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이 스토리4’, 이것은 버려진 것들에 대한 헌사다

[엔터미디어=황진미의 편파평론] △이 영화 찬(贊)△. (본문 중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실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이것은 버려진 것들에 대한 헌사이다. <토이 스토리4>는 전편의 세계관을 구성하고 있던 가치를 내려놓으며 확장된 가치관을 보여준다. 요컨대 인간의 사랑을 갈구하는 장난감의 처연하고도 멜랑콜리 한 애착은 더 이상 없다. <토이 스토리4>는 사랑받음의 욕망에서 벗어난 주체의 호방한 자유를 보여주며, 전편에서 가장 수동적인 존재로 묘사되었던 보핍을 전면에 내세워 그러한 주체를 구현함으로써, 전편들이 속해있던 남성 중심적 세계관을 완전히 뒤집는다.



◆ 시리즈의 원칙에서 벗어난 확장된 세계관

그동안 <토이 스토리> 시리즈가 펼쳐놓은 세계관의 원리는 2가지였다. 첫째는 사람들이 보지 않는 사이를 틈타 장난감들은 자신들끼리 움직이고 말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장난감들은 아이들의 사랑을 영원히 갈구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세계관을 바탕으로, 1편은 아이의 사랑을 두고 벌이는 장난감들 사이의 질투와 우정을 보여주고, 2편은 아이에게 잊힌 장난감의 운명을 그렸다. 또한 3편에서는 아이가 자라면 장난감은 어디로 가야하는지를 되물었다. 앤디의 장난감들은 모험을 벌이며 악당들을 만났는데, 이들은 모두 아이와 장난감 사이의 그릇된 관계 설정과 연관이 있다. 가령 장난감을 파괴하며 노는 아이, 장난감을 전시용으로 삼아 돈벌이를 하려는 자, 주인에게 버림받은 원한으로 삐뚤어진 인형 등이다.



이 세계관 안에서 장난감은 아이의 손길에 의해 ‘마치 내 몸이 움직이는 것 같은’ 활력을 부여받으며, 그 추억을 평생토록 간직한 채 그리워한다. 장난감에게 아이는 행복의 원천이자 존재의 근거라는 점에서 아이와 장난감의 관계는 신학적 관계를 연상시킨다. 신학적 세계관에서 ‘신(로드, 주인)이 없는 인간’이 그러하듯이, 이 세계관에서 가장 불행한 장난감은 주인 없는 존재이다. 즉 주인에게 버림을 받았거나, 애초에 주인에게 사랑받은 기억도 없는 장난감 말이다.

<토이 스토리 4>는 앞의 이러한 전제를 상당부분 해체한다. 첫째, 인간의 눈이 없는 곳에서만 움직일 뿐 인간이 있을 때는 죽은 척 움직이지 못했던 장난감들이 인간에게 목소리를 내고 인간의 움직임에 개입한다. 제시가 내비게이션 목소리를 내서 운전자를 교란하고, 장난감들이 브레이크를 눌러서 차를 세운다. 이것은 규칙 위반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두 번째 원리를 파괴하기 위한 전초 작업이다. 둘째, 장난감은 인간의 사랑을 갈구하지 않고 독립적인 주체로 살아갈 수 있다. 9년 만에 만난 보핍은 인간의 사랑에 연연하지 않고, 주인 없는 장난감으로 씩씩하게 살아간다. 그에게는 버려진 존재라는 자의식이 없다.



물론 4편에도 전편의 세계관을 대변하는 존재가 등장한다. 개비개비는 사랑을 갈구하기에 악역이 된 전형적인 존재이다. 그림책을 펴놓고 차 마시기 역할극을 연습하며 혼자 망상에 빠져드는 개비개비의 모습에서는 히스테리적인 섬뜩함이 느껴진다. 그는 불량품으로 태어나 주인의 선택을 받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목소리를 고쳐 주인의 사랑을 받겠다는 일념으로, 급기야 우디의 소리상자를 빼앗는다. 하지만 온전한 목소리를 가져도 하모니의 선택을 받지 못한다. 이것은 애정을 갈구하는 수동공격형 인물에게 엄청난 원한과 자기존재의 부정을 안기는 일이다.

