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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일’, 세월호 참사에 대해 무감각하게 느끼는 이들에게
기사입력 :[ 2019-04-11 13:35 ]


‘생일’ 상상할 수 있는 최대치의 연기 보여준 전도연·설경구

[엔터미디어=황진미의 편파평론] △이 영화 찬(贊)△. (본문 중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실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죽은 사람을 애도하기 위해서는 흔히 제사를 지낸다. 생일을 챙기는 경우는 위대한 사람의 탄신을 기릴 때 정도이다. 그런데 세월호 아이들을 기리기 위해, 생일이 치러진다. 왜 이런 행위가 필요했을까. 제사로는 개별적인 애도가 불가능하고, 여전히 현재형인 사건이어서 충분한 애도가 이루어지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요컨대 이들을 모두 4월 16일에 뭉뚱그려 추모해버리고 마는 것은 개별적인 한 사람을 온전히 추억하는 일이 되지 못한다. 더욱이 아직 진상규명도 되지 않았으니, 죽은 아이들을 놓아주는 장례가 완료되지도 않았다. 그러니 아이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이들이 존재의 개별성을 상징하는 날이자 생전 행위의 연장인 생일에 모여 그를 추억함으로써 애도를 꾀한다. 제사를 불가능한 탓에, 생일이 요청된 것이다.



◆ 최고의 캐스팅, 최적의 감독

영화 <생일>은 세월호 참사로 아들을 잃은 가족의 상흔을 들여다본다. 적절한 애도로 망자를 떠나보내지 못한 이들이 부서진 가슴을 안고 하루하루 버티다가, 생일 행사를 통해 가까스로 애도에 도달한다. 영화는 너무 밀착되지 않는 카메라의 거리를 두고 유족의 일상을 바라본다. 영화는 초반부에 최대한 감정을 절제하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감정을 고조시킨다. 마지막 30분이 넘는 롱테이크로 찍은 생일 행사 장면은 한편의 해원 굿처럼 응축된 감정을 풀어낸다.

<생일>은 세월호 참사를 그린 첫 상업영화로 부담감이 없지 않겠지만, 최고의 캐스팅을 통해 부담감을 덜어낸다. 전도연과 설경구은 관객들을 극장으로 끌어들일 스타일 뿐 아니라, 가장 배역을 잘 소화할 배우이다. 전도연은 <밀양>에서 아들을 잃고 정신이 살짝 나가버린 역할을 연기했었고, 설경구도 <소원>에서 아이에게 닥친 불행으로 가족과 심리적인 거리가 생긴 아버지가 가족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분투하는 연기를 보인 적이 있다. 게다가 두 사람은 커플로 합을 맞춰본 경험도 있다.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에서 두 사람은 자연스러운 생활연기로 일상의 감정들을 표현했었다. 이런 두 사람이 주연을 맡았으니, 만듦새는 보장받은 것이나 다름없다. 과연 두 사람은 과하지 않은 연기로 상상할 수 있는 최대치의 연기를 보여주었다.



<생일>을 찍은 이종언 감독은 영화 <여행자><밀양><시> 등의 연출부로 일했던 여성감독이다. 2015년부터 안산의 ‘치유공간 이웃’에서 자원봉사를 하면서 유가족의 곁을 지키며, 아이의 생일 모임을 돕고 참여했다. 이종언 감독은 2017년에 세월호 아이들의 친구들을 찍은 다큐멘터리 <친구들: 숨어있는 슬픔>(2017)을 만들기도 했다. 이런 감독의 경험은 유가족들에 대한 대단히 사실적인 묘사가 가능하도록 하였다. 한사코 생일을 하지 않겠다는 순남, “저만 유가족이야?” 되묻는 유족들 사이의 온도차, 보상금을 둘러싼 감정의 골과 사회적 힐난 등은 유가족들을 곁에서 보아왔던 감독이기에 담아낼 수 있는 디테일이다.



