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부시게’, 김혜자에게서 한지민이 느껴지는 놀라움

[엔터미디어=정덕현] 중국집에서 친구들과 함께 술을 마시고 춤을 추는 혜자(김혜자)는 창밖으로 지나가는 준하(남주혁)을 본다. 그 때 밖에서 창을 통해 보이는 혜자는 젊은 날의 혜자(한지민)로 바뀐다. 젊은 날 친구들과 놀던 시절의 혜자와, 하루아침에 나이 들어 칠순의 할머니가 된 혜자를 슬쩍 병치해서 보여주는 장면이지만, 놀랍게도 그 변환에 그다지 이물감이 들지 않는다. 연기자 김혜자의 연기는 정말 상상 이상이다.

JTBC 월화드라마 <눈이 부시게>를 보면서 시청자들은 아마도 흥미로운 감정의 교차를 경험했을 게다. 너무 웃긴데 어쩐지 가슴이 뭉클해진다. 나이 들어버린 혜자의 흰 머리를 엄마 이정은(이정은)이 염색해주는 장면이 그렇고, 그를 측은하게 바라보는 아빠 김상운(안내상)에게 머리를 감고 나오며 숱이 없어 금방 감을 수 있어 좋다며 환하게 웃는 혜자의 모습이 그렇다. 또 나이 들어버렸지만 척 보고 바로 친구임을 알아보는 현주(김가은)와 상은(송상은)이 함께 술을 마시며 까르르 웃다가 “이제 졸리다”는 말 한 마디에 눈물을 터트리는 친구의 모습도 웃기면서 울린다. 도대체 이 드라마는 무슨 마법을 부리고 있는 걸까.



놀라운 건 나이든 혜자의 말과 행동에서 젊었던 시절의 그가 순간순간 겹쳐 보이는 착시현상까지 느껴진다는 점이다. 아침 일찍 일하러 나가시는 아빠에게 먹을 것을 챙겨주며 “파이팅!”을 외치는 연기자 김혜자에게서는 한지민의 모습이 슬쩍 겹쳐진다. 어떻게 이런 게 가능한 걸까.

<눈이 부시게>는 아빠의 사고를 막기 위해 시간을 되돌리는 시계를 과도하게 쓴 탓에 하루아침에 폭삭 늙어버린 혜자의 말 그대로 웃픈 적응기를 담고 있다. 두문불출하며 방에 콕 박혀 있던 혜자는 죽어버리겠다고 결심하기도 했고 또 멀리 떠나겠다고 집을 나섰지만 마치 자석이라도 있는 듯 집으로 되돌려 보내진다.

청춘의 시간을 송두리째 날려버린 그 상황이 얼마나 절망적일까 싶지만 드라마는 거기에 머물지 않고 씩씩하게 현실에 적응해 가는 혜자의 모습을 그려낸다. 나이 들어 일찍 잠에서 깬 혜자는 엄마의 미용실에서 수건을 빨아 넌다. 스물다섯에는 하지 않았던 일들이다. 또 철없는 오빠와 함께 자신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걸 하나하나 체크해본다. 계단 오르기도 쉽지 않고 달리기도 어려우며 노래방에서 노래를 하는 것도 영 쉽지 않다. 젊은 날에는 그런 일들이 아마도 아무 것도 아니었을 게다. 그래서 혜자의 적응기는 코미디처럼 처리되었지만 그 밑바닥에는 슬픔 같은 게 담겨진다.



젊은 나이의 마인드를 여전히 가졌지만 늙어버린 몸을 가진 혜자라는 설정은 그래서 기막힌 면이 있다. 젊었을 때는 전혀 경험하지 못했던 늙어버린 몸을 미리 경험해보는 일종의 체험의 공감을 더해주고, 동시에 나이든 몸을 가졌어도 젊은 마인드를 가진 어르신들이 여전히 생기넘치고 귀여울 수도 있다는 걸 보여준다. 세대 공감이라는 말이 이제는 너무 흔해져버렸지만, 이를 체화해서 보여주는 이 드라마는 확실히 무언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젊은 마인드에 나이 든 혜자의 연기를 하는 김혜자가 이 정도로 웃기고 울릴 줄은 몰랐다. 물론 연기로 이를 충분히 소화해낼 것이라는 데 아무런 의구심도 없었지만, 이렇게 귀엽고, 소녀 같은 모습이 아무런 이물감 없이 전달되리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연기자 김혜자는 아마도 이런 선입견을 지워버리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몸이 나이 들었다고 반드시 마음까지 나이가 들어버리는 건 아니라고.

정덕현 칼럼니스트 thekian1@entermedia.co.kr

[사진=JT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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