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 배우 문성근의 진가를 보여주다

[엔터미디어=소설가 박진규의 옆구리tv] 배우 문성근은 플러스의 배우가 아니라 마이너스의 배우에 가깝다. 그의 연기는 극적인 감정의 사악한 인간을 연기한다 할지라도 ‘극적인’ 무언가를 빼내는 면이 있다. 그에게는 남성배우들이 흔히 지니는 우두머리 짐승 같은 폭력성의 아우라나 따뜻한 아비 같은 아우라가 모두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안경 너머 보이는 차가운 눈과 비웃음에 어울리는 얇은 입술이 그의 트레이드마크이다. 그럼에도 그의 연기에는 극적인 무언가를 빼냈을 때 남는 리얼리티 같은 것이 있다. 이 배우는 생생한 연기가 아닌, 생생한 현실을 연기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문성근의 연기는 노트에 꾹꾹 눌러쓴 볼펜 같은 면이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가 보여주는 연기의 필체가 만년필이 아닌 볼펜이라는 점에 있다. 그의 연기에는 만년필 세대의 남성배우들이 지니고 있을 법한 기품을 가장한 포장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대신 자신이 연기하는 남성 캐릭터의 가장 속물스럽고 뻔뻔한 면들을 낱낱이 보여준다. 속물스럽지만 결국에는 멋있다? 문성근의 연기에는 그런 멋이랄 것도 없다. 그 멋없음이 바로 문성근 연기의 매력이다. 존재의 이유가치를 부정하는 포스트모던 시대의 존재론처럼.

당연히 이 모던한 감성의 배우가 1990년대에 영화판에서 사랑받았던 데는 이유가 있다. 달라진 시대가 원했고, 그 원했던 감성에 가장 적합한 연기를 보여주는 유일한 남성배우가 문성근이었다.



영화 <그 섬에 가고 싶다>에서 <경마장 가는 길>에 이르기까지 문성근은 1990년대에 태어난 새로운 남성상들의 온갖 그늘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지성적이고 고뇌하는 척하지만 알고 보면 속물스럽고 천박하다. 그 지성의 변태를 오버하지 않고 담담하게 보여주는 배우가 그였다. 물론 그도 로맨틱코미디 영화 <101번째 프로포즈>에서는 사랑에 수줍은 바보 같은 남자를 연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가 보여주는 순박함은 시골청년의 순박함이라보다 21세기에 주목받기 시작한 초식남이나 히키코모리에 비슷한 인상을 준다.

문성근이 연기한 인물들은 새로웠지만 안타깝게도 대중들이 사랑하기에는 너무 벅차고 소위 말해 좀 징글징글한 면이 있었다. 하지만 밀레니엄을 넘기면서 이 캐릭터들은 조금 더 대중들에게 파고드는 스타일로 다듬어진다. 공감 가는 정서를 지니고, 유머감각이 있고, 좀더 대중 진화적인 인물들로 말이다. 특히 초기의 한석규나 설경구 등의 배우들이 연기한 인물들에는 문성근 연기했던 남성캐릭터들의 존재감이 묻어 있다. 또한 문성근 특유의 속물스러운 연기는 브라운관에서는 김창완이 좀 더 소탈하게 소화한 감이 있었다.

한편 영화 스크린이 아닌 TV브라운관에서 문성근은 배우가 아닌 SBS <그것이 알고 싶다>의 진행자로 더 깊은 인상을 남겼다. 허참이나 이덕화에 익숙했던 시청자들에게 문성근의 진행은 새롭고도 신기한 것이었다. 친근하거나 쇼맨 같지는 않지만 날카롭게 또박또박 씹어대는 말투로 그는 시청자들을 음모와 살인, 정치적 비리의 세계로 이끌었다.



2018년 추억 속의 문성근은 의료산업 병폐를 알려주는 드라마의 한 인물로 시청자에게 돌아왔다. JTBC 월화드라마 <라이프>가 그것이다. 오랜만에 브라운관에 나타난 문성근의 연기는 놀랍게도 여전히 신선하다.

문성근이 연기하는 상국대학병원 부원장 김태상이 사실 아주 유니크한 인물은 아니다. 의학드라마에 흔히 등장하는 정치적이고 이기적인 의사 캐릭터다. 하지만 이 인물에 허세나 감정의 MSG하나 첨가하지 않고서도 문성근은 현실적이고 인상적인 김태상을 그려낸다.

거기에는 이 배우가 날카롭게 관찰한 듯 보이는 한국의 중상류층 남성 특유의 계급의식과 비열함이 이 캐릭터에 생생하게 묻어 있어서다. 흔한 ‘진상남’ 연기가 아닌 그들의 말투와 생각을 볼펜으로 꾹꾹 눌러쓴 듯한 문성근의 표정과 말투는 종종 인상이 찌푸려질 만큼 얄밉다. 그러다가도 어느덧 이 배우가 지금도 여전히 이 시대의 얼굴을 관찰하고 생생한 인물로 포착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탄할 수밖에 없다.

칼럼니스트 박진규 pillgoo9@gmail.com

[사진=JTBC, 영화 <경마장 가는 길>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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