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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시성’, 전투 장면 말곤 남는 게 없다고 불평하는 이들에게
기사입력 :[ 2018-09-29 14:23 ]
‘안시성’, 역대급 스케일 속에 가려진 세 가지 메시지

[엔터미디어=황진미의 편파평론] △이 영화 찬(贊)△. (본문 중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실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영화<안시성>은 역사 속의 안시성 전투를 담았다. 서기 645년 당태종이 20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했다. 당시 안시성의 군사는 5천 명이었으나, 88일간 성주와 성민들이 힘을 합쳐 성을 사수함으로써 세계 최강의 군대를 물리친 승리의 역사를 기록했다. 그러나 <삼국사기> 등의 정사에는 성주의 이름도 나와 있지 않으며, <열하일기> 등을 통해 양만춘의 이름이 전해질 만큼 기록이 허술하다. 영화는 이처럼 간략한 기록의 행간에, 상상력으로 빚어낸 실감나는 전투 장면들을 채워 넣는다. 전투 장면의 스케일과 만듦새는 한국영화 중 역대 최강이며, <300>나 <트로이> 등에 견주어도 결코 못지않다.



◆ 작전개념이 있는 고대 전투 장면

영화 <안시성>은 벌판에서 벌어지는 대규모 기마부대 돌격 장면을 원거리에서 보여주고, 근접 거리에서 맞붙는 백병전 장면에 클로즈업을 활용하여 다채로운 화면을 구성한다. 또한 화면의 속도를 달리함으로써 역동성과 박진감을 살린다. 영화는 고대전투에서 공성전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고증과 오밀조밀한 구성을 통해 재현해 보인다. 앵글, 미장센, 음악, 무술액션 등이 고루 뛰어나다.

안시성 전투의 최대 매력은 작전의 다양성과 짜임새이다. 흔히 벌판 싸움은 스케일은 크지만, 작전 개념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 쉽다. 영화 초반의 연개소문과 당태종의 벌판 싸움은 비교적 단조롭지 않다. 양측 병사들이 처절하게 맞붙고, 전선이 뒤섞이는가 싶더니, 적들이 뒤에서도 공격해 들어오는 매복에 의해 반전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이후 안시성에서 벌어지는 세 번의 공성전은 엄청난 작전과 아이디어로 가득하다. 흔히 병법에서 상대적으로 적은 수의 군사로도 성을 방어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알려져 있는데, 영화는 그 말이 진실임을 모델로 보여준다.



첫 번째 공격은 성벽을 깨려는 당의 공격으로 시작된다. 당태종은 당시 가장 위력적인 무기인 포거(큰 돌 날리는 투석기)와 충거(성문 돌격용 수레)로 안시성을 공격하면서, 곧 성이 깨질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성벽은 돌과 흙으로 만든 이중 구조였고, 성문을 통과한 군사들은 목책에 갇혀버린다. 안시성의 군사들은 우르르 몰려서 대적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 정해진 위치를 지키며 공격 시점을 조율한다. 작전개념이 극대화된 전투인 것이다.

두 번째 공격은 트로이 목마처럼 생긴 공성용 탑이 등장하면서 시작된다. 연기를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거대한 탑의 위용은 보는 이의 기를 질리게 한다. 탑을 통해 끝도 없이 병사들이 쏟아져 나오는 광경과 이를 보는 양만춘의 표정을 영화는 독특한 앵글로 잡아낸다. 그가 멍한 공황 상태를 딛고 뛸 때까지, 짧은 순간이지만 굉장한 긴장이 흐른다. 영화는 양만춘에 의해 탑이 불타는 쾌감과 양만춘이 위기를 맞는 순간을 바짝 붙여 놓으며 극적인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3차 공격은 당나라 군사들이 토산을 쌓는 것으로 시작된다. 토산이 완성되어가는 것을 보면서, 성안의 사기는 점점 떨어진다. 다가오는 멸망의 시간에 초조감에 휩싸이는 것이다. 기습작전도 실패로 끝나고 양만춘의 근친들이 하나둘 죽어갈 때, 양만춘의 멘탈도 흔들린다. 영화는 양만춘을 홀로 완벽한 존재로 그리지 않는다. “죽은 사람 말고 산 사람들을 생각하라”는 부관(배성우)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든 양만춘은 토산을 무너뜨릴 방법을 생각해낸다.

