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애 최고로 사랑했던 여인이지. 늘 마음속에 있는 것이 죄스럽지. 지금 애인? 있지. 뉴욕에 있어. 그거 때문에 난리가 났는데 없을 이유가 없잖아. 나 같이 튼튼하고 나 같이 자유스럽고, 남보다도 조금은 잘 생겼잖아. 연애하지 말라는 법 어디 있어.”

- MBC <생방송 오늘 아침> 중 신성일의 한 마디

[엔터미디어=정석희의 그 장면 그 대사] 지난 금요일 아침, TV를 켜놓고 무심히 앉았다가 난데없이 구정물을 뒤집어쓴 양 기분이 상하고 말았다. MBC 시사 교양 프로그램 <생방송 오늘 아침>에 최근 과거 불륜 고백이 담긴 자서전 출간으로 화제가 된 영화배우 신성일 씨가 등장하더니만 ‘불편한 진실’이라는 대중의 반응을 두고 이런저런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순간 빛의 속도로 채널을 돌렸으면 딱 좋았겠지만, 그러나 리모컨을 찾느라 어영부영하는 사이 ‘왜 굳이 이런 숨겨진 개인사를 수록하게 되었느냐’는 리포터의 질문은 던져졌고 이어 흘러나오는 그의 목소리 또한 맥 놓고 들을 수밖에 없었는데, 그런데 그가 ‘전가의 보도’라도 되는 양 앞세우는 솔직함이라는 게 하도 어이없는지라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아내 아닌 다른 여인이 살아오는 내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었고 그 이루지 못한 사랑이 못내 죄스러워 둘만의 비밀을 만천하에 드러내기로 작심했다나. 여기에서 중요한 건 불륜이 죄스러웠다는 게 아니라 사람들의 이목이 두려워 책임을 회피할 수밖에 없었던 그 여인과의 과거지사가 미안해 진실을 밝히기로 했다는 점이다.

부인 엄앵란 씨에게 ‘지금까지 통 크게 살아온 사람이니만큼 이번 일도 이해해주길 바란다’라고만 할 뿐 미안하다는 말은 한 마디도 보태지 않았다는 부분에 대해서는 왈가왈부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부부마다 살아가는 방법이야 제각기 다른 법, 아무리 평생을 바람을 피워왔어도 잘난 남편과 사는 대가로 여기고 참았다는 분이니 이제와 새삼 남들이 무슨 말로 돕고 거들 수 있겠나. 허나 부인이야 그렇다 쳐도 이미 세상을 떠난 고인의 명예는 도대체 어쩔 것인가. 이번 스캔들로 인한 파장에 대해서 신성일 씨 자신이 모든 책임을 지겠노라고 호언장담했다는데 과연 뭘 어떻게 책임지겠다는 것인지 묻고 싶다.

우리가 어느 날 불현듯 세상을 떠나게 되었을 때 가장 마음에 걸리는 것이 무엇일까? 정리 잘 안 된 스스로의 흔적들이 아닐까? 누군가가 뒤죽박죽이 된 내 서랍 속을 들여다본다거나 어린 시절에 써둔 유치한 글이 담긴 노트를 뒤적거리기라도 한다면 그보다 질색할 일은 없지 싶거늘, 불륜이며 낙태, 책임 회피라는 결코 아름답지도 자랑스럽지도 않은 과거사를 온 세상을 향해 떠벌리고 있는 지난날의 연인, 과연 그 여인은 고마운 마음일까?

남모를 둘 사이의 비밀을 밝히기 위해선 서로 합의라는 절차가 필요하다는 것쯤은 초등학생도 알만한 상식이 아닌가 말이다. 나라면 당장에 뛰쳐나와 입을 틀어막고 싶을 것 같다. 본인에게는 잊지 못할 추억이라 해도 상대방에게는 후회막급인, 말끔히 지워버리고 싶은 기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왜 하지 못하는지. 더구나 고인에게도 남겨진 가족들이 존재할 게 아닌가.









기막힌 건 며칠 뒤, 몇몇 프로그램을 통해 다시금 궤변을 늘어놓을 기회가 주어졌다는 사실이다. “나는 성격이 마음에 두고 있질 못해요. 나름대로 굉장히 가슴 아프고 죄책감도 있고 마음속에 두고 있자니 너무너무 부담스러워요.” 들어보니 역시나 앞서와 다름없는 소리다. 본인 속 편안하자고 남의 심정이야 상하든 말든 일단 쏟아 내고 보겠다는 심산인 모양인데, 심지어 아내에게 다 빼앗겨 사진 한 장 달랑 남은 게 너무너무 안타깝고 가슴 아프다며 이 책의 노른자위는 바로 이 사진이 실린 페이지라고 은근슬쩍 책 홍보에 나서기까지 했다.

그리고 매번 빼놓지 않는 현재의 애인 타령, 늙었어도 여전히 사랑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자랑스럽기 그지없나 보다. 이거야 원, 주책이랄 밖에. 그렇지 않아도 방송에 출연할 적마다 젊은 시절 국산 옷은 태가 통 안 나서 프랑스제, 미제 옷만 밀반입해 입었다는 소리며, 밖에 여자가 없는 날이 없어 안사람이 맘고생 꽤나 했었다는 개념 없는 소리를 훈장처럼 떠벌려온 터라 그다지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이렇게까지 후안무치한 인물일 줄이야.

왜 우리가 이처럼 윤리적으로 결함이 있는 사람을 TV에서 봐야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는 일이다. 발언 수위가 방송 품위 저해로 출연정지의 중징계를 받고도 남을 차원이지 싶건만, 설마 영화계 원로라고 눈감아 주는 건가? 자서전에다 무슨 소리를 했든 책이야 안 보면 그만이고 영화관도 찾지 않으면 그만지만 방송이야 선택의 여지없이 당하기 십상이 아닌가. 방송통신위원회의가 그토록 강조하는 윤리와 도덕의 잣대가 대체 무엇인지, 그것이 궁금하다.


칼럼니스트 정석희 soyow@entermedia.co.kr


[사진=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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