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도 없이’, 유아인에 감정이입 한 관객들 따돌리는 싸늘함에 대하여

[엔터미디어=황진미의 편파평론] △이 영화 찬(贊)△. (본문 중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실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소리도 없이>는 신인 여성 감독 홍의정의 데뷔작이다. 제작단계부터 베니스 국제영화제 비엔날레 컬리지 시네마 Top12에 선정되며 주목받았는데, 전형적이지 않은 서사와 장르를 벗어난 만듦새는 상업영화보다 영화제에 더 잘 어울린다는 느낌을 준다. 하지만 현재 박스오피스 1위로 흥행 중인데, 이런 경쟁력은 순전히 유아인의 티켓 파워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영화 <소리도 없이>가 대중에게 가장 소구하는 점은 유아인의 변신이다. 삭발에 15Kg나 체중을 불린 유아인은 잘생김과는 1도 인연이 없었다는 듯 둔중한 모양새다. 한때 꽃미남 배우로 인기를 누렸다는 사실이 완전히 무색해질 지경이다. 더구나 그의 역할은 대사가 한마디도 없다. 원래 말을 못하는 건지 안 하는 건지 불분명하지만, 표정과 눈빛과 몸짓만으로 감정을 전달한다. 뭔가 사회화가 덜 된 하층민 청년의 흐리멍덩한 ()표정 연기가 압권이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으며 투박하고 느린 동작으로 감정이 드러나는데, 김기덕 감독의 <악어> <나쁜남자>에 출연한 조재현이 대사 한마디 없이 연기했던 것과 비견될 만하다. 이는 유아인의 배우로서의 자의식이 무서울 정도로 내비치는 대목이다. 스스로를 인기스타가 아닌 연기파 배우로 여기고 자리매김하겠다는 강한 야심과 뚝심이 감지되기 때문이다.

◆ 기괴함에 대한 사회학적 접근

트럭에서 계란을 파는 창복(유재명)과 태인(유아인)이 어느 건물로 들어가더니 옷을 벗는다. 목욕탕인가 했더니 우비로 갈아입는다. 이내 바닥에 비닐을 깔고 뭔 작업을 한다. 살짝 불길한 느낌이 드는 순간 화면 한쪽에 매달린 물체가 드러난다. 너무나 일상적인 움직임과 흉악한 물체 사이에서 괴리감을 느낄 새도 없이, 싹싹한 창복의 사근사근한 말들이 비집고 들어온다.

이 영화를 말할 때 악의 평범성아이러니가 빠지지 않는다. 당연히 추출될만한 키워드다. 여기에 한 가지를 더한다면 기괴함을 꼽을 수 있다. 얼마 전 한 트위터리안(@mitch-ziziki)박찬욱의 기괴함과 봉준호의 기괴함은 달라. 예를 들면 박찬욱 영화는 아름다운 인어(예쁜 옷이랑 꽃장식 있음)를 산채로 활어회 뜨는 거고 봉준호 영화는 일단 광안리 회타운에서 사장님이 오늘 인어 세꼬시 만원이야 만원~! 외치고 있음라는 트윗을 올려 공감을 얻은 바 있다. <소리도 없이>는 그 트윗의 의미를 곱씹게 한다. 요컨대 박찬욱의 영화가 개인의 기괴함을 미학화하여 보여주는데 비해, 봉준호의 영화는 기정사실화를 통해 사회의 기괴함을 아무렇지도 않게 보여준다는 뜻인데, 이는 꼭 박찬욱과 봉준호가 아니더라도 영화가 특정 사안에 대해 접근하는 상이한 태도를 대변한다.

<소리도 없이>는 봉준호식 사회학적 접근 방식을 취한다. 평화로워 보이는 농촌에서 살인, 유괴, 인신매매 등의 범죄가 아무렇지도 않게 일상의 리듬으로 일어난다. 일단은 그 이질감에 아연실색하게 되는데, 여기에서 도덕의 딜레마를 곱씹게 한다.