◆ 망가진 공동체, 치유와 회복

영화 <생일>은 불신과 균열의 지점을 잘 드러내 보인다. 생존학생들의 대학등록금을 지원한다는 뉴스에 많은 악플이 달릴 것이라 염려하는 말이나, 유가족을 돕는 사람을 향해 “나라에서 해주는 것도 아닌데, 무슨 꿍꿍이가 있을 것”이라고 불신하는 것은 국가가 공동체의 기능을 수행하지 못할 때, 사회의 연대적 기능마저 파괴되고 시민들 간의 신뢰도 훼손된다는 점을 보여준다. 세월호 참사 당시 국가는 피해자들의 상처를 보듬지 못했을 뿐 아니라, 여론조작으로 이간질을 시킴으로써 시민적 공동체를 파괴하고 사회적 가치를 짓밟아 버렸다,

남은 이들은 상처로 인해 서로에게 또 다른 상처를 입히기도 한다. 아들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순남은 애꿎은 어린 딸에게 “오빠는 이것도 못 먹는데, 넌 반찬투정이냐”며 현관 밖으로 내쫓고, 큰일을 겪을 때 곁에 없었던 남편에게 모진 말을 퍼붓는다. 수호의 단짝 친구였던 성준은 길에서 순남을 보고 피한다. 수호 대신 생존한 소녀는 성준이 자기를 알아보자 화들짝 불쾌해한다.



이런 상흔을 지닌 이들이 한자리에 모여 수호에 관한 자신의 기억과 감정을 털어놓는다. 눈치 없이 친구 집 우유를 많이 축냈다는 하찮은 일화부터 친구를 대피시키고 자신은 빠져나오지 못했다는 장렬한 최후까지 자기 기억 속에 빚으로 남아있는 수호에 대해 풀어놓는다. 이처럼 고인을 아는 사람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추모 행위를 통해 진정한 애도에 도달하고, 비로소 화해와 회복의 길이 열리는 치유의 경험을 하게 된다.

영화 속 생일 행사는 해원 굿과 다르지 않다. 특히 마지막에 들려준 시인의 시는 빙의된 샤먼이 망자의 말을 1인칭으로 들려주는 것과 같은 영험을 지닌다. 즉 망자의 넋을 눈앞에서 대면하는 듯한 효과를 통해, 그동안 망자에 대해 품고 있던 미안함, 서운함, 안타까움, 애착 등 정리되지 못한 감정들과 마주하게 된다. 이런 대면을 통해 정서적인 이별이 가능해지는데, 갑자기 사라져버린 망자를 불러들여 짧게 재회하고 정리된 방식으로 이별함으로써, 가닿을 수 없었던 감정들을 회수하고 허공에 뭉쳐있던 감정의 실타래로부터 놓여나는 것이다.



여기서 정일은 “수호가 왔었어요.” 라는 말을 내뱉으며 오열한다. 앞서 “갑자기 왜 왔냐. 보상금 때문에 왔냐?”는 순남의 말에 정일은 참혹해할 뿐 아무 대답도 못했지만, 그를 집으로 오게 한 것은 수호의 령이었다. 정일은 시종 이성적인 태도를 유지하며, 수호가 마치 살아있는 듯 행동하는 순남을 이상하다고 여겨왔다. 하지만 생일 행사를 반대하는 순남에게 “그날 수호도 올텐데”라는 어울리지 않는 말을 던지기도 한다. 정일이 오열하며 털어놓은 고백은 그도 수호를 초현실적으로 접하고 있었지만, 그런 말을 차마 해서는 안 된다는 이성의 억압에 시달려 왔다는 방증이다.



◆ 외부자이자 아버지라는 존재

영화 <생일>은 ‘아버지이자 외부자’인 정일을 관찰자의 위치에 둔다. 참사 후 2년이 지난 뒤 집에 온 정일은 이사한 집을 가까스로 찾고, 어린 딸과 서로 알아보지 못한다. 그는 가족에게 외부자와 다를 바 없지만, 아버지라는 특권적 지위로 인해 집안 구석구석을 들여다보게 된다. “순남이 좀 이상해진 것 같지 않냐?”고 묻는 정일은 시누이나 옆집 여자보다도 순남에게 정서적으로 먼 존재이다. 영화는 낯선 존재로 집에 들어온 정일이 이질감과 간극을 메우기 위해 노력하며 서서히 가족으로서 자리를 찾아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상한 구석이 있다. 순남과 정일의 정서적 거리가 한 눈에 가늠되지 않는다. 정일이 없는 3인 가족사진이나, 현관문을 열어주지 않는 순남의 행동은 두 사람이 서류상의 이혼만 하지 않았을 뿐 남이나 마찬가지인 부부처럼 보이게 한다. 하지만 순남이 시누이와 가깝고, 시가의 제사를 모시는 것을 보면 이혼 직전 상황이라 보기도 힘들다. 정일이 돈을 벌기 위해 베트남에 갔다가 인명사고로 가족과 만나지 못하는 시간이 길어졌고, 정서적인 거리감이 생긴 상태에서 참사까지 겪으면서 순남의 마음속에서 정일이 완전한 남처럼 느껴지게 되었다는 것을 애써 가늠해볼 수는 있지만, 여전히 석연치 않은 점들이 있다.



