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이 된 남자’는 여진구에게 제대로 연기의 판을 깔아줬다

[엔터미디어=정덕현] 영화 <광해>로 연기력 확장을 입증했던 이병헌을 보는 듯하다. tvN 월화드라마 <왕이 된 남자>의 여진구 이야기다. 그런데 이렇게 된 것이 그저 우연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그것은 <왕이 된 남자>가 가진 이야기가 여진구라는 연기자의 잠재력을 끄집어내는 특별한 힘을 발휘하고 있어서다. 그건 바로 여진구가 연기하는 하선이라는 광대 캐릭터에서 비롯된다.

하선(여진구)은 가면을 쓰고 당대의 시국을 연기로 풍자하곤 하던 광대다. 얼굴이 왕 이헌(여진구)과 같다는 이유로 암살위협을 받는 왕 대신 왕좌에 앉아 왕을 연기한다. 하선을 그 자리에 앉힌 건, 점점 잔혹해지고 정신을 놓고 있는 이헌에게 그래도 충성하던 이규(김상경)다. 이규는 이헌을 모처에 옮겨 놓고 마약에 중독되고 환청에 시달리는 그를 회복시키려 한다.



하선과 이헌은 그 성격이 극과 극이다. 이헌은 자신이 살기 위해 자신을 따르던 경인대군마저 죽게 만들고, 그것은 내내 그의 악몽으로 되돌아온다. 심지어 장인마저 죽이라 명하는 포악함을 보이지만, 그 포악함은 그의 유약함이 만들어내는 공포에서 비롯된 것들이다. 하지만 하선은 이헌과는 달리 죽을 지라도 ‘인간다운 선택’을 해야 한다고 말하는 인물이다. 그건 어쩌면 광대라는 직업과 무관하지 않을 게다. 광대는 결국 누군가의 삶을 들여다보고 그 감정이입을 통해 연기를 하는 이가 아닌가.

물론 1인2역은 같은 연기자가 얼마나 상반된 모습을 연기해내는가를 통해 그 연기공력을 드러내게 해주는 장치일 수 있다. 하지만 <왕이 된 남자>에서 여진구의 연기가 남다르게 보이는 건 단지 1인2역을 하고 있어서가 아니다. 그것보다는 하선이라는 광대의 직업적 특성이 여진구의 연기에 대한 몰입을 더 극대화시켜주고 있어서다.

영화 <광해>에서 이병헌이 그랬듯이, <왕이 된 남자>에서 여진구는 왕을 연기하다 점점 왕이 되어가는 광대를 연기한다. 그것은 연기자가 어떤 역할에 빠져들어가는 과정을 그대로 보여준다. 궁에 들어와 이헌의 역할을 연기하던 하선은 차츰 왕이라는 자리가 만들어내는 역할들을 조금씩 해나간다. 자신의 누이동생 달래(신수연)가 신치수(권해효)의 아들 신이겸(최규진)에게 욕보였다는 사실을 알고 생겨난 복수심은 그 몰입을 더 강화시킨다. 또 궁에서 만난 중전(이세영)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그를 지키려는 행보 역시 하선을 그저 왕 연기에서 점점 왕처럼 몰입시키는 힘을 부여한다.



즉 <왕이 된 남자>는 폭군을 대신해 왕이 된 광대가 궁에 적응해가며 진짜 왕이 하지 못했던 일들을 해내는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여진구라는 연기자(광대)가 왕 역할에 조금씩 빙의되어가며 나중에는 온전한 왕에 몰입하는 그 과정을 담고 있기도 하다. 중전을 구할 증좌를 갖고도 그를 구하기보다는 대비를 몰아낼 생각을 하는 이규에게 하선이 “비단옷 차려입고 권세를 누리면 뭐합니까? 짐승만도 못한 생각만 가득 차 있는데! 사람다운 생각은 조금도 못하는데!”라고 일갈하는 장면은 하선의 변화를 잘 보여준다.

자신이 죽게 한 경인대군의 목소리가 자꾸만 들린다며 제 귀를 찔러버린 이헌을 보고 그가 다시 왕으로 돌아올 수 없게 되었다는 걸 알게 된 이규는 결국 하선을 벼랑 끝으로 데려가 칼을 꽂고 “광대 하선은 죽었다. 이제 네가 이 나라의 임금이다.”라고 선언한다. 이제 온전히 하선이 왕의 위치에 서서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는 단계로 들어서는 장면이다. 연기의 관점으로 보면 여진구라는 배우가 한 걸음 더 왕 역할 깊숙이 들어가는 장면이기도 하다.



여진구는 <해를 품은 달>, <뿌리깊은 나무>, <무사 백동수> 등에서 아역으로 등장해 주목받은 배우다. 사극과의 인연은 그래서 그 후에도 <대박>이나 영화 <대립군> 같은 작품으로 이어진 바 있다. 하지만 아역이 성인역으로 넘어오는 과정은 모든 연기자들에게 쉽지 않은 일이다. 실제로 성인 역할을 하며 출연했던 드라마들에서 여진구는 도전적이었지만 그만한 성과를 만들어내지는 못했다.

그런 그에게 <왕이 된 남자>는 확실한 한 판 무대를 열어주고 있다. 잘하면 살판이고 못하면 죽을 판이라는 남사당패 광대들의 대사들이 그의 입을 통해 전해질 때, 그가 지금 하고 있는 연기의 절절함 또한 그만한 진정성으로 전해진다. 그는 이렇게 깔린 판 위에서 광대가 왕이 되는 신명 나는 한 판 연기의 세계 속으로 시청자들을 빠져들게 하고 있다.

정덕현 칼럼니스트 thekian1@entermedia.co.kr

[사진=t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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