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부시게’, 오랫동안 기억되고 회자 될 명작이란 이런 것

[엔터미디어=황진미의 편파평론] △이 드라마 찬(贊)△. JTBC 월화드라마 <눈이 부시게>는 내용적으로나 형식적으로나 드라마 역사에 획을 그은 작품이다. 총 12회 분량이 사전제작 방식으로 만들어진 이 드라마는 10회 마지막 10분에 이르러, 놀라운 반전을 풀어놓는다. 저녁노을이 진 바닷가에서 펼쳐진 환상적인 장면들은 드라마가 10회 동안 보여주었던 모든 장면들의 의미를 완전히 뒤집는다.

판타지 로맨스로 시작하여, 멜로, 코미디, 가족극, 범죄물, 노인활극 등 장르를 자유자재로 넘나들던 드라마는 마침내 짧은 심리스릴러를 경유하여, 엄청난 휴먼드라마로 귀착한다. 영화 <거미숲>이나 <셔터 아일랜드> 등에서나 보았던 ‘반전을 통한 현실과 판타지의 전복’ 이라는 고급한 서사기법을 잔잔한 TV 드라마에서 보게 될 줄 누가 알았으랴. 나름 영화나 드라마의 작법에 익숙하다는 자부심을 가진 시청자들조차 꿈에도 생각지 못한 반전에 뒤통수가 얼얼해지는 충격에 휩싸였다. 하지만 이것은 단지 ‘반전을 위한 반전’이 아니었다. 갑자기 늙어버렸다는 판타지적인 설정을 통해 노인의 내면과 늙음을 성찰해보도록 해온 드라마는, 반전을 통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치매노인의 혼돈된 의식을 체험토록 한다.



◆ 치매노인의 내면으로 들어가다

드라마의 10회는 유난히 튀는 느낌이 강했다. ‘노벤져스’ 라는 우스갯말로 불린 이 회차에서 혜자는 노인들을 규합하여 작전을 펼친다. 흡사 어린이 모험극 <벼락 맞은 문방구>에서 인물들만 노인으로 바뀐 듯한 코믹과 황당함이 가득했는데, 그동안 장르를 오가며 균형을 잘 맞추어 오던 드라마가 균형점을 이탈한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하지만 이것은 흔히 꿈을 깨기 직전 ‘이것은 꿈인가’ 하는 느낌이 오는 ‘소격의 순간’ 이었던 셈이다.

함께 힘을 합쳐 탈출한 노인들은 바다에 가까워지자, 각자 자신들의 젊은 시절을 떠올린다. 이것 역시 반전을 위한 복선이다. 혜자 역시 자신의 젊은 시절을 떠올린다. 그리고 휘청. 저 멀리 부모님, 아니 아들과 며느리가 달려오고, 눈앞에 상복을 입고 아들과 함께 서 있는 젊은 자신을 본다. 배경음악으로 맥스 리히터의 ‘On the Nature of Daylight’ 가 흐른다. (영화 <컨택트>의 주인공이 자신의 삶을 깨닫고 받아들이기로 결심한 순간에 흐르던 곡이자, <셔터 아일랜드>에서 주인공이 아내에 대한 꿈을 꾸었을 때 나왔던 음악이다.) 늙은 혜자는 젊은 혜자와 마주 선다. “젊은 내가 늙은 꿈을 꾼 것인지, 늙은 내가 젊은 꿈을 꾼 건지” 이 짧은 순간의 김혜자의 연기와 각별한 연출은 찬탄이 절로 나온다.



혜자는 어느 날 자신이 젊음을 잃었다고 경악했지만, 그것은 오십여 년간의 기억이 뭉텅 날아가고, 20대 때의 기억과 자아로 돌아간 혜자의 망상이었다. 그는 아들과 며느리를 아빠와 엄마로 오인하며 지냈다. 그러니 이해가 간다. “엄마가 무슨 결정을 하든, 난 엄마 편”이라고 말하는 혜자를 보고, 엄마는 왜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는지. 최근의 기억이 사라지고, 젊었을 때의 기억만 남게 되는 치매 노인들은 흔히 늙은 아들과 며느리를 못 알아보거나 자신이 알던 사람과 혼동하곤 한다. 의문스러웠던 홍보관의 운영방식이나 그곳을 배경 삼아 펼쳐지던 범죄의 상상도 모두 이해된다. 치매 노인들은 학대에 대한 의심을 품거나 탈출의 서사를 꿈꾸곤 하니까.



