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과 함께2’ 이승이나 저승이나, 혁명이 필요하다.

[엔터미디어=황진미의 편파평론] ▲이 영화 반(反)▲. (본문 중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실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영화 <신과 함께2>의 흥행이 뜨겁다. 동양적 판타지를 담은 독특한 세계관과 놀라운 기술의 그래픽 화면, 그리고 인기 웹툰으로 검증된 서사와 캐릭터, 여기에 배우들의 매력을 흥행의 이유로 꼽을 수 있다. 2편은 1편보다 만족도가 더 높다. 원작에 없는 내용들이 더 많이 가미되고, ‘인과 연’ 이라는 부제에 걸맞게 인물들 간의 인연들이 절묘하게 이어져 완결성이 느껴진다.

마동석, 주지훈, 김향기 등의 매력이 전편보다 강하게 드러나고, 전편에서 보여주었던 저승의 모습이 지루할까봐 뜬금없이 거대생물체를 등장시키는 그래픽도 성의 있는 서비스로 느껴진다. 장대한 판타지 장면에 간간이 터지는 유머, 그리고 배우들의 매력 등이 가미되니, 피서를 위해 상영관을 찾은 관객들이라면 만족도가 높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를 곱씹어보면 상당한 모순이 발견된다.



◆ 억울함과 정의로움은 같은 범주가 아닌데

영화 <신과 함께>의 근간은 사후 심판이다. 1편의 부제는 ‘죄와 벌’이었고, 저승에서 벌어지는 7개의 재판이 순서적으로 등장했다. 천년동안 49명의 의인을 환생시키는 미션을 부여받은 삼차사의 운명이 귀인의 재판과 맞물려 흥미를 유발했다. 1편은 두 축으로 이루어졌다. 한 축은 김자홍(차태현)이 과연 귀인인지를 놓고 여러 겹의 비밀이 드러나고 그에 대한 가치판단이 이루어졌다. 또 한축은 군대에서 의문사한 김수홍(김동욱)이 원귀로 폭주하는 내용이다. 그리고 이 모든 이야기는 ‘병든 엄마’에 대한 죄의식을 둘러싼 신파로 귀결되었다.

2편도 두 개의 축으로 이루어져 있다. 한 축은 강림(하정우)이 김수홍의 억울한 죽음을 저승 재판에서 입증하는 것이고, 또 다른 축은 성주신(마동석)을 잡으러 이승으로 온 해원맥(주지훈)과 덕춘(김향기)이 자신의 과거를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2편의 세계관과 가치관이 1편과 상당한 모순을 일으킨다. 즉 선악의 심판을 완전히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2편의 시작과 더불어 귀인의 뜻이 새롭게 정의된다. 1편에서 귀인은 천년동안 49명을 채울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귀한 존재였다. 순직한 소방관인 김자홍도 귀인으로 인정받기 위해 7번의 재판을 받아야 했다. 당시 전제로 삼았던 귀인의 정의는 남을 먼저 돕고 배려하며 정의로운 삶을 산 사람이다. 그런데 2편에서는 귀인의 정의에 이유를 알지 못한 억울한 죽음을 당한 사람이라는 항목이 추가된다. 이상하지 않은가. ‘정의로운 삶’과 ‘억울한 죽음’이 같은 범주에 들어가는가. 더욱이 억울한 망자가 천년동안 49명밖에 없겠는가.

영화는 김수홍이 원귀가 아니라 의인에 해당된다는 강림의 주장이 입증될 것인지를 두고 몇 번의 고비를 넘는다. 군대에서 총기사고를 당한 김수홍이 사건의 은폐를 위해 산채로 암매장 당했다는 사실은 1편에서 이미 밝혀졌다. 가해자는 이승의 법정에도 기소되었다. 강림이 새롭게 입증하려는 것은 무엇인가. 암매장될 당시 김수홍이 아직 살아있었음을 가해자들이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게 그렇게 중요한 것일까. 그들이 모른 채 묻었으면 김수홍의 죽음이 그리 억울한 죽음이 아니고, 알고 묻었으면 김수홍이 귀인의 범주로까지 격상될 만큼 억울한 죽음이 되는 걸까.