정일이 베트남에서 겪었다는 사건도 사람이 죽은데다 3년이나 억울한 옥살이를 하였으니 결코 간단한 간단치가 않다. 하지만 영화에서 그 사건은 대단히 편의적으로 언급된다. (6천 만 원이나 돈을 빌려줄 만큼 가까운 숙부가 수 년 만에 귀국한 정일에게 베트남 사건은 전혀 묻지 않고 “넌 완전히 온 거냐?”고 묻는데, 이는 정일이 사건이 해결된 뒤에도 한동안 베트남에 머물렀음을 짐작케 한다. 즉 정일은 석방되자마자 달려온 것이 아닌데, 그렇다면 그 사이 정일과 순남은 어떤 연락상태에 놓여있었을까. 정일의 연락을 순남이 계속 무시하고 있었던 걸까.) 영화는 매끈하게 이해되지 않는 사연을 밀어 넣으며, ‘외부자이자 아버지’라는 존재를 관찰자의 위치에 두는데, 이처럼 애매한 설정은 무엇 때문에 필요했던 걸까.

물론 외부자의 시선을 지닌 채 유가족의 집안에 들어갈 수 있는 관찰자가 관객을 유가족의 세계로 이끌 것이라는 의도가 선명하게 감지된다. 하지만 ‘외부자이자 아버지’가 필요했다 하더라도 정일에 대한 설정은 군더더기가 너무 많다. 차라리 이혼으로 헤어졌던 아버지가 참사 후 다시 가정을 찾는 것이 훨씬 매끄러운 설정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무고한 외부자’가 아니게 된다. 즉 “그런 일을 겪을 동안 당신은 어디에 있었느냐?”는 질문에 ‘외국의 감옥에 있었다’고 대답할 수 있는 정일의 특수한 상황이 필요했던 것이다.



대한민국의 사람 중 세월호 참사에서 ‘무고한 외부자’가 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모두가 참사를 실시간으로 목격했으며, 유가족들이 어떤 모욕과 수난을 겪었는지 모두 알고 있다. 참사 당시 다함께 울었고 다 같이 분노했다. 다만 몇 년이 지난 뒤, 몇몇은 유가족의 곡소리를 듣고 진저리를 치는 옆집 소녀의 위치에 놓이고, 그보다 많은 사람들이 곡소리를 최대한 못 듣는 척 먼 산을 바라보는 이웃 주민이 되거나, 아주 드물게는 진짜로 달려와 안아주고 약을 챙겨주는 옆집 아주머니의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요컨대 정일의 존재는 도달할 수 없기에 가상으로 설정해야 했던 ‘무고한 외부자’로, ‘면피의 알리바이’를 지닌다. 즉 세월호 참사에 대해 무감각하게 느끼는 관객들에게 정일과의 동일시를 통해 죄책감을 덜어주려는 장치이다. 정일이 참사 당시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외국에 있었고 이제야 집에 돌아온 것처럼, “세월호 참사의 외부자처럼 느끼는/느끼고픈 당신도 어떤 피치 못할 사연이 있었겠지요. 그 사연이 무엇인지 묻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그런 외부자의 눈으로 유가족의 삶을 들여다보니 어떠신가요? 이제라도 당사자의 아픔을 이해하고 그들에게 도움이 되는 행동을 함으로써 가정 혹은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것이 관계회복의 길 아니겠어요?” 라고 묻는 듯하다.



<생일>은 세월호 참사가 희생자의 가족과 친구들에게 무엇을 앗아가고 어떤 상흔을 남겼는지를 사실적으로 그린다. 그리고 제대로 된 애도 행위를 통해 이들의 상처가 조금이나마 치유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생일을 치른 뒤에도 순남은 수호의 방을 치우지 않는다. 상처는 오래도록 아물지 않을 것이고, 때로 덧날 것이다. 그러나 생일 행사가 그러했듯이, 이들의 상실을 보듬는 사회적인 애도가 이루어진다면 이들도 멈춰진 시간에서 한발 내디딜 수 있을 것이다.



칼럼니스트 황진미 chingmee@naver.com

[사진=영화 <생일>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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