KBS 드라마 <하나뿐인 내편>에는 며느리를 첩으로, 손자며느리를 자신의 동생으로 오인하는 치매 노인의 소동이 매회 떠들썩하게 펼쳐졌다. 또 영화 <축제>(1996)는 할머니가 나이를 덜어주고 아이로 돌아간다는 동화 같은 이야기가 담겨있다. 하지만 <눈이 부시게>는 치매 노인을 희화화하지도 않고, 낭만화하지도 않는다. 치매 노인을 겉에서 보며 타자화하는 방식이 아니라, 그의 내면으로 들어가 치매 노인이 겪는 혼란스러운 인식을 체험시킨다. 치매 노인을 주체로 놓고 극한의 당사자성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 이것은 여성들의 이야기

<눈이 부시게>는 여성노인 김혜자를 전면에 내세운 드라마답게, 끝까지 여성들의 이야기에 주목한다. 11회에서 조연으로 나온 할머니의 사연은 아들만큼 잘해주지 못한 딸에게 품는 엄마의 미안함을 잘 보여준다. 희생적인 막내 덕에 오빠들은 공부할 수 있었지만, 그들은 끝까지 더 많은 것을 요구한다. “엄마 제사를 모시게 될 아들”임을 강조하면서. 고생만 하다 암에 걸린 딸에게 엄마는 미안함과 애틋함을 느낀다. 치매 노인이 딸의 환영과 마주 앉아 “다음 생에도 내 딸로 태어나 달라”고 말하며 흐느끼는 장면은 찡한 모녀의 정을 느끼게 해준다.

혜자와 며느리의 관계는 또 어떤가. 망상 속에서 며느리를 엄마로 착각할 만큼 혜자는 며느리를 믿고 의지한다. “어떤 결정을 내려도, 나는 엄마 편”이라던 혜자의 말은 곧 “나는 며느리 편”이라는 뜻이었다. 어쩌면 딸 같고, 제자 같은 며느리에게 혜자는 “이제 너만 생각하라”고 말해준다. 언제나 착잡한 얼굴로 엄마를 대하는 아들과 달리, 며느리는 씩씩하게 혜자를 돌본다. 이혼하자는 남편에게 끝까지 시어머니를 돌보겠다며 우긴다. 노고를 알아보고, 서로의 인생을 따뜻하게 보듬는 두 사람은 가부장적 권력을 매개로 하는 일반적인 고부 관계가 아니다. 늙은 여성이 더 늙은 여성을 돕는 보살핌의 연대다.



혜자에게는 오랜 친구들이 있다. 젊은 시절 희로애락을 함께한 친구들은 혜자의 망상 속에서 갑자기 늙어버린 혜자를 가족보다 더 빨리 알아보았다. 친구들은 몸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우정을 이어 나갔는데, 이러한 망상은 친구들이 혜자에게 어떤 존재들인지를 알게 해준다. 드라마는 윤복희와 손숙을 우정 출연시키며, 망상이 아닌 현실 친구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요양병원으로 문병 온 두 친구의 모습은 할머니가 되어서도 유지되는 여성들의 우정을 잘 보여준다.

마지막까지 드라마는 대단히 촘촘하게 여성주의적 메시지를 담는다. 멋지고 사랑스러운 준하이지만, 아버지로서 그는 서툴고 무심한 사람이다. 드라마는 이런 문제를 사소하게 넘기지 않으며, 남자니까 당연하다는 식으로 면죄부를 주지도 않는다. 아이를 보살피는 일이 낯설고, 특히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해 어떻게 아버지 노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준하에게 혜자는 “나도 처음이라 서툴지만 하고 있지 않나. 함께 잘 해나가자.”며 독려한다. 여자는 아이를 낳으면 모성이 본능적으로 주어진다고 믿는 편견을 깨고, 남편을 육아의 주체로 이끄는 장면이다. 준하는 아들을 키우는 노동에 동참함으로써, 아버지로 인해 맺혔던 필생의 심리적 과제를 조금씩 풀어나간다. 아이를 키우는 일이 자신의 결핍을 돌아보게 하고 인격을 성숙시키는데 도움이 된다는 인생의 진리를 자연스럽게 일깨우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남편이 죽은 뒤, 혜자와 아들의 관계는 순탄치 않았다. 아들이 왜 시종 편치 않은 얼굴로 혜자를 대해왔는지를 드라마는 최종회에 이르러 길지 않은 분량을 할애하여 알려준다. 혜자는 어린 아들에게 매정하게 대했다. 사랑하던 남편을 황망하게 보냈으니 혜자도 우울증이 생겼을 것이고, 홀로 아들을 키우기 위해 생계와 가사를 책임지느라 한 치의 여유도 없었을 것이다. 또한 장애를 입은 아들을 강하게 키워야 한다는 압박도 컸을 것이다.

