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함브라 궁전의 추억’ 송재정 작가의 놀랄 만큼 매혹적인 실험

[엔터미디어=TV삼분지계] ◾편집자 주◾ 하나의 이슈, 세 개의 시선. 각자의 영역을 가지고 대중문화와 관련된 글을 쓰고 있는 정석희·김선영·이승한 세 명의 TV평론가가 뭉쳐 매주 한 가지 주제나 프로그램을 놓고 각자의 시선을 선보인다. 엔터미디어의 [TV삼분지계]를 통해 전문가 세 명의 서로 다른 견해가 엇갈리고 교차하고 때론 맞부딪히는 광경 속에서 오늘날의 TV 지형도를 그려볼 수 있는 단초를 찾으실 수 있기를.

송재정 작가의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은 김은숙 작가의 <미스터 션샤인>과 함께 tvN의 2018년 양대 대작 드라마로 시선을 모은 작품이다. 국내 드라마 사상 가장 많은 제작비를 들인 <미스터 션샤인>보다 회당 제작비가 높은 것으로 알려졌고, 전체 이야기 분량의 30퍼센트 이상이 스페인에서 펼쳐지는 역대급 해외 로케이션을 자랑한다. 각각 3년과 2년 만에 드라마에 복귀한 현빈과 박신혜의 캐스팅도 화려하다. 규모만이 아니라 상상력도 대형태풍급이다. 국내 드라마 최초로 증강현실을 소재로 한 이야기는 송재정 작가 특유의 치밀한 플롯과 어우러져 수많은 중독자들을 양산하고 있다. 안방극장을 비유가 아니라 정말 극장처럼 만드는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을 이번 주 [TV삼분지계]가 감상해봤다.



◆ 예측불허 이야기의 신기한 매력

예측불허. 달리 무슨 말이 필요하랴. 본래 송재정 작가 드라마는 뒤이어 벌어질 상황이며 주고받을 대사를 짐작키 어렵다. 괜스레 심심파적 상상해보지만 번번이 꽝이다. tvN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도 당연히 그렇다. 사건의 열쇠를 쥔 게임 개발자 정세주(찬열)의 안위를 두고 추측이 무성하지만 다 의미 없는 일이다. 4회 동안 압권은 사용자들 간의 대전 중에 사망한 차형석(박훈)이 게임 속 캐릭터가 되어 나타난 순간이었다. 온 힘을 다해 죽여 봤자 버젓이 다시 환생을 하니 이보다 무서울 데가 있나. 원귀가 따로 없지 뭔가.



다음 날 아침, 출근하는 아들 녀석을 붙들고 드라마 캐릭터가 증강현실 게임을 하다가 실제로 죽었는데 게임 캐릭터로 되살아났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NPC', 즉 게임 공급업체가 조종하는 캐릭터라고 알려준다. “일단 사람이 죽었으니 상용화는 불가능하겠지? 1년 후에도 여전히 쫓고 쫓기고 있더라고. 문제 해결은커녕 더 난감해진 것 같아. 그럼 투자한 100억은 어쩐대? 그래서 게임이란 게 위험한 거야!” 아들과 현관문을 사이에 두고 한 바탕 수다를. 눈치를 보아하니 평소 드라마와 담을 쌓은 녀석도 슬며시 관심이 가는 모양이다. 빗소리와 보니따 호스텔 주인 정희주(박신혜)가 연주하는 기타 선율에 비밀이 있는 것 같기도 한데, 도무지 오리무중이다. 어쨌거나 현빈이 IT 투자회사 대표 유진우 역을 맡아줘서 다행이다. 2008년 작 KBS2 <그들의 사는 세상>의 ’정지오‘에 견줘 손색이 없는 맞춤옷이지 싶어서.

방송 칼럼니스트 정석희 soyow59@daum.net



◆ 기존 드라마 시청의 관성을 깨는 새로운 체험

송재정 작가는 한국 판타지 드라마의 개척자다. tvN <인형왕후의 남자>와 tvN <나인: 아홉 번의 시간여행>을 연이어 선보이며 타임슬립 판타지 드라마의 유행을 주도했고, MBC [W]에서는 가상세계와 현실을 자유롭게 넘나들었다. 현재 방영 중인 신작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은 이제까지 주로 가상 및 초현실 세계를 기반으로 했던 판타지에 증강현실이라는 새로운 영역을 끌어들임으로써 국내 판타지 드라마의 지평을 한 차원 확대했다. SF적 소재인 타임슬립이 환상성이 강화된 신비로운 이야기로 거듭났듯, 역시 SF에서나 주로 쓰이던 증강현실은 현실의 인물이 게임 속 캐릭터가 되고, 게임 속 인물이 현실에 영향을 미치는 마법 같은 이야기로 재탄생했다.



