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 윤종빈 감독의 특기와 통찰이 또다시 꽃을 피우다

[엔터미디어=황진미의 편파평론] △이 영화 찬(贊)△. (본문 중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실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윤종빈 감독은 웃기고 극적인 상황을 연출하면서도, 그것을 장르에 매몰시키지 않고 한국 사회의 원형질적인 정서를 드러내는 특유의 재능을 지닌다. 예컨대 <용서받지 못한 자>는 우스꽝스러운 군기잡기와 사병의 자살을 극적으로 그리지만, 단순한 사건묘사에 그치지 않고 군대를 지탱하는 남성들 사이의 내밀한 정서를 그렸다. <비스티 보이즈>는 호스트바의 풍경을 생생하게 묘사하면서도 소재를 선정적으로 소비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 안에서 교차되는 일그러진 남성성을 그렸다. <범죄와의 전쟁>도 단순한 범죄 시대극이 아니다. 한 인물의 일대기를 통해 한국의 1980년대를 거쳐 만들어진 권력이 어떤 계보와 생리를 지니는지 소름끼치게 묘파했다. 그런 점에 있어서 <군도>는 다소 실패한 감이 없지 않지만, <공작>에서 윤종빈 감독의 특기와 통찰이 또다시 꽃을 피운다.



◆ ‘흑금성’ 사건이라는 기막힌 실화

영화 <공작>은 1990년대 실제로 대북공작원으로 활동했으며 현재까지 생존해 있는 흑금성의 실화를 담는다. 흑금성은 남한의 안기부가 중국을 거쳐 북한의 보위부에 침투시킨 공작원으로, 최초로 김정일을 만났던 박채서의 코드명이다. 기밀이어야 할 흑금성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순전히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다. 최초의 정권교체인 김대중 대통령 당선 직후, 안기부가 벌였던 ‘북풍 사건’에 대한 검찰 수사가 시작되었다. 여기에는 김대중을 빨갱이로 음해하려던 오익제 사건, 아말렉 사건은 물론이고, 일명 ‘총풍 사건’으로 불리게 된 군사도발주문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안기부는 사건의 전모가 드러나는 것을 막기 위해 대북공작에 여야 모두 연루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짜깁기 한 ‘이대성 문건’을 흘렸다. ‘이대성 문건’을 한겨레신문이 그대로 싣는 바람에, 그 안에 등장하는 흑금성의 정체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언론은 박채서를 이중첩자로 몰았다. 그러나 박채서는 대선직전에 정동영, 천용택을 비롯해 김대중 후보와도 만나 안기부가 벌일 ‘북풍 공작’을 미리 귀띔해주며 긴밀한 관계를 맺어왔다. 박채서는 검찰조사에서 무사히 풀려나 안기부에서 퇴직했다.



박채서는 노무현 정부에서 대북 비선으로 활동했으며, 2005년에 이효리-조명래 CF가 실제로 성사되는데도 기여했다. 이후로도 중국을 오가며 대북사업을 하던 박채서는 2010년에 북한에 군사기밀을 넘긴 혐의로 긴급 체포되어 6년형을 선고받고 수감되었다가 2016년에 출소하였다. 최근 그는 재심 청구 의사를 밝혔다. 흑금성에 대한 기록은 1998년 <시사저널>의 김당 기자가 쓴 박채서 인터뷰 기사, 2002년 <신동아>의 이정훈 기자가 쓴 기획기사, 2014년 팟케스트 <이이제이>, 김당 기자가 쓴 책 <시크릿파일-반역의 국정원>, 박채서의 옥중수기를 바탕으로 한 <공작> 등에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윤종빈 감독은 2014년 팟케스트 <이이제이>를 듣고 영화화를 결심했다고 한다. 하기야 누가 들어도 영화 같은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안기부 공작원이 북한의 보위부에 침투하여 김정일을 만나 대북사업을 한다는 것만으로도 감히 상상해보지 못한 이야기가 아닌가. 남북한 사이에 벌어지는 첩보전의 실체만 사실적으로 그려도 색다른 장르물이 될 만하다. 더욱이 ‘총풍사건’이라는 막강한 정치스캔들이 내장되어 있으니, 정치적인 의미도 충분하다. 과연 대박 아이템이 아닐 수 없다.



