남자가 공유하고 있다. 한 명은 홍세연의 할아버지로 나오는 은회장이다. 은회장은 이 드라마에서 가장 큰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다. 반대하는 결혼을 한 아들을 쫓아냈고 며느리를 30년 동안 감금했다. 수십 년 전 인재를 낸 공장 사고에 직접 책임이 있는 건 아니라지만 최고경영자로 있으면서 희생자를 위해 한 일이 거의 없다. 하지만 드라마는 이 인물의 죄를 커버하기 위해 비정상적일 정도로 자주 말을 바꾸고 드라마의 도덕적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홍세연은 끝까지 할아버지를 성경의 예언자처럼 섬긴다.

다른 하나는 은회장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회사로 들어왔고 나중에 홍세연와 연애를 하게 되는 이재준인데, 그의 복수 계획은 가장 큰 책임이 있는 회장은 그냥 죽게 두고 그 뒤를 물려받은 손녀를 정신병원에 가두는 것이다. 연좌제 복수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수많은 한국 드라마/영화(그 중 최악은 설경구, 류승범 주연의 영화 <용서는 없다>이다) 복수자 중 한 명인데 드라마가 끝날 때까지 이 문제를 따지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이건 이 드라마를 만드는 사람들의 도덕적 가치관이 심하게 뒤틀려져 있음을 의미한다. 세상을 똑바로 보지 못하기 때문에 캐릭터들이 비정상적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혈통에 대한 기형적 집착, 이성애 로맨스에 대한 의무감이 기초적인 윤리의식보다 더 컸던 걸까?

일일연속극은 시청자의 보수적인 사고방식과 습관에 기대는 장르이다. 막장 설정의 자극과 보수적인 윤리는 모두 그 습관의 일부이다. 하지만 왜 그 습관이 의무여야 할까? 이 습관이 앞으로도 계속되어야 할 이유가 있는가? 시청자와 제작진이 계속 합의된 게임을 반복하는 동안에도 이에 대한 질문은 계속 던져져야 하지 않을까?

칼럼니스트 듀나 djuna01@empas.com

[사진=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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