낙담한 그에게 보핍은 “아이들은 많다”라는 조언을 들려준다. 좁은 골동품 가게를 떠나, 넓은 세계로 나온 개비개비는 하모니가 아닌 다른 아이의 장난감이 된다. 그것도 주인의 사랑을 받기보다 자신이 아이에게 사랑을 주는 존재가 되는 방식으로. 인간의 선택을 받거나, 인간에게 잊히고 버려지는 슬픈 존재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자신이 도움을 줄 수 있는 아이를 찾아 나서고 그의 곁을 지킴으로써, 아이와 사랑을 주고받는 장난감이 되어야 한다는 자신이 믿는 소명을 완수한다.



◆ 여성, 강인하고 자족적인 존재로 거듭나다

보핍은 주인을 필요로 하지 않는 독립적인 존재라는 점에서 근대의 무신론적 자유인을 연상시킨다. 또한 그가 가장 극적인 변신을 거친 여성이라는 점에서, 남성을 필요로 하지 않는 페미니즘적 주체가 연상되기도 한다. 보핍은 전편에서 긴 치마를 입은 양치기 처녀로 잠깐 등장했다. 보핍은 모험을 떠나는 우디에게 용기를 북돋으며 환송하고, 모험을 마치고 돌아온 우디를 자랑스럽게 맞이했다. 이것은 여성인 보핍에게 가장 바람직한 역할인양 요구되었던 모습이다. 보핍 뿐만 아니라 포테이토 부인 역시 먼 길을 떠나는 남편에게 바리바리 물건들을 싸주며 환송하는 것이 유머로 쓰였다.

모험을 떠나는 것은 남성이거나 남성인지 여성인지 불확실한 캐릭터들의 몫이었다. 여성임이 분명한 존재는 이들의 모험을 응원하며 환송하고 무사 귀환을 가슴 졸이며 기다렸다가 두 팔 벌려 맞이하거나 키스해주는 존재로 그려졌다. 2편에 등장한 제시는 활달한 카우 걸이었지만, 자신과 세트를 이루는 우디를 자신의 불행을 막기 위해 붙잡는 존재였다. 그리고 무수한 바비들이 친절을 장착한 나레이터 모델처럼 등장했다.



전편의 보핍은 그동안 할리우드 영화에서 정형화되었던 기품 있는 조력자의 역할에 딱 맞아떨어지는 캐릭터였다. 그에게 다른 모습이 있을 것이라고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하지만 9년 후 그는 완전히 달라져있다. 긴 치마를 벗어서 망토로 두르고, 스컹크 차를 타고 다닌다. 작전을 짜고 남성 캐릭터들을 조련하고 지휘한다. 소심한 우디를 설득하고, 순진한 듀크를 북돋워 불가능해 보이던 작전을 수행하게 한다.

가히 용기와 지략을 갖춘 명장인데다, 개비개비와 우디에게 꼭 필요한 조언을 해 줄 만한 덕장의 면모까지 갖추었다. 그는 자족적이다. 팔이 떨어지는 부상에도 아무렇지 않게 스스로 고친다. 다른 장난감의 애정도 인간의 애정도 필요로 하지 않을 만큼 강인하고 초연한 존재이다. 그의 놀라운 변신은 지금 사회에서 요구하는 삶을 살고 있는 여성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깨달음을 통해 얼마든지 제2의 인생을 살 수 있음을 시사해준다.



보핍 뿐이 아니다. 보니의 집 장난감들 사이에서 리더는 여자 봉제 인형이었다. 우디는 여전히 자신이 리더라고 착각하는 존재였다. 또한 개비개비 역시 히스테리적인 욕망을 가지고 있을지언정, 골동품 가게에서 벤슨들을 조종하는 위치에 있었다. 요컨대 4편에서 주체적인 행동을 하는 인물들은 거의 여성이었다. 주인공처럼 보였던 우디는 다소 현실 인식을 결여한 채 우왕좌왕하는 인물에 가까웠다. 우디는 앤디의 ‘최애’ 장난감이었을 뿐 보니에게는 선호도가 한참 밀리는 장난감이었다.