◆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긴장과 생경한 스펙터클

영화 <공작>은 첩보물이자 시대극으로서 생생한 질감을 살린다. 시작과 함께 동구권이 몰락한 후 최악의 경제난을 겪게 된 북한이 IAEA의 핵사찰을 거부하고 NPT를 탈퇴하여 한반도에 긴장이 고조되는 상황을 자막과 뉴스클립으로 요약한다. 육군소령 박서경(황정민)이 술과 도박에 찌든 신용불량자로 위장하고, 첫 번째 공작인 핵물리학자 김장엽을 만나는 장면까지 리드미컬하게 엮는다. 황정민의 내레이션이 다소 투박한 느낌이지만, 많은 정보량을 한꺼번에 전달하기 위한 차선책으로 이해된다.

<공작>은 돈 많은 사업가로 위장한 박서경이 북한 보위부의 미끼가 되고자 북경의 거리에서 큰 소리로 웃고 떠드는 장면과 상대방의 도청을 역이용하는 것을 보여준다. 떠들썩한 허세를 떨다가 순식간에 안광을 번뜩이며 촉각을 곤두세우는 황정민의 표정변화가 압권이다. 영화는 황정민의 얼굴을 클로즈업한 화면을 적극 활용한다. 북한이 좀처럼 미끼를 물지 않자, 안기부는 북한의 자금난을 더욱 압박하기 위해 세관과 언론과 중국공안을 이용한다. 장성택의 조카가 위기에 빠지자, 드디어 북한 측에서 미끼를 문다. 북한의 보위부 소속 정무택(주지훈)와 대외경제위 리명운(이성민)이 박서경을 불러낸다. 영화는 이들이 첫 대면하는 장면부터 본격적인 시동이 걸린다.



세 사람이 앉은 테이블, 육군 정보부 출신의 박서경을 완전히 믿지 못하는 정무택과 리명운은 끊임없이 박서경을 떠보면서, 한편으로는 그를 역이용할 방안을 궁리한다. 이들 사이에 오가는 몇 마디에 금세라도 총구가 불을 뿜을 것만 같은 긴장이 흐른다. 이런 긴장을 풀기 위해 박서경은 애매한 상황에서 버럭 화를 내며 버팅기고, 분위기는 또 금방 우호적으로 풀어진다. 한치 앞을 알 수 없다. 영화는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긴 박서경이 드디어 평양의 주석궁으로 들어가는 광경을 보여준다.

영화 <공작>은 놀라운 스펙터클로 평양 장면을 구성해낸다. 순안공항이나 평양시내 등은 뉴스나 기록화면을 통해 많이 보았던 곳이지만, 익숙한 장면이 아니다. 도식적이지 않은 앵글이 빚어내는 생생한 풍경이 흡사 평양에 와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주석궁에서 김정일과 대면하는 장면도 식상하지 않다. 특수 분장을 한 기주봉을 충분히 보여주는 카메라도 신선하다. 북한의 최고 권력자를 부분적으로만 비추던 기존 문법에서 벗어난 화면이다.



◆ 적대적 공생관계

영화는 첩보물로 시작해 정치극을 경유하여 휴먼드라마로 끝맺는다. 박서경의 공작은 예상외로 성공적이지만, 이상한 지점에서 위기를 맞는다. 1996년 4월 총선 직전에 판문점에서 의문의 무력충돌이 일어난 것에 의문을 느끼던 박서경은 1997년 12월 대선을 앞두고 여당 측의 편지를 북한 보위부에 전달하라는 상부의 지시를 받는다. 위기의식을 느낀 박서경은 리명운의 방을 도청하다가 놀라운 이야기를 듣게 된다.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시퀀스라 할 만한 리명운의 방에서 벌어지는 남북한 인사들의 대화는 영화의 주제를 함축한다. 마치 연극무대처럼 짜인 이 장면에서 남한 여당 국회의원들의 제안과 이에 대한 북한 측의 반응이 굉장한 긴장을 뿜는다. 특히 정무택이 북한도 김대중의 당선을 원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하는 대목과 남한 여당 국회의원들이 “북한이 우리를 살렸다.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는 모습은 한편의 부조리극을 보는 듯하다.



