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돌 오디션, 방송보다는 팬덤 비즈니스가 됐다

[엔터미디어=정덕현의 네모난 세상] Mnet 오디션 <걸스플래닛999 : 소녀대전(이하 걸스플래닛)>은 방영 전부터 말이 많았다. <프로듀스101> 사태의 잔상이 여전히 남아있는 터에 또 다시 아이돌 연습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오디션 프로그램을 열었다는 점 때문이었다. 국내 시청자들의 반응은 시큰둥하다. 시청률은 2회에 1회보다 반등했지만 1%도 도달하지 못한 0.7%(닐슨 코리아)에 머물렀다. 여기서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시청률도 낮고 시도 자체에 대한 반응도 좋지 않은데 어째서 아이돌 오디션 프로그램이 계속 나오는 걸까.

이런 사정은 지난해 빅히트엔터테인먼트의 방시혁이 참여한 <I-LAND>도 다르지 않았다. 당시 최고시청률은 0.7%. 국내에서 화제도 그리 되지 않았다. 당연한 결과였고, 그건 누구나 예측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방시혁은 어째서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됐을까. 그건 방송으로서는 성공 가능성이 거의 없지만, 비즈니스로서는 이 프로젝트에 성공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I-Land>가 배출한 아이돌 그룹 엔하이픈은 올해 발표한 두 번째 미니앨범으로 빌보드 200에 18위로 입성했다.

방송은 실패했어도 프로젝트 비즈니스는 성공하는 이런 결과는 왜 생겨난 걸까. 그건 두 가지 이유가 작용했다. 하나는 최근 아이돌 오디션 프로그램들이 글로벌을 지향하고 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방송의 시청률 같은 지표와 상관없이 위버스 같은 글로벌 팬덤 플랫폼을 통해 오디션 과정을 공유하며 공고한 팬덤을 구축한다는 점이다. 글로벌 팬덤은 시청률 지표에는 전혀 반영되지 않는다. 게다가 이 팬덤은 방송의 성패와 상관없이 배출된 아이돌 그룹이 곧바로 글로벌 활동을 할 수 있는 기반이 되어준다.

<걸스플래닛>도 이 비즈니스 모델을 그대로 가져왔다. 한국, 일본, 중국 소녀들을 각각 33명씩 참여시켰고, 이들의 오디션 경쟁 당락을 결정하는 건 글로벌 플랫폼 유니버스의 글로벌 투표를 통해서다. 이 모델은 <걸스플래닛>의 지향을 정확히 드러낸다. 한중일 소녀들로 구성된 아이돌 걸 그룹을 탄생시키겠다는 것이고, 그 과정 자체에서 ‘플래닛 가디언’이라는 글로벌 팬덤까지 구축하겠다는 뜻이다. 국내에서 <프로듀스101> 조작 사태로 아이돌 오디션 프로그램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이 적지 않지만, 글로벌 시장에서 K팝 아이돌에 대한 호의는 그 어느 때보다 높다. 그러니 방송은 어려워도 비즈니스는 이미 과정부터 어느 정도의 성공을 담보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두 가지다. 과연 <걸스플래닛>에 그만한 매력과 실력을 갖춘 출연자들이 얼마나 많이 출연할 수 있을 것인가 이고, 다른 하나는 방송을 통해(정확히는 방송사가 기획한 오디션 과정을 통해) 이런 매력과 실력들을 글로벌 팬덤에게 어필할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전자는 출연자 풀이 충분해야 가능한 일이고, 후자는 방송이 그만한 노하우를 갖고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하면 이 두 가지 전제는 충분히 충족된다. 일단 출연자 풀은 넓을 수밖에 없다. K팝 아이돌이 글로벌하게 성과를 내면서 아이돌이 되기 위해 기획사를 찾는 연습생들은 넘쳐나고 사실 너무 과잉되어 있다 얘기될 정도다. 최근 아이돌 오디션 프로그램이 과거보다 적어지면서 그 적체는 더 늘었다. 게다가 글로벌 그룹을 지향하면서 국내만이 아닌 해외 출신의 연습생들도 합류했다. 무한경쟁 속에서 어떻게든 데뷔를 하기 위해 피, 땀, 눈물을 흘리는 연습생들의 실력은 늘 수밖에 없다.