예컨대 총기사고나 군대 안에서의 사건 은폐는 그리 드문 일이 아니라서 피해자도 김수홍이 시종 취하는 태도처럼 쿨하게 받아들일만한 일이지만, 그들이 알고도 묻었다면 굉장한 배신감이 느끼지는 살인으로 천년에 49명이 나올까 말까한 억울함이라는 것인가. 이건 너무 김수홍의 주관적 감정 상태인 억울함을 특화시키는 것이 아닐까.



◆ 나쁜 상황이 있을 뿐이라고?

이승에서 성주신과 저승차사가 벌이는 기싸움도 이상하기는 마찬가지다. 성주신이 지키고 있는 조손 가정은 철거 보상금으로 1억 원을 받았다. 그런데 그 가정을 지키기 위해 현신한 성주신이 그 집 아이의 삼촌노릇을 하며 펀드와 주식에 손을 대서 원금을 잃고 이를 메우기 위해 3억 원의 사채를 쓴 상태다. 선의로 한 행동이라지만, 아이의 장래를 어둡게 만든 무책임한 과오이다. 하지만 영화는 성주신의 과오를 웃음과 호의로 넘어간다. 그리곤 성주신이 들려주는 해원맥과 덕춘의 과거사로 관심을 돌린다.

천년 넘게 산 성주신의 결론은 “나쁜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나쁜 상황이 있는 것”이란다. 나름 의미 있는 윤리관일 수는 있으나, 평범한 사람들조차 사후에 7번의 재판을 받아야 한다는 무시무시한 세계관을 전제로 삼는 영화에서 나올 말은 아니다. 나쁜 사람이 있는 게 아니라면, 그 많은 저승의 재판과 지옥은 누구를 위해 있는 것일까. 2편에서 다시 보여준 나태지옥의 맷돌 판에서 부단히 달리고 깔리고 떨어지는 이들은 대체 얼마나 게으른 상황에 놓였던 사람들이란 말인가.



천 년 전 과거사는 나름 흥미롭다. 하지만 조각조각 난 이야기들을 모두 엮어서 생각하면 이상한 점이 한 둘이 아니다. 해원맥은 대체 어떤 인물인가. 고려군에게 부모를 잃은 거란족 소년으로 고려의 장군에게 양자로 입양되어 지덕을 갖춘 무인으로 성장한다. 그러나 장군이 죽은 뒤 변방으로 귀양을 가서 여진족의 양민들을 살육한다. 그러다 부모 잃은 여진족 아이들을 돌보는 소녀를 만나, 죄의식을 느끼고 군량미를 헐어 고아들을 돕는다. 하지만 상관에게 발각되어 죽은 뒤 과거 기억을 모두 잃고 경박하고 냉소적인 저승차사가 된다. 이런 인성의 널뛰기를 본 적이 있는가. 도무지 일관성이 없는 캐릭터지만, 영화는 ‘인과 연’의 줄긋기에만 신경 쓸 뿐 캐릭터 붕괴는 안중에 없다.

반면 덕춘은 천년동안이나 일관된 캐릭터이다. 그만큼 납작하다는 뜻이다. 천 년 전 고아들의 ‘엄마’였다는 말로 모성애가 강조되고, 저승차사로 천 년간 성실하게 업무를 수행하고 있지만 동료가 아닌 어린 여성으로 대해지기 일쑤이다. 이승에 와서는 앳된 행동과 앳된 외모가 더욱 도드라지는 상황인데, 초등학생은 그를 “아줌마”라 부른다. 덕춘은 천 년 전에는 호랑이에게 죽을 위협을 당하고, 현재에는 성주신의 팔뚝에 목이 졸린다. 요약하지면 앳되고 보호본능을 일으키는 여린 ‘소녀성’과 천부적인 본능에 가까운 ‘모성’이 동시에 부각된다. 이는 1편의 말 못하는 장애인이자, 자식에게 죽임을 당할 뻔했지만 모든 것을 용서하는 어머니에 이어 영화가 보여주는 박제화 된 여성상이다.