이 장면은 남한 반공세력의 허구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낼 뿐만 아니라, 남과 북이 적대적 공생관계를 맺고 있었음을 명징하게 드러내지만, 실제 사건과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 영화 <공작>은 ‘총풍사건’을 비롯한 북풍사건들이 남한에서 적극적으로 요청하고, 북한은 못이기는 척 수용한 것처럼 그린다. 특히 김정일은 이 사안에 대해 직접 발언하지 않고 나중에 철회시킴으로써, 추악한 거래에서 한발 떨어져 있는 호탕한 인물인양 묘사된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박채서의 말에 따르면, 1997년 6월 김정일을 접견하였을 때, 김정일이 박채서에게 말한 세 가지 사안 중 하나가 “남한 대선에 열성적으로 공작해 달라”는 것이었다. 이후 북한 수뇌부와 토론하면서 김대중 후보를 반대하는 세 가지 이유를 들었다고 말한다. 이는 김정일이 남한 대선에 개입할 의지와 노선을 일찍부터 가지고 있었음을 뜻한다. 영화에서 경박한 인물로 묘사된 정무택의 입으로 말해진 ‘김대중 불가론’이 사실은 김정일의 복심이었던 셈이다. 영화가 김정일을 북풍공작에서 한발 떨어져 있는 듯 그리는 것은 김정일이 남한의 반공세력들과 적대적 공생관계를 맺어온 수괴라는 사실을 살짝 가려준다.



영화는 ‘총풍사건’을 일으킨 남한의 반공세력들을 고발하는데 주력하느라, 북한 권력의 참상을 고발하는 데 힘을 주지 않는다. 박서경이 핵개발 정보를 얻기 위해 영변에 갔을 때, 장마당에서 굶어 죽은 북한 주민들을 보는데, 이 장면에서 카메라는 이들을 자세히 비추지 않는다. 외화 벌이에 혈안이 된 북한의 곤경을 보여주지만, 국보급 골동품을 해외로 반출해 벌어들인 외화가 김정일의 통치자금으로 쓰일 뿐 북한 주민들을 살리는데 쓰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제대로 비판되지 않는다.

영화 안에서 유일하게 이 문제를 지적하는 사람은 영변의 장마당에서 박서경과 동행한 첩자이다. 그는 “나도 내 조국을 사랑하지만, 내 조국이 김일성 부자에 의해 감옥으로 변해가는 것을 참을 수 없다”는 한마디를 남기고 끌려간다. 요컨대 ‘총풍사건’의 핵심은 남북한 권력의 ‘적대적 공생관계’ 이지만, 영화는 남한의 반공세력과 공생관계를 맺고 있는 북한의 수괴를 제대로 비판하지 못하며, 그 피해자라 할 만한 북한 주민에 대해서도 충분히 조명하지 않는다.



영화는 ‘적대적 공생관계’의 수혜자와 피해자를 날카롭게 조명하는 대신 눈물겨운 우정의 휴먼드라마로 나아간다. 호텔방 도청 장면 이후, 영화의 정서적 구심은 첩보원으로서 신념이 흔들리는 박서경에서 그를 도피시키려는 리명운으로 옮아간다. 실제 사건에서 박채서는 신분이 발각되는 순간 북한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리철(리명운의 실제 인물에 해당되는 인물)의 도움을 받을 일이 없었다. 영화가 상상력을 발휘해 굳이 두 사람을 휴먼드라마로 엮는 것은 희망을 투영하려는 의도 때문이다. 두 사람은 두 체제의 상식을 대변한다. 즉 ‘남한 선거에 북한이 개입해선 안 된다’고 믿는 상식을 지닌 남한사람과 ‘북한도 개혁개방에 나서야 한다’고 생각하는 북한사람의 연대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이다.

사실 이것이 2000년대 이후 성사된 남북정상회담의 바탕을 이루는 사고의 접점이다. 영화는 자본주의 경제학을 공부하고, 개혁개방에 찬성하며, 굶주리는 주민들의 고통에도 귀 기울이는 북한의 선한 엘리트 리정운을 교섭 가능한 북한의 얼굴로 내세운다. 이것은 현재 국면에서 남한 정부가 김정은에게 투사하는 희망사항이기도 하다.



<공작>은 1990년대 첩보영화로 시작하여, 잔존하는 반공세력의 추악한 민낯을 까발리는 정치영화를 경유해, 이제부터 주력할 남북관계의 기조를 암시하며 끝맺는다. 영화가 단순한 장르물이나 회고담에 그치지 않고, 현실에 대한 발언력을 지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강철비>와 함께 남북관계에 대한 사고의 지평을 넓히는 영화로 꼽을 만하다.

칼럼니스트 황진미 chingmee@naver.com

[사진=영화 <공작>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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