치매에 걸린 후 혜자는 아들을 살갑게 대한다. 아빠라고 부르며 도시락을 싸주고, 사람들 앞에서 편을 들고 나선다. 아들은 뒤늦게 다리가 불편한 자신을 위해 엄마가 눈을 치워주었다는 사실을 알고, 그제야 편안한 얼굴로 엄마를 대한다. 여느 드라마였다면 이런 디테일한 갈등과 회복의 서사 없이 혜자와 아들의 관계를 그냥 화목하게 그렸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드라마는 부모-자식 관계가 그리 단순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늙은 부모에게 느끼는 자식의 감정이 각자 쌓아온 사연만큼 복잡한 결과 두께를 지닐 수 있음을 보여준다.



◆ 거대서사를 끼워 넣는 방식

<눈이 부시게>는 노년을 성찰해보는 보편 서사를 지니지만, 드라마에는 1970년대 사회상과 역사가 그림자로 드리워져 있다. 한편에서는 미니스커트와 “키스는 해보고 결혼해야겠다”는 개방적인 사고가 존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야간통행금지와 무단횡단 단속이 있던 1970년 초의 풍속사를 가볍게 그리는가 싶었지만, 우스꽝스럽던 시대상은 결국 준하의 의문사라는 묵직한 이야기로 이어진다. 유신독재 초기에 일간지 사회부 기자 준하는 이유도 없이 경찰서에 끌려갔다가 풀려나지 못한다. 그리고 며칠 후 화장된 유골의 상태로 돌아온다. 드라마 내내 판타지의 신물(神物)처럼 등장하던 시계는 준하의 결혼예물이자, 돌려받지 못한 유품이었다. 놀랍게도 그 시계는 담당 수사관의 손목에 걸려있었다.

이런 에피소드는 1975년 장준하 선생의 의문사를 연상시킨다. 장준하 선생이 산에서 실족사 했다고 진술한 목격자 김용환씨가 장준하 선생의 시계를 손목에 차고 있었다는 기막힌 이야기가 전해진다. 물론 극중 준하의 삶은 장준하 선생의 삶과 일치하지 않는다. 다만 ‘유신독재 시절에 한 언론인이 당한 의문사와 그의 시계의 행방’ 이라는 모티브를 극에 녹인 것이다. 이는 마치 드라마 속 혜자의 친구에 가수 윤복희를 겹치거나, 단역으로 등장한 중국집 소년에게 이연복 셰프를 연결시키는 것과 비슷하다. 이들의 삶의 궤적이 일치하지 않지만, 그 시대를 대표하는 아이콘을 극 중에 삽입함으로써 시대적 공기와 현실의 맥락을 환기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장치들은 한 사람의 평범한 인생 안에 녹아 있는 거대 서사를 돌아보게 만든다. 80년이 넘도록 살아온 노인의 굴곡진 삶에는 어떤 식으로든 현대사의 모순과 난제가 질곡처럼 녹아 있기 마련이다. 드라마는 한 사람의 구체적인 일생을 통해서 그가 지나온 시대상을 바라보게 하여, 현대사를 치밀하게 이해하도록 돕는다. 유신정권이니 민주화운동이니 하는 것을 거칠게 축약한 서사나 영웅담을 통해 주마간산 식으로 훑는 것이 아니라, 당시를 살아냈고 오늘을 살고 있는 노인들의 구술사를 통해 미시적으로 접근하려는 것이다.

사적인 기억 속에 현대사를 녹여내는 <눈이 부시게>의 담담한 태도는 민주화운동의 전력을 지닌 배우 안내상과 우현의 출연을 통해서도 감지된다. 어깨에 힘을 준 채 거대서사를 논하지 않아도, 평범한 사람들의 삶 속에 녹아 있는 역사를 소소하게 풀어내는 방식으로도 깊이 있는 담론이 가능하다.

어떤 면으로 보든 <눈이 부시게>가 판타지와 현실을 뒤집는 초장르의 고퀼리티 드라마이자, 역사를 다루는 방식까지 올바른 명작임이 분명하다. 김혜자의 감탄스러운 연기와 훌륭한 만듦새로 오랫동안 기억되고 회자 될 것이다.

칼럼니스트 황진미 chingmee@naver.com

[사진=JT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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