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일, 지정생존자’의 지진희를 지지하는 이유

[엔터미디어=소설가 박생강의 옆구리tv] 지진희는 남자배우들 중 흔치 않은 수비수 배우에 가깝다. 각졌지만 부드러운 특성을 가진 그 배우는 이미 MBC 드라마 <대장금>의 민정호를 통해 본인 커리어의 독특한 시작을 널리 알렸다. 이 드라마는 분명 대장금(이영애)이 주인공이고 장금을 중심으로 모든 이야기가 전개된다. 하지만 장금 옆에는 묵묵히 그를 도와주고 지원해 주는 내금위 종사관 민정호가 있다.

지진희의 민정호는 여주인공을 돋보이게 해주는 데 최적의 캐릭터다. 그리고 이후에도 지진희는 본인을 어필하기보다 상대방 배우의 강점을 돋보이게 만들어주는 역할을 잘해왔다. 다만 한국 드라마의 특성상 언제나 여배우를 돋보이게 해주는 배우 정도로 극 역할이 축소된 것만은 사실이었다.

그런 점에서 tvN 월화드라마 <60일, 지정쟁존자> 대통령 권한대행 박무진은 이 배우에게 새로운 도전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극 중반이 지난 지금 지진희의 박무진은 본인의 연기스타일에 어울리게 이 캐릭터를 확실히 만들어가고 있다.



보통의 남성적인 정치드라마에서 주인공은 대부분 카리스마가 넘치는 유형이다. 하지만 지진희의 박무진은 이 틀을 깬다. 아니, 애초 박무진 자체가 그런 유형의 인물 이후의 정치적 인물로 설계된 듯하다.

박무진은 원래 정치에 뜻이 없던 카이스트 교수다. 그는 전문 분야인 미세먼지 분석에는 탁월하지만 사회성은 조금 떨어지는 환경부 장관이었다. 그는 남자들끼리의 정치적인 감각이나 서열에는 관심이 없다. 그렇다고 본인의 지성을 자랑하는 인물이나 과학밖에 모르는 인물도 아니다. 그저 본인이 맡은 일에는 논리적으로 충실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친절한 남자일 따름이다. 그리고 사랑하는 여인에게 과장되지 않게 로맨틱하다.

그런데 국회 테러로 대통령 권한대행이 되면서 박무진은 정치 한복판 약육강식의 세계로 뛰어든다. 그 세계는 논리적이지도 않고, 로맨틱하지도 않다. 하지만 박무진은 정치의 야욕에 찌든 인물들 사이에 오히려 자기만의 방식으로 위기를 헤쳐 나간다.



사실 박무진 자체가 정치적이고 육식동물 같은 사내는 아니다. 드라마는 야망이 크지 않지만 윤리적인 소시민이 대통령 권한대행이라는 큰 역할을 맡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그린다. 그리고 그간의 커리어로 볼 때 지진희는 이에 적합한 최적의 캐스팅으로 지지할 만한 배우다.

지진희는 평소 본인의 스타일에 맞게 박무진을 부드럽고 조심스러운 인물로 그려낸다. 대신 그는 주인공이 다 움켜쥐고 있을 법한 수많은 카드들을 주변의 캐릭터에게 나눠준다. 그 때문에 <지정생존자>에는 박무진 주변의 수많은 인물들이 동시에 돋보인다. 양진만 정부의 비서실장 한주승(허준호)이나 선진공화당 대표 윤찬경(배종옥)이 그 대표적인 인물들일 것이다.

흥미롭게도 지진희는 싸우는 연기를 하는 배우가 아니라서 허준호와 배종옥은 굳이 핏대를 올리지 않고도 본인의 캐릭터의 강점을 자연스럽게 보여줄 수 있다. 사실 허준호는 살벌한 연기의 대가이며, 배종옥은 더 날카롭게 상대 배우를 쫄 수 있는 배우다. 하지만 지진희의 연기에 희석되면서 이 두 배우의 연기 역시 상대적으로 편안하고 사실적으로 다가온다.



허나 지진희는 <지정생존자>에서 관심의 트로피를 다른 배우에게 뺏기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드라마에서 비서실 선임행정관 차영진 역의 손석구가 특히 그러하다. 손석구는 호불호는 갈리지만, 특유의 비비꼬인 캐릭터 연기로 KBS 드라마 <최고의 결혼> 이후에도 또 한 번 인상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이 때문에 지진희와 맞붙는 신에서 오히려 지진희가 손석구를 더 받쳐주고 빛나 보이게 만든다는 인상이 들기도 한다. <대장금>에 이영애가 있고 <동이>에 한효주가 있다면 <지정생존자>에는 손석구가 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이런 장면을 만들어내는 주연급의 남자배우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더구나 지진희 덕에 <지정생존자>가 오히려 더 재미있게 느껴지는 부분도 있다. 이 드라마는 주인공 한 사람의 카리스마를 오롯이 따라가는 작품이 아니다. 오히려 대통령이 아닌 대통령의 주위를 둘러싼 수많은 대한민국 권력의 기상도를 그린 작품이다. 청와대, 국회, 야당, 군부, 거기에 북한까지. 언제 태풍이 밀려들고, 언제 해가 뜰지 알 수가 없다. 그렇기에 <지정생존자>는 시청자가 주인공에 몰입되기보다 주인공의 입장에서 판세를 지켜볼 때 진짜 재미를 느낄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배우 지진희는 이 드라마의 큰 그림을 받쳐주기에도 상당히 괜찮은 선택이었다. 이 배우는 이야기를 쥐고 흔드는 헤라클레스는 아니지만, 이야기를 묵묵히 짊어지는 아틀라스로는 손색이 없기 때문이다.

칼럼니스트 박생강 pillgoo9@gmail.com

[사진=t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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