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나들’ 전에 없던 짝꿍을 만나, 전에 없던 예능이 왔다

[엔터미디어=TV삼분지계] ◾편집자 주◾ 하나의 이슈, 세 개의 시선. 각자의 영역을 가지고 대중문화와 관련된 글을 쓰고 있는 정석희·김선영·이승한 세 명의 TV평론가가 뭉쳐 매주 한 가지 주제나 프로그램을 놓고 각자의 시선을 선보인다. 엔터미디어의 [TV삼분지계]를 통해 전문가 세 명의 서로 다른 견해가 엇갈리고 교차하고 때론 맞부딪히는 광경 속에서 오늘날의 TV 지형도를 그려볼 수 있는 단초를 찾으실 수 있기를.

일요일 저녁 7시는 각 방송사가 가장 힘주어 미는 예능을 선보이는 프라임 타임 중에 프라임 타임이다. 그런 시간에 노년 여성들이 한글을 배우고 쑥 버무리를 만들어 먹는 과정을 느릿느릿하게 담아낸 예능을 선보인다는 건 셋 중 하나일 것이다. 아예 그 시간대를 포기했거나, 그만큼 절박하게 새로워지고 싶거나, 아니면 그만큼 작품에 자신이 있거나. MBC가 새로 선보인 파일럿 예능 <가시나들>은 이 중 어느 쪽일까? 뚜껑을 열기 전까지만 해도 새로워지고 싶다는 의지의 표명인 줄 알았는데, 뚜껑을 열고 보니 자신감의 표현이었지 싶다. 경상남도 함양의 ‘문해 학교’를 찾아가 한글을 배우는 다섯 노년과 함께 교과서를 펼친 이 용감한 예능은, 별 다른 자극적인 요소 없이도 첫 방송만으로 압도적인 지지를 모았다.

정석희 평론가는 <가시나들>이 기존 예능이 다루지 않았던 새로운 소재와 인물들을 발굴해 ‘청정’한 즐거움을 준 점을 높게 평가하며 작품이 ‘어마어마하게 잘’ 되기를 기원했고, 김선영 평론가는 <가시나들>이 지방의 노년 세대를 다뤘던 다른 예능들과 비교해 <가시나들>이 한층 더 성숙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는 점을 높게 평가했다. 이승한 평론가는 처음 언어를 획득한 노년 여성들에게 함부로 ‘틀렸다’ 말하지 않는 <가시나들>의 세심함에 주목했다. 다음은 세 평론가들의 첫 수업참관기다. 주목한 부분은 각자 달라도, 셋 다 다음 수업을 기쁜 마음으로 기다린다.



◆ 느려도 지루할 틈 없는 새 예능이 오다

요즘 어디에서든 방송 얘기가 나오면 기다렸다는 듯이 한 마음 한 뜻이 된다. 먹고 마시고 놀며 돌아다니는 프로그램에 질렸다는 소리와 이 넓은 세상에 재미있는 사람, 흥미진진하고 유익한 이야기들이 얼마나 많은데 왜 늘 그 나물에 그 밥이냐는 지적이다. 이렇게까지 질색들을 하는데 고집불통 모양 미련을 못 버리는 방송사들. 자기들끼리 딴 세상에 사는 건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방송이 도덕 교과서도 아니고 따라서 윤리적일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한 채널 당 단 하나만이라도 가슴을 울리고 적시는 프로그램이 나와 주면 좋겠다는 얘기들도 한다. 여럿이 뜻을 모아 바라면 이루어진다더니 드디어 MBC에서 마음에 꼭 드는 프로그램이 나왔다.



배우 문소리 씨가 ‘문해학교’ 교실에 들어서며 시작된 <가시나들>은 딱히 진행자가 있지도 않고 역할 분담도 없었다. 출연자 모두가 학생이자 선생이었다. 한글 교실 짝꿍끼리 누군가는 한글 맞춤법과 영어 단어를 가르쳐주고 누군가는 꽃 이름, 풀 이름을 가르쳐주고, 길든 짧든 서로의 삶 속에서 지혜를 얻어간다. 나도 <가시나들>을 보고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글을 모르면 버스도 탈 수 없다는 걸.

서로 하겠다고 걸레를 뺏고 뺏기며 옥신각신하는 짝꿍이 있는가 하면 ‘책상만 보고 있어서 속상했다’며 기운을 북돋아주는 짝꿍도 있었다. 17년 전 김혜수 주연의 드라마 <장희빈>을 보는 어르신이 계셨나 하면 프로레슬링을 즐겨보는 어르신도 계셨다. 하나 같이 이제껏 본 적이 없는 새로운 장면들이다. 과도한 자막과 괜한 설정, 제작진의 참견이 눈에 띄지 않아 좋았고, 조용하고 느린 화면이었지만 전혀 지루하지가 않았다. 벌써 끝났어? 하고 놀랐으니까. <가시나들>이 어마어마하게 잘 되어 ‘청정’이 방송 트렌드가 되었으면.

정석희 방송 칼럼니스트 soyow59@daum.net



◆ 새로운 짝꿍을 만났다, 새로운 세상을 만났다

경남 함양 문해 학교, 박무순과 이남순, 두 단짝 학생은 처음으로 떨어져 앉았다. “내가 그 옆으로 가야 마음을 놓을 긴데.” 한 문장에 두 사람의 삶과 관계가 그대로 담겨 있다. 교사 문소리가 곧 새 짝꿍이 올 거라고 그들을 안심시켰다. 그 말대로 뒤이어 교실로 들어온 20대 청년 다섯. 작은 마을에서 수십 년 동안 서로를 의지하던 7, 80대 노년 여성들은 그렇게 새로운 짝꿍을 만났다.