마침내 두 달 넘게 쌓아온 토산을 넘어 당나라 군사들이 공격해 들어올 때부터 영화 <안시성>의 클라이맥스가 시작된다. 토산이 무너지고, 그 위를 고구려 군이 점령하는 장면은 말할 수 없는 통쾌함을 안긴다. 영화는 토산을 탈환하기 위한 당나라 군사의 공격이 사흘 밤낮 동안 이어졌음을 효과적인 화면구성으로 리드미컬하게 담아낸다. 양만춘이 마지막으로 당긴 활시위와 연개소문의 등장은 안시성의 운명을 바꾼다.



◆ 서사적인 완결성과 여성 캐릭터의 활용

혹자는 전투 장면만 볼만할 뿐 서사나 메시지가 단순하다고 불평하지만, 영화의 서사와 메시지도 좋은 편이다.

고구려 인물 중 가장 잘 알려진 연개소문은 친당정책을 펴던 영류왕을 죽이고 보장왕을 왕위에 올려 집권했다. 당태종은 이를 인정할 수 없다는 명분을 내세워 고구려를 침공한다. 안시성의 성주 양만춘은 연개소문이 일으킨 정변에 반대했고, 당태종의 침략에 맞선 연개소문의 거병에 침여하지 않았다. 크게 보아 연개소문과 당태종의 대결로 볼 수 있는 이 전쟁에서 양만춘의 위치는 얼핏 애매해 보인다. 영화는 이러한 정황을 잘 보여준다.

영화의 시작은 연개소문(유오성)이 이끄는 15만 명의 고구려와 말갈 군사가 요동의 주필산에서 당태종(박성웅)과 맞서는 전투를 보여준다. 격전 끝에 패한 연개소문은 퇴각하면서 인근의 안시성을 버리고 평양성에 군사를 모아 반격하겠다고 말한다. 당태종 역시 양만춘(조인성)이 연개소문과 대립하는 인물이다 보니, 어쩌면 전투 없이 안시성에 입성할 수도 있으리라는 헛꿈을 꾼다. 연개소문은 심지어 반역자 양만춘을 척살하라는 명령을 사물(남주혁)에게 내린다.



영화 <안시성>은 연개소문과 양만춘이 정치적 노선을 달리하는데서 오는 불화와 반목을 품으며, 이러한 갈등이 외적의 침입에서 어떻게 발현되는지를 보여준다. 또한 양만춘을 죽이라는 명령을 받은 사물이 양만춘과 어떤 관계를 맺는지도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양만춘은 사물이 자신을 죽이러왔음을 알면서도 그를 곁에 둔다. 양만춘이 사물에게 자기 수염을 깎도록 맡기면서 심리전을 벌이는 장면이나, 연개소문을 따르지 않은 이유를 두고 논쟁하는 장면은 굉장한 긴장을 품는다. 사물은 양만춘을 지켜보며 고민하고 갈등한다. 사물은 전투에서 양만춘을 살리고, 마침내 목숨을 걸고 연개소문을 찾아가 설득해냄으로써 멸망 직전의 안시성을 구한다. 즉 암살자로 보내졌던 사물이 양만춘을 살리고, 둘 사이에 가로 놓였던 반목과 갈등을 해소시키는 결말은 극적인 완결성을 지닌다.



