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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쯤 한국영화에서 행복한 청소년을 볼 수 있을까
기사입력 :[ 2018-09-07 17:25 ]


영화라면 현실에서 돌파구 제공해주는 역할도 함께 해야

[엔터미디어=듀나의 영화낙서판] 한국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은 행복한 청소년을 상상하는 방법을 잊어버린 것일까? 최근에 나온 청소년 주인공 영화들을 골라보라. 주인공이 불행하지 않은 영화를 몇 편이나 떠올릴 수 있는지? 한국 청소년 영화의 디폴트는 <여고괴담>, <한공주>, <우아한 거짓말>이다. 더 나빠질 수는 있어도 더 좋아지기는 힘들다. 주변과 스스로의 경험을 돌이켜보면 이는 당연해 보이지만 과연 정상일까? 다들 ‘쎈’ 영화를 추구하는 요새 경향 때문에 이런 상황은 점점 가속화되는 것 같다.

청소년 캐릭터를 다룬 최근작 세 편을 봐도 이들의 상황은 그리 좋지 않다. 이들은 모두 ‘살아남은 아이들’이며 모두 주변 누군가의 죽음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단지 이후의 삶을 바라보는 시선과 전망은 영화마다 조금씩 다르다.

신동석의 <살아남은 아이>는 이들 중 가장 비관적이고 어둡다. 아들을 잃은 부부 이야기다. 아들은 친구를 구하려다 익사했고 의사자로 지정되었다. 인테리어 일을 하는 남편은 아들이 구한 아이가 학교를 자퇴하고 아르바이트 일을 하며 떠돌고 있는 걸 보고 고용해 일을 가르친다. 하지만 영화 중반에 가면 아들의 죽음과 관련된 사건의 진상이 알고 있던 것과 다르다는 것이 밝혀진다.



그 진상이 무엇인지는 영화를 보기 전에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우리가 품고 있는 한국 사회와 한국 가족, 그런 한국의 남자 고등학교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그리고 이 고정관념은 수많은 경험으로부터 귀납적으로 얻어진 것으로 많은 사람들에겐 그냥 차가운 현실일 것이다. 영화가 주인공들에게 만족스러운 해답을 주지 못한 것도 이해가 된다. 어떻게 답을 찾아내 결말에 넣었어도 관객들은 믿지 않았을 것이다.

그나마 희망적인 부분은 제목의 ‘살아남은 아이’에게 개선의 희망이 보인다는 것이다. 개인에게는, 자신의 잘못을 불안하게나마 응시할 수 있는 영혼에겐 희망이 있다. 단지 그 아이가 속해있는 집단에게 이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개봉을 준비 중인 김의석의 <죄 많은 소녀>는 세 편 중 가장 ‘쎈’ 영화를 의도하고 있다. 냉정하고 엄격하고 고전적인 <살아남은 아이>와 달리 선동적이고 자극적인 기운이 넘실댄다. 모두가 분노하고 있고 다들 고함을 질러댄다.

고등학생의 실종으로 시작되는 영화이다. 아무래도 투신자살한 것으로 보이는 그 아이는 사라지기 전에 같은 학교에 다니는 친구와 언쟁을 했다. 친구는 아이를 죽음으로 몰아갔다는 비난을 받고 친구들로부터 집단 괴롭힘을 당한다.

줄거리만 봐도 요새 한국영화를 지배하는 억울함의 기운이 감지된다. 그런데 의외로 그렇게까지 억울한 영화는 아니다. 그 차이는 집단을 다루는 방식에 있다.

앞에서 다룬 <살아남은 아이>는 부당하게 고통 받는 소수와 냉정하고 이기적이고 비겁하고 평면적인 집단과의 대결을 다룬다. 우리는 그 소수가 집단과 싸워 이길 수도, 그들을 설득할 수도 없다는 걸 알기 때문에 보는 내내 억울하다.

하지만 <죄 많은 소녀>의 여자아이 집단은 <살아남은 아이>의 남자아이 집단과는 달리 복잡하고 입체적이다. 여전히 비겁하고 폭력적이고 한심한 사람들의 무리지만 각자의 고민이 있다. 이들은 평면적인 집단을 이루는 벽돌이 아니기 때문에 집단 폭력의 힘은 종종 자기 무게에 못 이겨 허물어진다. 영화가 끝나도 여전히 사람들은 불행하고 억울하지만 그래도 <죄 많은 소녀>의 아이들에게는 <살아남은 아이>의 아이들에게는 없는 희망이 있다. 그들은 자신의 잘못을 보고 그 무게를 느낀다. ‘사람’인 것이다.



세 편 중 가장 밝은 영화는 김인선의 <어른도감>이다. 상황을 보면 그렇게 밝아보이지 않지만. 이 영화의 주인공은 막 아빠를 잃은 중학생 여자아이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얼굴도 본 적이 없던 작은 삼촌이 나타나서 아빠 죽고 받은 보험금을 빼돌려 달아난다. 주인공은 삼촌을 찾아내지만 돈은 날아간 지 오래. 이 상황에서 벗어나려면 삼촌이 약국 아줌마를 꼬셔 돈을 뜯어낼 수 있도록 협조해야 한다.

한심하기 짝이 없지만 그래도 <어른도감>의 세계는 밝다. 어느 누구도 누군가를 죽이지 않았고 그 죽음에 대해 죄책감을 느껴야 할 이유도 없다. 치사한 사기 행각이 개입되긴 하지만 이 영화엔 진짜로 나쁜 일을 저지르는 나쁜 사람이 등장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이 영화의 등장인물은 모두 ‘개인’이다. 집단의 분위기에 쏠려 일을 저지를 조건이 주어지지 않는다. 주인공이 중학생이라는 점도 추가해야 할 것 같다. 주인공은 아직 한국 고등학교 이야기의 어두운 영역으로 접어들기 전이다.



한마디로 <어른도감>은 앞의 두 영화가 가진 한국 고등학생 이야기의 핸디캡을 짊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밝다. 당연히 두 영화에 대한 대안은 아니다. 하긴 세상이 바뀌지 않는데 이야기의 대안을 찾아야 한다면 그 또한 이상한 일일 것이다. 우리가 견뎌야 하는 실제 세상은 <죄 많은 소녀>보다 <살아남은 아이>의 세계에 더 가까울 것이다. 더 인간적이고 복잡하다고 그게 사실에 가까워야한다는 법은 없다. 종종 반대에 가깝다. 인간 대다수는 좋은 이야기를 구성할 만큼 아름답지 못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야기를 찾고 만들어야 한다. 특히 밝고 희망적인 이야기를 찾는 것은 중요하다. 우리의 상상력을 만드는 재료는 결국 우리가 영화나 소설, 텔레비전을 통해 접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우리의 삶을 만드는 것은 세계에 대한 상상력이기 때문에. 이야기는 현실을 보여주는 역할을 넘어 현실에서 돌파구를 제공해주는 역할도 함께 해야 하기 때문에.

칼럼니스트 듀나 djuna01@empas.com

[사진=영화 <살아남은 아이><죄 많은 소녀><어른도감>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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