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궐’, 무척이나 안타까운 밍밍한 캐릭터들의 행진

[엔터미디어=듀나의 영화낙서판] 영화 <창궐>에 대한 내 의견은 감독의 전작 <공조>보다 조금 낫다는 것이다. 하지만 <공조>가 대단한 영화라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으니 이 문장의 정보값은 하찮기 그지없다.

정보값을 조금 더 늘리자면 나는 <창궐>이 나쁘지 않은 아이디어에 기반을 둔 나쁘지 않은 킬링타임 영화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 간단한 문장도 그리 객관적이거나 보편적일 수는 없다. <씨네21>의 별점평가에서 허남웅 평론가는 ‘야귀가 나오면 나올수록 피곤해진다’며 별 두 개를 주었는데. 그 기분을 충분히 이해할 것 같으면서도 난 여전히 이 영화의 야귀들이 영화의 가장 좋은 부분이었을 뿐만 아니라 객관적으로도 썩 그럴싸하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좀비 영화의 공식을 적당히 따르면서도 적당히 새로우며 무게감도 강하다. 영화보다는 비디오 게임에 더 잘 어울리는 괴물이라는 생각이 종종 들긴 하지만 그래도 서지혜 야귀가 김의성 왕의 목을 물어뜯는 장면의 즐거움을 무시할 생각은 들지 않는다.



하지만 ‘조선 시대 궁궐의 좀비’라는 아이디어와 그에 기반을 둔 액션을 제외한다면 이 영화엔 적극적으로 좋은 말을 해줄만한 것들이 별로 없다. 그렇다고 요새 나오는 대자본 한국 영화들이 대부분 그렇듯 또 엄청 나쁜 것도 아니다. 아주 형편없는 영화도 어느 정도 재주와 용기가 있어야 나오는 법인데.

먼저 캐스팅을 보자.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배우는 각각 주인공과 악역을 연기하는 두 한류스타 현빈과 장동건이다. 현빈은 지금까지 흥행 결과가 괜찮은 다소 무색의 스타이고, 장동건은 자신의 기존 이미지를 깨려는 시도로 십여년 째 꾸준히 영화를 말아먹었지만 몸값은 그대로인 대형스타인데, 이 영화에서도 예상 그대로 활용된다. 둘 다 큰 문제는 없지만 그렇게 재미있지도 않다. 현빈은 액션 장면에서는 자기 기능을 무리 없이 수행하지만 여전히 무색무취인 왕족 캐릭터다. 장동건은 다른 영화에서는 이경영이 맡았을 역을 하고 있는데, 그 때문에 조금 시선을 끌긴 하지만 후반부엔 존재 의미 자체가 사라져 좀 귀찮아진다.



배우 탓만은 아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이건 캐스팅의 문제이다. 한류 남성 스타를 캐스팅한 순간부터 캐릭터에 대한 고민 자체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 결과 분장한 배우의 얼굴을 제외하면 기억나는 게 하나도 없는 밍밍한 캐릭터들의 행진이 시작된다.

이들이 역사를 다루는 방식도 마찬가지다. 이야기를 위해 역사를 뒤트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야기가 실제 역사보다 재미있고 다채로워야 한다는 확신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창궐>의 세계는 다 어디서 본 것 같은 사람들이 나오는 어디서 본 것 같은 곳이다. 병자호란 이후의 억울함, 내 주변 사람들이 소현세자 물고빨기 서사라고 부르는 허망한 꿈과 같은 것들이 퓨전화되자 사진관 배경 사진처럼 밋밋한 공간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들은 다 똑같다. 망상은 언제나 현실보다 심심하기 때문에.



더 아쉬운 것은 영화가 이 망상을 이용해 현실을 넘어설 수 있는 가능성을 외면했다는 것이다. 내가 알기로 조선시대의 어느 왕도 뱀파이어/좀비 하이브리드 괴물에게 살해된 적이 없다. 다시 말해 이 세계는 우리 역사에서 분리된 평행우주이다. 우리가 아는 역사 따위는 완전 무시하고 아무거나 해도 되는 세계인 것이다. 조선왕조를 밀어 붙이고 완전히 새 미래를 여는 것도 가능하다. 하지만 그러는가? 안 그런다. 이 영화를 시사회에서 본 기자들은 촛불시위를 연상시키는 몇몇 장면과 대사의 정치성을 지적했는데, 그걸 이끄는 주인공이 여전히 조선왕조 주인이라면, 결국 이 세계도 우리가 아는 역사에 쓸려간다면 촛불시위 암시가 무슨 의미가 있나 싶다.

<창궐>의 최종 흥행 성적을 예측하는 것은 내 일이 아니고 관심사도 아니다. 이게 큰 의미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올해 나온 가장 훌륭한 한국영화 다섯 편을 모아도 <창궐> 주말 성적의 반에도 못 미칠 것이다. 하지만 이제 천만관객 워너비 영화를 만들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슬슬 걱정해야 하지 않을까? 언제까지 이 비슷비슷한 영화들이 먹힐까? 그들이 새롭다고 생각한 아이디어가 정말 생각만큼 새로웠는가?



칼럼니스트 듀나 djuna01@empas.com

[사진=영화 <창궐>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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