박찬욱의 영화 <복수는 나의 것>에는 나쁜 유괴가 있고, 착한 유괴가 있다는 대사가 나온다. 이런 궤변에서 출발한 주인공들은 폭력의 악무한으로 빠져들고, 영화는 악무한에 빠진 개인을 극한까지 밀어붙인다. 그 결과 특별히 악해 보이지 않던 동진이 방금 자신이 죽인 여자 옆에서 짜장면을 먹는다. <소리도 없이>에서 악은 분업화되어 각자 생업으로 존재한다. 창복과 태인은 직접 살인을 하지 않고 다만 사람을 죽이기 쉽게 세팅해주고, 시체를 암매장하는 등의 청소를 해준다. 별로 악해 보이지 않는 그들이지만, 사람을 쳐 죽이고 있는 동안 옆에서 라면을 끓여 먹을 만큼 악을 개의치 않는다. 주어진 일에 감사하며 성실히 살아가는 생활인의 모습이다. 그들이 어느 날 유괴에 가담하게 된다. “착한 유괴라고 생각해서 한 짓이 아니다. ‘늘 하던 일이 아니라서 웬만하면 떠맡고 싶지 않았지만 초희(문승아)의 유괴에 점점 깊게 연루된다.

◆ 도덕의 딜레마

이런 창복과 태인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그들은 끔찍한 범죄에 가담하고 있지만, 평범하고 순박한 생활인의 태도를 보인다. 창복은 업무태도가 상식적이며 태인도 자상하게 챙겨준다. 독실한 기독교인이기도 하다. 태인은 나물 파는 할머니에게 계란을 챙겨 줄 만큼 인정이 있고 어린 여동생을 키울 만큼 책임감도 있다. 그렇다면 이들은 업무가 범죄에 연루되어 있을 뿐, ‘사람은 착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관객이 이들을 대충 관용하려는 순간, 영화는 또 다른 예시를 보여준다.

그렇다면 유괴범들이나 인신매매 부부는 어떠한가. 그들도 하는 일이 나쁠 뿐이지, 그저 성실하게 자기 일을 하는 생활인들처럼 보이지 않던가. 물론 창복과 유괴범들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창복은 몸값을 받아 오며 제풀에 놀라 편안히 하늘로간다. 태인 역시 인신매매범을 때려눕히고 초희를 데려온다. 진짜 유괴범, 진짜 인신매매범이 되기엔 이들의 도덕이 허들로 작용한 것이다. 하지만 이런 차이를 본질적이라 할 수 있을까. 이것 역시 늘 하던 일이 아니어서 빚어진 일은 아닐까.

혹자는 창복과 태인은 범죄자일 뿐이며, 그들의 인성, 성장배경, 생계 따위를 생각할 필요가 없다며 단호하게 선을 긋는다. 일리 있는 의견이다. 하지만 영화는 이런 이들을 위해서도 또 다른 질문을 남겨놓는다. 그렇다면 초희는 어떻게 봐야 할까. 유괴된 초희는 그들을 따라다니며 아무렇지 않게 청소일을 돕는다. 현장을 많이 보며 익힌 덕에 집에서 순경이 쓰러지자 먼저 삽을 잡는다. 이런 학습 효과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유괴되지 않았다면 생전에 볼일이 없었을 범죄를 자연스럽게 접한 초희가 악해진 걸까. 만약 초희가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이들과 유사가족을 이루며 살게 되었다면, 초희도 그들처럼 범죄 업무를 행하며 살았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선악은 그저 학습의 문제인가.

영화 <소리도 없이>는 창복과 태인을 중심에 두고 한쪽에는 인신매매범을 다른 한쪽에는 초희를 두고, 선악을 선명하게 가를 수 없다는 난감함을 보여준다. 이를 좀 더 확장하면 분업화된 사회에서 악한 결과를 초래하는 직장이나 조직에 소속되어 주어진 업무를 처리하며 일의 결과를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경우를 가정할 수 있다. 꼭 범죄조직이 아니어도, 가령 높은 이율의 대부업체, 산재가 빈번한 발전소, 유해물질을 내뿜는 화학공장 등에서 묵묵히 일하는 사람들은 악인인가 선인인가.