가장 매력적인 것은 드라마 속 세계가 현실 위에 가상이 덧입혀진 또 하나의 완전한 세계라는 점이다. 두 개의 세계를 오가는 것이 아니라 아예 경계를 지움으로써, 시청자가 보는 현실 자체를 의심하게 만든다. 가령 보니따 호스텔 주인 희주(박신혜)는 정말 현실의 인물이 맞는 걸까? 세주(찬열)는 왜 하필 진우(현빈)에게 연락을 한 걸까? 진우는 첫 번째 로그인에서 밖으로 빠져나온 걸까? 보다 보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피어나는 의문들 사이에서, 이국에서 만난 남녀의 흔한 로맨스로 보였던 이야기는 뚜렷한 입체감과 몰입감을 얻는다. 그리고 어느 순간 깨닫게 된다.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서부터가 가상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게임의 최종 단계는 있을지언정, 이 드라마의 이야기는 모든 방향으로 열려 있고, 그 방향을 무한 탐험하는 것 자체가 관전 포인트다.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은 한국 판타지 드라마의 새 지평이자 기존 드라마 시청법의 관성을 깨부수는 새로운 경험이다.

칼럼니스트 김선영 herland@naver.com



◆ 게임이 현실의 연장선상이 된 오늘을 그리는 송재정의 마술적 리얼리즘

tvN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은 편한 마음으로 설렁설렁 볼 수 있는 작품이 아니다. 플레이어가 착용한 특수 스마트렌즈 위에 VR 게임 필드가 투사되어 현실 공간 위에 게임의 레이어가 씌워진다는 설정은 현실과 판타지의 경계를 이음매 없이 붙여내고, 미래 시점의 장면들을 힌트처럼 던져두고는 과거 시점으로 돌아와 이야기를 풀어내는 서사 구조는 극에 미스터리를 불어넣는다. 송재정 작가가 의도적으로 설계한 이 미로는 생각보다 촘촘해서, 보는 이로 하여금 드라마를 다 본 후에도 끊임없이 추리를 하도록 만든다. 게임 속에서 격투 끝에 사망한 차형석(박훈)이 현실 세계에서도 사망한 채 발견된 대목만으로도 충분히 당혹스러운데, 이미 죽은 차형석이 게임 안에 계속 등장해 유진우(현빈)를 공격하는 대목쯤 되면 현실과 가상의 위계가 무의미해진다.



두 세계의 경계가 흐려지는 건 여러모로 자연스러운 결과다. 송재정 작가는 현실 세계의 분노나 죄책감이 게임 속 세계에 투사되는 광경을 섬세하게 묘사한다. 자신을 배신하고 아내를 앗아간 친구 형석에 대한 진우의 극심한 분노는 게임 속에서나마 칼을 휘둘러 형석을 죽이는 결과로 이어지고, 게임 속에 피를 흘린 채 등장해 진우를 공격하는 형석의 모습은 혹시 형석의 죽음이 자신의 탓은 아닐까 하는 진우의 죄의식을 즉각적으로 구현한다. 게임이 더 이상 현실의 대체재나 도피처인 것이 아니라, 온라인으로 확장된 현실의 연장이 되었음을 정확하게 짚은 것이다.

송재정 작가는 전작 드라마 [W](2016. MBC) 종영 직후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자신이 탐구하기 시작한 영역을 ‘마술적 리얼리즘’이라 지칭하며 “전작 <나인…> 때만 해도 판타지라도 논리적인 것에 집착했다. 이제 그보다는 시각적으로 무엇을 보여주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밝힌 바 있다.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은 그 ‘마술적 리얼리즘’ 실험을 통해, 게임이 현실과 유리된 별개의 것이 아니라 현실의 확장이 된 오늘날의 리얼리티를 구현한 작품인 셈이다. 아직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이 ‘좋은 작품’인지 확답은 못하겠다. 다만 놀랄 만큼 매혹적인 실험인 것만은 확실하다.

칼럼니스트 이승한 tintin@iamtintin.net

[사진=t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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