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 씨, 노향기라는 이름. 나한테서 안 떠났었어요. 얼마나 아프고 힘들었을까. 내가 저이를 향기 씨에게 떠나보냈을 때보다 몇 갑절 더 아팠을 거예요. 만나서 얘기하고 이해와 용서를...... 염치없어요. 미안해요. 나는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을 거예요. 만약 그때까지 오빠에 대한 마음이 식지 않거든, 내가 없어졌을 때 향기 씨가 옆에 있어줬으면. 뻔뻔스럽지만 어쩌면 더 박지형이라는 남자를 나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일지도 모르니까.”

- SBS <천일의 약속>에서 서연(수애)의 한 마디

[엔터미디어=정석희의 그 장면 그 대사] <천일의 약속>이 박지형(김래원)이 딸 예은이를 데리고 아내 이서연(수애)이의 묘지를 찾는 장면을 끝으로 막을 내렸다. 그런데 아쉬움이 남는 게 아니라 체증이 내려간 듯 속이 후련하다. 한 회도 빼놓지 않고, 늘 눈물 바람을 하며 지켜본 드라마지만 주인공 서연이가 울 때 따라서 운 기억이 없다. 아무리 서럽게, 서럽게 신세한탄을 하며 흐느껴도 멀찌감치 떨어져 바라보는 기분이었다. 이상하게 통 감정이입이 안 됐다.

지형이 엄마(김해숙)가 가슴을 부여잡고 숨 죽여 울 때도 같이 울었고, 누나가 알츠하이머라는 사실을 알게 된 문권(박유환)이가 통곡을 할 때도, 서연이 결혼식 전날 고모(오미연)가 술 한 잔 기울이며 일찍이 세상 떠난 동생 생각에 눈시울을 적실 때도, 하다못해 사촌언니 명희(문정희)가 따귀를 맞고 “그래, 나 나쁜 년이었어.”하며 서연이를 끌어안고 울 때도 눈물이 났다. 그런데 나이 서른하나인 젊디젊은 아이 엄마가 뇌가 쪼그라드는 병으로 죽어 간다는데 왜 슬프지 않았던 걸까? 심지어 울어도 참 예쁘게 우네, 감탄하며 바라본 적도 있다. 머리로는 딱하다는 걸 알겠는데 가슴이 꿈쩍도 안하는 거다.

반면 서연이 남매의 어릴 적 장면이 나오면 매번 눈물 콧물 다 쏟아가며 울었다. TV 앞에서만 우는 게 아니라 남에게 이 얘길 전해주다가도 한 번씩 울곤 했다. “밖에 나가 골목길을 기웃거리다가 결국 먹을 거 못 구해온 누나가 물이 담긴 대접을 동생에게 내미는 거야. 그러면 남동생이 마다하면서 ‘싫어, 엄마 오면 밥 먹을 거야. 불고기랑 밥 먹을 거야’하고 칭얼거려. 누나는 ‘엄마 오면 불고기랑 밥 먹어. 엄마가 쌀이랑 라면이랑 불고기랑 잔뜩 사가지고 지금 오고 있을 거야’ 하며 어르고 달래고. 어린 것들이 얼마나 불쌍한지 몰라.” 이 말을 하는 동안 몇 번이나 목이 메어 말을 멈춰야 했다.

엄마(김부선)가 도망을 가버린 후 고모가 찾으러 오던 날까지, 목을 빼고 기다리는 동안 어린 서연이와 문권이는 얼마나 외롭고 무서웠을까. 그래도 고모부(유승봉)가 사람이 좋아 기꺼이 거두어줬고 고모가 엄마 못지않게 살뜰히 보살펴줬으니 불행 중 다행이었다. 넉넉한 생활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지지리 궁핍하지는 않았고, 사사건건 딴죽을 거는 사촌언니가 있어 서러운 날도 많았지만 대신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자상한 사촌오빠(이상우)가 있지 않았나. 어쩌면 신통치 않은 부모 밑에서 크는 것보다는 나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큰 고생은 안 하며 컸다고 해도 엄마에게 버림받았다는 느낌, 배고픔과 밀려드는 공포와 싸워야 했던 그 지옥 같은 시간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그렇게 불쌍했던 아이가 박복도 하지, 겨우 독립해서 살만하다 싶어지니 불치병에 걸린 게 아닌가. 그것도 한참 좋을 나이에. 그런데 왜 나는 그 딱한 서연이에게 마음을 주지 못했던 걸까.






아마 첫 회 때문이지 싶다. 결혼을 코앞에 둔 남자와 밀회를 나누던 장면이, 그리고 침대 위에서 희희낙락 노닥거리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 걸 어쩌랴. 서연이는 노향기(정유미)라는 존재를 알면서 지형이와 연인 사이가 됐고 부를 때마다 서슴지 않고 달려가 잠자리를 가졌다. 그 비밀스런 관계는 1년씩이나 계속 됐다. 온당치 않은 관계란 걸 모를 리 없으나 ‘잠시 훔쳤다 돌려줄 생각이니까 뭐, 나는 쿨하니까 질척거리지 않을 거야, 그럼 되는 거잖아?’라는 식으로 자위했다. 개념 없는 여자가 아님을 증명이라도 하듯 “제 마음도 어머니 마음과 같습니다.”라는 말로 지형이 어머니를 감복시키기까지 했다.

하지만 결국엔 모든 책임을 알츠하이머에게 돌린 채 결혼식을 올렸다. 그러나 막상 결혼을 하고 난 다음엔 불행하다고 했다. 남은 시간 내내 행복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며, 괜한 결정이었다며 지형이를 원망했다. 아기도 모든 사람이 반대했건만 심장이 뛰는 생명을 어떻게 없앨 수 있느냐며 부득부득 혼자 우겨서 낳았다. 그리고 또 괜히 낳았다며 울었다. 아기를 안아주지도 않고 인형을 대하듯 쳐다보기만 하지 않았나. 이것도 다 알츠하이머 탓이다. 약혼자였던 향기네나 지형이네나 자식 결혼이 하루 전날 파토가 나는 바람에 쑥대밭이 됐지만 불치병 환자가 걸려 있는 일이니, 다들 꾹 참고 화를 다스려야 했다. 그래야 교양 있는 사람이니까. 시청자도 마찬가지다. 영 찝찝한 상황이었지만 비난을 자제해야만 했다. 너무나 딱한 치매 환자니까.

서연이가 스스로를 날강도, 날치기라고 표현하고 있으니 양심이 영 없지는 않나보다 했다. 향기를 불러달라고 부탁했을 때, 그리고 찾아온 향기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건넸을 때 다행이다 싶었다. 그래, 그래야 사람이지. 그런데 이어지는 말이 지형이를 부탁한단다. 아까워 미칠 것 같지만 어쩔 수 없어 내준다는 듯이. 향기 쪽에서 오히려 불행하지 않으니 걱정 말라며 위로한다.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생각해보니 서연이만이 아니라 지형이가 눈이 다 짓무르도록 울었어도 슬프지 않았다. 분명 순애보적인, 드라마 역사상 손꼽힐만한 희생적인 사랑이었거늘 왜일까? <천일의 약속>은 재미는 물론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 드라마였지만 주인공들의 사랑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공감을 얻어내지 못했다. 적어도 나에게 만큼은.



칼럼니스트 정석희 soyow@entermedia.co.kr



[사진=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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