◆ 도덕적 결단

선악이 그저 학습의 문제는 아니다. 죄악에 학습된 상태에서도 인간은 도덕적 결단을 내리는 존재이며, 선악은 여기에 달려있다. 다들 어쩔 수 없이 주어졌을 뿐이라고 말하지만, 자세히 보면 그렇지 않다. 창복은 정말 어쩔 수 없이 유괴에 가담하게 된 걸까. 유괴를 맡긴 실장이 없어진 상태에서 창복이 이성과 윤리를 좀 더 적극적으로 사용했다면 굳이 유괴를 진행할 필요는 없었다. 초희를 부모에게 돌려보내는 게 옳다고 판단했다면, 어떻게 들키지 않고 보낼 것인지 궁리했어야 한다. 하지만 창복은 유괴범들의 지시를 따르는데, 이는 창복이 정말 어쩔 수 없었다기보다 자신도 손해 볼 수는 없고 어떻게든 수고비를 받고 싶다는 돈 욕심이 앞섰기 때문이다. 그 결과 창복은 자신의 깜냥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일을 진행하다가 최후를 맞는다. 이는 남의 것을 탐하면 안 된다는 본인의 도덕률에도 합당한 결과이다.

태인 역시 일을 시킨 창복이 사라졌을 때, 주체적으로 사고하지 못한다. 창복이 사전에 내린 지시에 따라 그는 초희를 인신매매범에게 데려다준다. 그러나 뭔가 아니라는 생각에 다시 초희를 구출하러 나간다. 이런 용기를 낸 것은 초희가 걸어둔 양복을 보았기 때문이다. 태인이 선망했던 실장의 몸에서 벗겨 낸 그 양복은 태인에게 영웅의 슈트이자, 성인의 자의식을 상징한다. 즉 스스로 사고하고 결정하는 주체가 됨을 상징한다. 태인은 초희를 구출하러 갈 때와 초희를 학교로 돌려보낼 때, 두 번 양복을 입는다. 적극적인 사고를 통해 도덕적 결행을 하는 순간이다. 하지만 마지막에 태인은 그 양복을 길바닥에 패대기친다. 초희에게 배신당한 자신이 어리석었으며, 자신은 초희에게 영웅이 아닌 유괴범이었다는 현타가 혼란스럽게 엄습해왔기 때문이다.

◆ 문명화된 아이

<소리도 없이>가 여성 감독의 작품임이 드러나는 지점이 있다. 첫째는 초희를 단순한 피해자가 아니라 상황을 주도하는 주체성을 지닌 존재로 그린 것이다. 처음 토끼 탈을 쓰고 등장한 초희는 겁에 질린 모습이 아니다. 오히려 토끼 탈이 조금 무서운 느낌을 자아내는데, ‘기지를 통해 죽음의 위기에서 도망치는 토끼(<별주부전>)’를 암시한다.

초희는 중산층 가정 출신으로 추정되지만, 남동생에 비해 차별을 당한 탓인지 눈치가 빠르고 조숙하다. (학교 운동장에서 엄마에게 깍듯이 인사하는 모습은 부모의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한 아이일 수 있음을 암시한다.) 그는 유괴된 상황은 물론이고 아버지가 몸값을 깎으려 한다는 상황도 빠르게 받아들인다. 그는 태인을 자극하지 않으면서도 탈출의 기회를 호시탐탐 노린다. 이는 납치된 인질이 생존을 위해 취해야 할 가장 올바른 태도이다. 초희는 태인이 문주의 친오빠라는 말을 듣고 다소 안심하며 태인과 정서적 유대를 쌓아간다. 야만인처럼 살아가던 남매에게 초희는 문명의 전파자처럼 보인다. 초희는 방치되어 있던 문주를 언니처럼 보살피고 놀이를 하듯 안심시킨다.

태인이 인신매매범에게 넘겨진 초희를 구하러 왔을 때, 초희는 태인을 마구 때린다. 여기에는 태인에 대한 원망과 믿음이 뒤섞여 있다. 마침내 초희는 탈출을 감행하는데, 이는 태인에 대한 신뢰가 한번 깨졌으며 어디로든 또다시 팔려갈 수 있다는 불안감이 엄습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탈출은 쉽지 않다. 술 취한 행인으로부터 도망친 초희가 다시 태인과 마주쳤을 때 초희는 차라리 안도하는 것처럼 보인다. 새로운 위험에 비해, 그나마 익숙한 태인이 나아 보였기 때문이다. 이제 초희가 선택할 수 있는 제일 나은 방법은 태인과의 교감을 활용하여 태인을 설득하는 것이다. 초희는 그것을 해낸다.