◆ 저승의 재판이 개판인 이유

사후 심판을 다룬 영화의 쾌감 중의 하나는 이승에서 충분한 심판을 받지 못한 악인들이 사후에라도 제대로 된 벌을 받았으면 좋겠다는 공정성의 희구가 포함된다. 하지만 1편을 보면서 저승의 재판이 정교하지도 공정하지도 못하다는 것에 의문을 느낀 이가 많았을 것이다. 2편 역시 죄와 벌을 논하기 어려울 정도로 선악의 경계가 무너져있다. 그 나마 다행인 것은 저승의 질서가 왜 이렇게 엉망인지에 대한 나름의 설명을 품고 있는 점이다. 영화의 마지막에는 천 년 전 임명된 염라대왕의 꼼수와 전횡이 등장한다. 염라대왕 직을 수락하는 조건으로 내건 요구도 사심에 가득 차 있고, 임기 초반의 인사권 행사도 공사를 구분하지 못하는 정실인사에 가깝다. 지난 천년 동안 저승 권력이 이 모양이었으니, 이승의 정의인들 지켜질 수 있었으랴.

정리하자면 영화의 오류는 이런 것이다. 영화는 군에서 의문사한 수홍의 억울함을 상세히 다루어 귀인으로 격상시키며, 심지어 선임의 죽임에 가담했던 관심사병마저도 억울하게 죽었다는 이유로 귀인으로 격상될 것임을 암시한다. 이는 남성이 군대와 얽혀 겪게 되는 억울함을 특별한 것이자 그 자체로 정의로운 삶과도 맞먹는 대단한 공덕으로 치부해버린다. 또한 위기상황에서 가족을 착실히 보살피기 보다는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여 벌이는 무분별한 경제행위로 가족을 더 큰 위험에 빠뜨리는 남성적 호기와 도박심리를 관대하게 바라본다.



그 뿐인가. 황당한 캐릭터 붕괴를 무릅써가며 ‘소녀에게 빠지는 성인 남자의 순정’을 강조하고, 유일한 여성 캐릭터에게는 소녀성과 모성을 기본 값으로 부여한다. 더욱 기가 막히는 것은 저승에서마저 아들들이 겪을 심판을 보류해주며 좋은 자리에 꽂아주는 권력자의 비리가 횡행하지만, 이를 눈물겨운 부정(父情)인양 용인한다. 요컨대 남성 판타지와 남성 연대가 영화의 핵심을 타고 흐르는 것이다.

화려한 그래픽과 동양적인 판타지와 적당히 아귀가 맞는 서사에 약간의 코미디를 곁들인 상업영화를 보는 것은 즐겁다. 그러나 밑바닥에 흐르는 남성판타지와 남성연대의 정서를 마주하는 것은 씁쓸함을 안긴다. 천년동안 김수홍만큼의 억울함을 지닌 여성 귀인은 4조 9천 억 명은 되었을 터인데, 그들이 모두 제대로 된 재판을 받고 원하는 모습으로 환생했을까. 가령 강남역 화장실에서 억울하게 죽은 여성은 저승차사의 적극적인 조력을 받아 귀인으로 인정받았을까. 김수홍의 재판처럼 증인까지 소환해가며 묻지마 범죄의 희생자인지, 여성혐오에 의한 범죄의 희생자인지를 다루어졌을까. 그렇게 해서 원하는 모습으로 환생이 결정되었다면, ‘다음 생엔 남자로’ 환생했을까. 고작 그런 돌려막기가 해법이라면 이승과 저승의 통치 권력은 왜 있는 걸까. 이승이나 저승이나, 혁명이 필요하다.

칼럼니스트 황진미 chingmee@naver.com

[사진=영화 <신과함께-인과 연>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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