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질경찰’ 중년남자에게 집착하는 이정범 감독의 한계

[엔터미디어=듀나의 영화낙서판] 한국 영화와 드라마를 만드는 사람들에게는 고전 영화의 제목을 훔쳐 쓰는 나쁜 버릇이 있는데, 이정범 감독의 신작 <악질경찰>도 여기에 해당된다. <악질경찰>은 1992년에 아벨 페라라가 만든 네오 느와르 영화 ‘Bad Lieutenant’의 번역제다. <무방비 도시>, <뜨거운 것이 좋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와 같은 영화들처럼 <악질경찰>도 제목을 빌려온 영화의 검색을 방해한다.

물론 열심히 노력하면 변명을 찾을 수는 있다. 일단 이정범의 영화 주인공은 경사니까 페라라 영화의 주인공과 계급이 좀 다르다. 게다가 이 제목은 베르너 헤르조크가 2009년에 한 번 써먹은 적이 있다. 두 영화 모두 제작자가 같아서 이 제목의 차용은 공식적이긴 했지만. 무엇보다 <악질경찰>은 장르이다. 페라라 이전에도 이런 내용의 이야기는 많다. 이런 이야기는 부패한 경찰이 어떤 계기로 (주로 여자를 만난다) 각성을 하게 되는데, 그러는 동안 그를 시험하는 곤란한 일에 말려든다는 식으로 흘러간다. 아무리 장르라도 한국어 인터넷에서 검색 공해를 일으킨 잘못은 사라지지 않는다.

사실 제목은 <악질경찰>이란 영화를 이야기할 때 그렇게까지 중요하지 않다. 이 영화에는 더 큰 문제가 있다. 그리고 영화는 며칠 전 언론 시사회를 하기 전까지 이를 꼼꼼하게 은폐했다. <악질경찰>은 세월호에 대한 영화다.



아무리 무신경한 관객이라도 영화가 시작되면 짐작할 수밖에 없다. 영화의 시대배경은 2015년. 좀 애매한 과거다. 그런데 이선균이 연기하는 조필오 경사는 안산에서도 단원서 소속이다. 이렇게 시공간을 짜놓고 세월호 이야기를 피할 수 있을까?

지금 이 시대를 사는 서사예술가가 세월호 이야기를 하려 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아니, 당연한 일이고 누군가는 해야 한다. 하지만 소재가 소재이니만큼 섬세한 접근이 필수적이다. 잘못하다가는 얼마 전에 끔찍한 소동에 휘말렸던 강동수의 소설 <언더 더 씨> 꼴이 난다. 예술가에게 자동적으로 주어지는 면죄부 따위는 없다.

<악질경찰>은 <언더 더 씨>처럼 대놓고 세월호 피해자의 이미지를 착취하는 작품은 아니다. 하지만 보다보면 이런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왜 세월호 이야기를 왜 이렇게 이상하게 써먹고 있지?’



이런 생각이 드는 건 당연하다. 생각해보라. 어떻게 이 영화는 자신이 세월호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시사회 전까지 숨길 수 있었을까? 그건 이 영화의 기본 스토리가 세월호 없이도 아무 무리 없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악질 경찰을 각성시키는 사람은 그 누구여도 상관이 없다. 성폭행 당한 수녀일 수도 있고, 자신이 실수로 누명을 씌운 남자의 동생일 수도 있으며, 살인범의 눈먼 누나일 수도 있다. <악질경찰>의 경우, 그 누군가가 세월호 사건으로 <여고괴담> 친구를 잃은 틴에이저 여자아이인 것이다. 그 경찰이 세월호에 각성해서 악덕 대기업 총수와 맞선다는 방향으로 이야기가 흘러가면 더 어이가 없어진다. 다시 말해 이정범은 세월호 이야기를 장르 관습의 도구로 이용하고 있다.

이정범은 시사회 이후 기자간담회에서 세월호에 대한 자신의 진정성에 대해 여러 차례 힘주어 언급했다. 세월호 소재를 다루었기 때문에 얼마나 투자와 캐스팅이 어려웠는지도 이야기했다. 나는 그 말을 모두 믿는다. 하지만 내가 아무리 이정범의 진정성을 믿는다고 해도 그가 세월호라는 소재를 다룰 능력이 없는 이야기꾼이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이야기꾼 이정범의 발목을 잡고 있는 건 중년남자 중심 사고방식이다. 세상의 중심은 중년남자이고 그가 느끼는 감정과 생각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 헛소문이 너무나도 넓게 퍼져 있고 사람들이 이를 너무나도 당연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세월호 참사에 충격 먹은 이야기꾼이 세월호에서 죽어간 아이들을 애도하며 세월호에 영감을 받은 이야기를 쓰면서도 주인공을 별 상관도 없는 중년남자로 쓰는 어이없는 선택을 가능하게 한다.



전소니가 연기하는 미나 이야기를 하자면 한숨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이정범에겐 기괴한 장점이자 단점이 하나 있는데, 그건 상대 여자배우들을 기가 막히게 잘 뽑아놓고 그 배우에게 제대로 된 캐릭터나 대사도 주지 않고 방치한다는 것이다. <악질경찰>도 예외는 아니다. 전소니 캐스팅은 준수하다. 하지만 이게 과연 캐릭터이긴 한가? 미나는 네오 누아르 각성 천사와 세월호 세대 대변자를 평면적으로 대변하느라 끝까지 자신만의 존재감을 찾지 못한다. 결국 중년남자가 각성하는 순간 이 캐릭터는 존재하지 않게 된다.

이야기꾼이 모든 이야기를 다 잘 할 수는 없다. 이정범이 중년남자가 나오는 액션 영화밖에 만들지 못한다면 그건 그의 잘못이 아니다. 하지만 중년남자 중심 사고방식에서 벗어날 능력이 없는 사람이 세월호와 같은 소재를 골라 중년남자 주인공으로 영화를 만드는 건 전혀 다른 이야기다. 세월호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면 아이들을 주인공으로 삼으라. “아저씨가 미안하다!”라며 징징거리는 중년남자 주인공은 꼴사나울 뿐이다.

칼럼니스트 듀나 djuna01@empas.com

[사진=영화 <악질경찰>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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