다만 서사의 측면에서 여성 캐릭터의 활용은 좋지 못하다. 신녀(정은채)와 백하(설현)는 언뜻 비중 있고 개성 있는 캐릭터처럼 보이나, 둘 다 매우 소모적으로 쓰였다. 신녀는 아우라 넘치는 모습이었지만, 당태종의 포로로 잡혔다가 안시성으로 보내져 최악의 행위를 하고 퇴장한다. 양만춘과의 인연도 매우 얄팍하게 쓰였다. 신녀가 존재했어야 하는 이유는 ‘고구려의 신’도 안시성을 버렸다는 부정적인 신탁을 들려주고 주몽의 활을 양만춘에게 건네주는 역할을 하기 위함이다. 즉 양만춘으로 하여금 신도 버린 전투를 비장하고 영웅적으로 수행하도록 만드는 역할인 것이다.

백하의 캐릭터도 실망스럽다. 영화 <안시성>은 백하가 사랑 앞에 당당하고, 여성부대를 이끄는 여전사인데다, 적진에 뛰어들어 홀로 싸울 만큼 용감한 여성이니, 주체적인 여성 캐릭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백하의 도발은 무모하고 충동적이며 무책임하다. 더욱이 그런 행동의 동인이 이성애적 열정 때문이라는 것도 지극히 얄팍한 설정이다. 그가 남성이었다면 부대를 이끄는 장수가 개인적인 감정에 못 이겨 그런 행동을 벌인다고 상상할 수 있는가.



◆ 훌륭한 정치적 윤리적 메시지

영화 <안시성>은 대단히 훌륭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첫째는 지는 싸움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양만춘은 사물에게 “넌 이길 수 있을 때만 싸우느냐”고 묻는다. 승산이 있어서가 아니고, 물러설 수 없기 때문에, 지켜야할 것이 있기 때문에 싸운다는 뜻이다. 고구려의 신도, 연개소문도 안시성을 버렸다는 말은 패배할 것이 뻔 한 미래를 확인해준다. 이길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전무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전투에 나설 수 있는 것은, 옳기 때문이고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승산이 아니라 옳고 그름을 생각하기에 양만춘과 성민들은 끝까지 하나가 되어 싸울 수 있었다. 또한 공동체를 위해 웃으며 죽을 수 있었다. 토산을 무너뜨리기 위해 자기 죽음을 재촉하는 도끼질을 해대던 성민들의 모습은 뭉클하다. 이것을 ‘국뽕’이니 민족주의라 말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고구려의 영광을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외적으로부터 안시성이라는 생활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싸운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누구를 따르느냐가 아니라 백성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이다. 왜 연개소문을 따르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양만춘은 안시성을 지키기 위해서였다고 답한다. 고대나 중세의 장수가 누구를 주군으로 모시는지는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양만춘은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백성을 살리는 것이라 말한다. <명량>의 이순신이 그러하듯이, 임금을 향한 충이 아니라 백성을 향한 충을 보여준다.

셋째는 사소한 반목을 넘어서야 한다는 점이다. 양만춘과 연개소문의 갈등은 언뜻 지자체와 중앙정부 혹은 중앙정치 사이의 갈등을 떠올리게 한다. 이들 사이에 사소한 갈등이 있더라도 생존과 대의 앞에서 화해할 수 있다. 누가 누구를 따르는지 보지 말고, 누가 얼마나 국민과 주민을 위하는지 봄으로써, 진정한 이해와 화해에 이르게 할 수 있다.



수십만 대군에 둘러싸인 고립된 성이라는 이미지는 필연적으로 <남한산성>을 떠올리게 한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절망적인 선택을 하다 끝내 절망적인 굴욕을 맞았던 <남한산성>의 결말은 한없는 무력감을 안겼다. 반면 절망적인 상황이었지만 최고의 리더십을 통해 하나 된 성민들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함으로써 신탁과는 다른 운명을 맞는 <안시성>의 결말은 얼마나 큰 용기를 안기는가. 더 많은 저항의 서사를 보고 싶다.



칼럼니스트 황진미 chingmee@naver.com

[사진=영화 <안시성>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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