이번 <걸스플래닛>에서 탐색전 1위를 기록한 에자키 히카루 같은 춤과 노래 게다가 연기적인 표현까지 더한 참가자나, 쿠보 레이나 같은 파워보컬의 소유자, 수루이치 같은 다재다능한 능력을 가진 외국인 참가자들은 물론이고, 솔로로 무대에서 톡톡 튀는 매력을 선보인 CLC 멤버 최유진, NCT의 ‘영웅’으로 카리스마 넘치는 무대를 보여준 서영은 같은 참가자들이 그 사례다. 물론 외국인 참가자들 중에는 정작 한국어로 불러야 하는 가사 전달 자체가 되지 않는 이들도 적지 않았지만, 정반대로 확실한 실력을 갖춘 이들도 있었다.

이들을 보여주는 방송의 연출은 <프로듀스101> 시절의 피라미드 구조를 여전히 벗어나진 못했지만(이걸 탈피하긴 어려울 것이다. 오디션 경쟁은 결국 그 구조를 전제로 하니까) 과거처럼 대놓고 자극적인 편집들을 대놓고 늘어놓지는 않고 있다. 예를 들어 CLC의 곡 ‘헬리콥터’ 무대를 가져온 중국 참가자 푸야닝이 원곡자인 CLC 멤버 최유진에게 “자신 있다”며 그 노래가사의 한 소절인 “우리는 헬리콥터를 타고 올라갈 거야. 이륙을 위해 엄청난 소리를 내면서 말이야.”를 부른 후 “하지만 너는 아니야-”라고 도발한 대목에서도 후에 그것이 팀 리더로서 팀원들 사기를 위한 것이었다고 해명하는 장면을 넣었다.

물론 셀로 불리는 팀이 꾸려지고 이들이 공동운명체가 되어 경쟁 속에서 함께 살아남으려 애쓰는 그 과정은 소녀들 특유의 발랄함으로 포장되어 있지만 여전히 혹독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이 혹독한 무대를 기회로 여기는 건 비대하게 팽창해버린 기획사와 연습생들 속에서 자신을 드러낼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현실이 더 혹독해서다. 그래서 심지어 조작 사태까지 드러남으로써 그 기회가 공정할 것인가에 대한 의구심이 있어도 이들은 오디션에 기꺼이 참여한다.

이제 K팝 아이돌을 뽑는 오디션 프로그램은 방송이라기보다는 팬덤 비즈니스가 되었다. 방송사도 기획사도 또 출연하는 아이돌 연습생들도 이 힘겨운 과정을 통해 데뷔하고 싶어 하고, 적어도 팬덤을 갖고 싶어 한다. 안타까운 건 ‘조작 사태’가 벌어지기 전까지만 해도 갖가지 논란은 있었지만 그래도 이들의 경쟁적인 어려운 현실에 대한 대중적 공감대가 있어 방송도 어느 정도는 인정되는 분위기가 있었다는 점이다.

그나마 글로벌 팬덤 시장이 열리면서 무한경쟁 속 절망적인 연습생들에게 오히려 커진 희망이 생긴 셈이지만, 역시 오디션 프로그램이라는 특징은 그 과정을 통해 선발된 몇 명에게만 과실이 주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걸스플래닛>은 이제 행성을 이야기할 정도로 그 세계관이 글로벌하게 확장된 K팝의 현재를 말해주면서도, 동시에 그래서 더 과중해진 경쟁에 놓여진 아이돌 연습생들의 세계를 그대로 보여준다.

끝까지 살아남은 소녀들은 글로벌 팬덤 속에서 더 확장된 성공을 누릴 수 있게 됐지만, 그렇지 못한 소녀들은 더 넓고 많아진 경쟁자들 속에서 모래알처럼 사라져버릴 더 큰 절망을 앞두게 됐다. 이런 현실을 잘 알고 있는 대중들에게 방송이 호의적으로만 보이긴 어렵다. 하지만 그렇다고 쏟아져 나오는 연습생들을 수용해주는 대안이 없는 한, K팝 아이돌 오디션 프로그램은 계속 나올 것이고 연습생들도 계속 참여할 것이다. 또 팬덤 비즈니스도 글로벌하게 이어진다. 0%대 시청률을 반복해도 아이돌 오디션 프로그램이 계속 기획되는 이유다.

 

정덕현 칼럼니스트 thekian1@entermedia.co.kr

[사진=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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