또한 보니에게는 원래 보니가 가지고 있던 장난감들이 있었기 때문에 정치력을 얻을 수 없었다. 우디는 자신이 선택받지 못하고 동료들로부터 대접받지 못하는 상황의 우울을 견디다가, 보니의 보호자임을 자처하며 유치원까지 따라가는 무리수를 둔다. 충족되지 못한 자의식의 정신 승리적 발로였지만, 그의 오지랖은 결국 포키를 탄생시키고 그를 보호하는 것으로 나아간다.



◆ 버려진 것들, 쓰레기

포키는 쓰레기통의 재활용품으로 만든 장난감이다. 유치원에 간 첫날, 보니가 (우디의 숨은 조력을 받아) 만들었다. 보니의 집에 온 포키는 자신을 맞이하는 장난감들을 보고 “쓰레기인가?” 묻는다. 그리곤 쓰레기통으로 직행한다. 자꾸만 쓰레기통을 향하는 포키에게 우디는 “넌 쓰레기가 아닌 장난감”이라고 주입하며 설득한다. 보니가 가장 사랑하는 장난감인 포키를 지키기 위해서다. 보니가 잃어버린 포키를 찾아주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우디는 포키에게 “쓰레기”라는 의미가 우리의 통념과 사뭇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

쓰레기에서 태어났으며, 쓰레기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포키에게 “쓰레기”는 쓸모없고 하찮고 불결한 물건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따뜻하고 편안하고 안전한 것”이다. 그가 쓰레기통으로 몸을 던지던 것은 낮은 자존감으로 인한 자멸의 몸짓이 아니라, 그저 행복을 추구하려는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그는 자신이 “보니의 쓰레기”임을 깨닫고 뛸 듯이 기뻐한다.

블랙코미디 같은 이 장면에는 굉장한 역설이 담겨있다. 쓰레기로 만든 포키가 가장 사랑받는 장난감이 된 것도 역설적이거니와, 포키가 지닌 쓰레기라는 정체성이 무가치함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친근함을 뜻한다는 것도 역설적이다. 이중의 역설을 통해 애니메이션이 강조하려는 뜻이 “버려진 것들에 대한 헌사”가 아니고 무엇이랴.



쓰레기로 만든 장난감이 가장 소중한 장난감이 되고, 골동품의 가치를 지닌 장난감들이 주인의 손을 벗어나 자유롭게 살거나 스스로 주인을 찾아 새 주인의 품에 안긴다. 주인의 손을 벗어난 길 위의 장난감은 쓰레기로 여겨지기 십상이다. 하지만 <토이 스토리4>는 그렇지 않음을 역설한다. 인간이 무엇이라 생각하든 그들 역시 독자적인 사물로 존재하거나, 길에서 주은 장난감으로서 새로운 쓰임을 얻는 것이다. 주인에게 버려짐으로써 장난감에서 쓰레기로 전락하는 일방통행적인 가치의 흐름이 아니라, 쓰레기에서 장난감으로 재탄생하거나 재전유 되는 재활용의 순환이 존재하는 것이다.

애니메이션의 어원이 애니미즘에 있음을 가장 잘 보여주는 <토이 스토리>시리즈는 4편을 통해 인간에게 종속적이던 장난감을 존재론적으로 독립시켰을 뿐 아니라, 버려지는 것들의 종말론적인 운명을 재활용을 통해 순환론적으로 확장시켜낸다. 점점 더 깊어지고, 점점 더 넓어지는 세계관에 지지를 보낼 수밖에 없다.



칼럼니스트 황진미 chingmee@naver.com

[사진=영화 <토이 스토리4>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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