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투자 세계의 성배(聖杯)를 찾아서 ①

[엔터미디어=백우진의 잡학시대] 한국형 헤지펀드 출시를 앞두고 ‘퀀트’라는 용어가 자주 등장한다. 퀀트는 주식시장에서 계량적인(quantatitive) 분석이나 계량 분석가를 줄인 단어다.

퀀트 기법은 수학·통계 지식을 이용해 투자법칙을 찾아내고 이에 맞춰 짠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투자하는 방식을 가리킨다. 컴퓨터가 프로그램에 따라 자동으로 거래하도록 하는 투자 방식은 ‘알고리즘 트레이딩’이라고 불린다. 단순하게 말하면 퀀트가 분석한 로직에 따라 컴퓨터 전문가가 프로그램을 만들면 컴퓨터가 이 프로그램에 따라 알고리즘 트레이딩을 한다.

1980년대가 정크본드의 시대였고 1990년대가 헤지펀드의 시대였다면, 2000년대 초 이후에는 수학 개념을 금융시장에 적용한 퀀트 기법 투자자들이 월가를 지배하게 됐다. 2006년 미국과 유럽연합(EU) 주식시장 거래의 3분의 1이 알고리즘 트레이딩이었다. 이 비율은 2009년에 4분의 3에 육박했다. 전문가들은 2014년이나 2015년 쯤이면 거래의 90% 이상을 컴퓨터가 맡을 것으로 예상한다.

퀀트 펀드의 투자전략은 차익거래, 가격변동 양상에 대한 가설에 따른 투자 등으로 나뉜다. 차익거래는 예를 들어 어떤 회사의 채권이 주식에 비해 저평가됐다면 채권을 매입하고 주식을 매도하는 포지션을 잡은 뒤 가격 차이가 줄거나 없어지기를 기다리는 방식이다. 가격변동 양상을 남보다 앞서 예측하는 데 목표를 두고 1000분의 1초 단위의 짧은 시간에 거래하는 극초단타매매(HTF, High Frequency Trading)를 행하는 펀드도 있다. HTF는 시장을 교란시키고 지수를 급등락하게 하는 요인으로 지목되기도 한다.

퀀트 기법 투자회사 중에 가장 주목받는 곳이 르네상스 테크놀로지다. 설립자 제임스 사이먼스는 UC버클리 물리학 박사 출신으로 하버드대 수학과 교수로 재직하다 투자의 세계에 뛰어들었다. 사이먼스는 1982년에 회사를 설립하고 희귀한 수학 현상에서 가격변동의 양상에 대한 가설을 세우고 그에 따라 투자했다. 예를 들어 암호 해독 기술, 컴퓨터로 음성을 인식하는 패턴 등을 활용했다.

르네상스 테크놀로지의 핵심 인력 90명은 물리학·수학·천문학·컴퓨터 분야 과학자들이다. 이 투자회사의 대표 펀드인 메달리온은 약 30년 동안 연평균 40%라는 경이로운 수익률을 기록했다. 메달리온은 사이먼스가 받은 수학 분야 상이다. 르네상스 테크놀로지는 2007년 자산규모 기준 헤지펀드 순위에서 1위에 올랐다.

‘성배(聖杯)를 찾은 게 아닐까?’ 구름 위를 걷는 듯한 르네상스 테크놀로지의 높은 수익률을 지켜보며 월가는 이런 의문을 품었다. 르네상스 테크놀로지가 증시를 움직이는 법칙을 발견하지 않았다면 그토록 오랫동안 그렇게 좋은 기록을 유지하지 못하리라고 월가 사람들은 여겼다. 달리 말해, 그 기록은 사실이라고 믿기에는 너무 대단했다.

<퀀트>를 쓴 월스트리트저널 기자 스캇 패터슨도 그런 의문을 갖고 르네상스 테크놀로지를 들여다 봤다. 그는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 다만 독자가 판단할 몇 가지 정황을 다음과 같이 전달한다.

르네상스 테크놀로지는 한 개 모델을 돌리는 게 아니라 자주 조정한다. 이 곳에서 알고리즘 트레이딩 모델에 관여하는 사람은 1년에 한 번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시해야 한다. 아이디어에 대한 제약이나 장벽은 없다. 회사는 모든 아이디어를 시장 데이터에 적용해 보고, 의미가 있다고 판단할 경우 기존 모델 조정에 반영한다. 이곳 사람들도 높은 수익률이라는 엄청난 압박에 시달리며 지낸다.

최첨단인 HFT를 비롯해 알고리즘 트레이딩은 아직 국내에 생소하다. 우선 국내에서 HFT는 파생상품에서나 가능하다. 주식 현물 거래에는 농특세가 부과되기 때문에, 하루에 수십만 건을 거래하면 배보다 배꼽이 커지게 된다. 반면 미국에서는 주식 현물에 대해서도 HFT가 이뤄진다. HFT를 구사하는 대표적인 헤지펀드 회사가 르네상스 테크놀로지다.

이와 관련해 최근 법적인 쟁점이 된 부분이 증권사가 VIP 고객에게 제공한 빠른 전용선이다. 검찰은 이를 불공정하다며 12개 증권사 대표를 기소했다. 법원이 검찰의 손을 들어주면 HTF가 가로막힐 판이었다. 법원은 검찰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11월 말 대신증권 대표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이에 따라 나머지 11개 증권사 대표도 혐의를 벗어날 전망이다.

일반인보다 더 빠른 전용선으로 무장하고, 남보다 빨리 시세를 받아 더 빨리 주문을 넣는 일이 가능해졌다. 물론 속도가 승부를 좌우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컴퓨터 프로그램의 알고리즘이 지닌 경쟁력이다. 그러나 일단 국내 증권사의 알고리즘 트레이딩 부서와 외부 투자자들은 속도의 제약에 걸릴 뻔했다가 벗어났다. 지금도 이들은 제한속도 없는 투자의 아우토반을 질주할 알고리즘을 가다듬는 데 골몰한다.

증권업계는 더 많은 수학과 물리학, 통계학 전공자를 뽑을 듯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수익이 성적 순이지는 않다. 이는 현재 국내 증권업계에서 일하는 퀀트의 실적에서도 드러난다. 르네상스 테크놀로지는 예외일 뿐이다.


칼럼니스트 백우진 중앙일보시사미디어 전문기자, <안티이코노믹스><글은 논리다> 저자 cobalt@joongang.co.kr


[사진=다산북스]
[자료]
포브스코리아, 컴퓨터에 투자 맡겼더니 33개월 수익률 114%, 2011년 12월호
스캇 패터슨, 퀀트: 세계 금융시장을 장악한 수학 천재들 이야기, 2011, 다산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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