<가시나들>이 좋았던 것은 기존의 예능이 지방의 노년 세대를 그리던 방식과 전혀 다른 접근법을 택했다는 점이다. 가령 5명의 연예인이 시골의 노년 부부를 찾아가 그들의 자녀가 되어 함께 생활한다는 작위적인 가족 코드를 내세운 MBC <사남일녀>나, 문화 불모지에 영화를 상영한다는 좋은 취지에도 노년 세대는 수동적 관객의 자리에 머물렀던 KBS <절찬상영중>처럼, 그나마 소외된 지방 노년층에 주목했던 프로그램들도 그들을 ‘공경해야 하는 시골 어르신’ 이상으로 그리지 못했다.



이와 달리 <가시나들>은 노년층과 청년층을 함께 배우고 소통하는 교우 관계로 바라본다. 예컨대 ‘애기 짝꿍’들이 좀 더 능숙한 한글 사용자로서 어른들을 돕는 입장이라면, 한글을 천천히 배워가는 ‘어른 짝꿍’들은 젊은 세대가 이른 나이에 의무적으로 배우느라 미처 깨닫지 못했던 공부의 근본적 의미를 깨우쳐 준다. 아들네 집에 혼자 전화하기도 힘들었다는 이남순 씨가 한글을 배우고 전화기의 글자를 직접 하나하나 누르면서 “글이 참 신기한 기라”고 소회를 밝히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그들에게 글이란, 전에는 혼자 만날 수 없던 세상을 연결해주는 통로다.

지방, 노년, 여성으로 사는 동안 점점 좁아질 수밖에 없었던 세계가 확장되는 계기. 지방의 노년 여성의 삶에 대한, 그래서 더 가치 있는 글자 공부의 의미에 대한, 이보다 더 정확한 통찰이 있을까. 새로운 짝꿍과의 만남도 그러하다.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돕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 <가시나들>은 어른 짝꿍들에게도, 애기 짝꿍들에게도, 그리고 시청자들에게도 또 다른 세상을 만나는 기회를 마련해준다.

김선영 칼럼니스트 herland@naver.com



◆ “내일 학교 가면 우리 당당하게 합시다. 알겠죠?”

의성어와 의태어를 배우는 시간, 개들이 어떻게 짖냐는 교사 문소리의 질문에 ‘어른학생’들은 “공공 짖는다”고 말한다. 굳이 정답을 찾자면 ‘월월’이나 ‘멍멍’쯤 되겠지만, MBC <가시나들>은 이를 정정해주는 대신 함양에서 개는 ‘공공’하고 짖는다고 결론을 내리는 쪽을 택한다. 남들보다 다소 늦게 한글을 배우기 시작한 노년 여성들을 일방적으로 가르쳐야 할 대상으로 보는 게 아니라, 관점을 공유하며 함께 배워 나갈 상대로 바라본 결과일 테다.

글을 모른다는 것은 세상을 독해할 수도, 세상에 제 목소리를 던질 수도 없는 고립 상태를 의미할 것이다. <가시나들>은 그 상태를 깨고 나온 이 용감한 노년 여성들을 쉽게 동정하지도(“어르신들의 삶이 너무 불쌍해”), 쉽게 무시하지도(“한글 처음 배우면서 저런 실수하시는 거 너무 귀엽죠?”) 않는다. 대신 그들이 처음 획득한 언어로 그들이 바라본 세상을 번역하는 걸 담담하게 지켜본다. “할머니, 된장찌개 이런 거 끓이잖아요. 그러면 어떻게 끓어요?” 의태어 ‘보글보글’이란 대답을 듣고 싶은 애기짝꿍 이브의 질문에, 어른짝꿍 이남순 학생은 자신이 아는 가장 정확한 답을 한다. “파도 옇고…(파도 넣고…)” 교과 과정이 원하는 답은 아니지만, <가시나들>은 그걸 뚝 잘라 ‘오답’이라고 말하는 대신 이렇게 자막을 넣었다. ‘정확한 묘사’.



함부로 틀렸다 말하지 않는 태도는 중요하다. 일평생 글을 모른다는 이유로, 여자라는 이유로, 집에서 살림을 한다는 이유로, 끊임없이 발언권을 침해당했을 노년 여성들이 혹시라도 주눅 들어 다시 익숙한 침묵 상태로 돌아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가시나들>은 그들이 제시한 답이 그들에겐 정확한 답이라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남순 학생과 함께 쑥을 다듬으며 이브가 건넨 말이야 말로, <가시나들>의 메시지를 함축한 한 마디일 것이다. 주눅 들지 말고, 더 당당하게 세상에 자신의 목소리를 내라는 응원 말이다.

“할머니 자신감을 가져. 아까도 할머니 내 속상했던 게 뭔지 알아요? 수업할 때 할머니가 자꾸 책상만 보는 거요. 할머니가, 어? 다른 할머니보다 얼굴도 예쁘고, 꿀릴 거 하나도 없고, 머리도 똑똑하고. 자꾸 할머니 책상만 보니까 내가 속상해가지고. 내일 학교 가면 우리 당당하게 합시다. 알겠죠?”

이승한 칼럼니스트 tintin@iamtintin.net

[영상·사진=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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