◆ 누구에게 감정이입을 하는가

마지막 학교 장면에서 많은 관객이 어리둥절해 한다. 초희가 왜 그간의 정리를 싹 씻고 훈훈한 작별인사도 없이 태인을 유괴범으로 쫓기게 만들었는지 모르겠다며 불평하는 관객들이 많다. 심지어 순박한 태인이 영악한 계집아이에게 뒤통수를 맞았다거나, 배신감이 든다고 토로하는 관객(주로 남성)도 있다. 이런 반응들은 매우 아이러니하며, 남성 중심적이다. 유괴된 11살 소녀가 죽음의 고비를 넘어 집으로 돌아오는 상황에서 소녀를 응원하지 않고, 소녀에게 배신감을 느낄 성인 남자의 기분에 동일시하는 것이 과연 인륜에 합당한가. 영화가 밑밥으로 깔아놓은 도덕의 교란에 푹 빠져든 탓에, 관객들마저 상식의 혼란을 겪는 것은 아닌가.

선생님이 유괴범을 외치기 전에, 초희가 선생님에게 무어라 말했는지는 불분명하다. 그러나 말은 똑바로 하자. 태인은 유괴범인가 아닌가. 초희가 문주와 대화할 때, “유괴범이 뭔데?” “언니를 데려온 사람들” “우리 오빠?”라는 말이 나온다. 태인이 적극적인 유괴범은 아닐지라도, 유괴에 가담한 것은 사실이다. 또한 초희와 잘 지냈다 해도 초희가 인질이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이들이 잘 지낼 수 있었고 초희가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초희의 현명함 덕분이지 태인의 선함 덕분이었다고 말할 수 없다. 초희가 미성숙한 태인의 인격에서 성숙한 행동을 끌어냈다고 보는 편이 맞기 때문이다. 영화의 냉엄하고 씁쓸한 결말은 둘의 관계를 낭만화하거나 스톡홀름 증후군을 미화하는 것과 분명한 거리를 둔다.

이처럼 납치범과 인질의 관계를 낭만화하지 않는 결말도 여성 감독의 작품임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가령 <오페라의 유령>에서 남성의 스토킹과 가스라이팅과 납치를 예술적 정당성이 있는 행위인 양 의미를 부여하고 납치된 여성의 욕망을 갈팡질팡 묘사하는 것이나, 영화 <화이>에서 납치된 여성이 탈출의 의지를 완전히 포기한 채 무기력과 원한만 가득한 존재로 묘사되었던 것과 비교해보라. 영화는 11세 초희를 그간의 성인여성들보다 주체적이고 현실적으로 묘사하며, 결말을 통해 미숙한 남성 주체에게 둘의 관계가 무엇이었는지 객관적으로 보여주며 서늘한 현타를 제공한다.

영화 속 경찰의 모습도 여성 감독의 작품임을 드러낸다. 도망치던 초희가 길에서 마주친 남성은 내가 경찰 인데...”라며 비릿한 웃음을 흘린다. 영화는 그가 진짜 경찰이었다는 아이러니를 던지지만, 초희 같은 소녀에게 성인 남성은 (설사 그가 경찰이 맞다 할지라도) 가장 믿기 어렵고 도움을 요청하기 힘든 존재라는 감각을 공유한다. 반면 여성 순경은 비록 강하진 않지만 끝까지 공무를 수행하려 애쓰며, 결국 그가 문주를 구한다. 여성 감독이 아니었던들 이런 묘사는 담기지 않았을 것이다.

<소리도 없이>유아인의 변신을 미끼로 삼아 도덕의 문제를 숙고하게 만드는 흥미로운 작품이다. 또한 납치된 소녀에 대한 묘사를 비롯해 여성주의적 시각을 담는다. 특히 유아인에 감정이입을 하는 관객들을 따돌리는 싸늘한 결말과 함께 비대한 남성 자아를 감별하는 포인트를 제공한다. 지금 당신은 누구에게 감정이입을 하는가. 유아인인가 소녀인가. 유아인의 캐스팅은 여러모로 절묘하다.

칼럼니스트 황진미 chingmee@naver.com

[사진=영화 <소리도 없이>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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