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충’, 기생 관계의 비극에 담긴 날카로운 현실 비판

[엔터미디어=정덕현의 그래서 우리는] (본문 중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실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이제 곧 1천만 관객을 달성할 것으로 보인다. 현재까지 누적 관객 수는 993만여 명. 1천만 관객까지 채 7만 명이 남지 않은 상황이다. 물론 1천만 관객이라는 수치가 그리 중요한 일은 아닐 게다. 그것보다 중요한 건 이 영화에 대해 대중들이 아낌없는 열광을 보냈다는 사실이다.

사실 <기생충>은 기분 좋은 영화라고 볼 수는 없다. 제목부터가 기생충이다. 그것이 상징하는 바는 반지하와 그보다 못한 지하로 대변되는 서민들의 삶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쩌다 부자에 기생해야 생존할 수 있는 현실. 거기에 ‘충’이라는 다소 불편한 어감의 단어가 붙어 있으니 이 영화를 관람한 대다수의 서민 대중들에게 이런 현실을 마주한다는 사실이 기분 좋을 리가 있을까.

하지만 이 우울한 이야기를 보는 관객들은 의외로 빵빵 터졌다. 물론 후반부로 치달으면 그 비극적 상황을 공감하며 우울한 현실을 실감하게 되지만, 초중반까지 영화는 시종일관 경쾌하고 발랄한 풍자적 웃음을 뿌렸다. 신기한 일이지만 관객들은 이 우울한 이야기를 즐기고 있었다.



이게 가능했던 건 영화의 시점이 기택(송강호)네 가족에 맞춰져 있어서다. 반지하에서 살아가는 그들이 장남 기우(최우식)가 가짜 명문대 졸업증을 갖고 박사장(이선균)네 고액 과외로 들어가게 되고, 그 후 한 명씩 차례로 그 집에 기택네 가족들이 들어가는 과정은 흥미진진하다. 그것은 씁쓸하면서도 공감하게 되는 면이 있다. 우리가 사는 모양이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영화는 박사장네 집 사람들이 그어 놓는 ‘보이지 않는 선’을 통해 묘한 긴장감과 대결의식을 만들어낸다. 즉 박사장은 자신들과 반지하에 사는 이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분명한 선이 있고, 그 선을 넘어 들어오는 건 용납하지 못하는 인물이다. 하지만 그 선을 스멀스멀 넘어들어가는 기택네 가족의 ‘냄새’는 그래서 관객들에게 묘한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저들이 그어놓은 경계에 대한 반감 같은 것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영화 <기생충>은 박사장네 집에 기생하게 되는 기택네 집 사람들의 이야기로 흘러가지만, 뒷부분으로 가면 누가 누구에게 기생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상황을 보여주기도 한다. 박사장네 가족이 집을 비운 사이, 온전히 그 집을 자기 것처럼 차지하는 기택네 가족의 모습이나 사실 그 집 지하에 숨어 지내고 있던 문광(이정은)과 그 남편의 모습은 거꾸로 이들이 숨어 지내는 곳에 박사장네 가족이 얹혀 지내는 것만 같은 관계의 역전을 보여준다.



누가 숙주이고 누가 기생하는 존재인가를 구분하는 일은 그리 중요치 않다. 그것보다는 누군가는 숙주이고 누군가는 기생하는 존재로 살아가야 하는 이 ‘기생관계’의 시스템이 더 중요하다. 자본에 의해 지상과 반지하 그리고 지하로 나뉘어져 그 선을 넘어오는 걸 용납하지 않는 그 지점에서부터 기생관계는 발생한다. 달리 살아도 서로를 용납하는 관계였다면 기생이 아닌 ‘공생 관계’가 됐을 수도 있을 게다. 하지만 이 기생관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시스템 속에서 박사장네도 기택네도 또 문광네도 모두 비극적인 상황을 맞이한다는 점이다.

결국 <기생충> 같은 우울한 우리네 자화상을 적나라하게 그려 넣은 작품에 관객들이 열광한 건 그 기생관계로 살아가게 만드는 시스템에 대한 날선 비판의식 때문이다. 이렇게 살다가는 다 공멸한다는 그 비판의식에 대중들이 공감대를 갖게 된 것. 우울한 현실을 회피하지 않고 직시함으로써 그 잘못된 시스템의 끝장을 통해 전하는 비판의 메시지. 그것이 이 우울한 이야기에 대중들이 열광하게 된 이유일 게다.

정덕현 칼럼니스트 thekian1@entermedia.co.kr

[사진=영화 <기생충>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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