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준호, 카리스마의 대명사가 섬세함까지 갖췄을 때

JTBC 드라마 '설강화'
JTBC 드라마 '설강화'

[엔터미디어=소설가 박생강의 옆구리tv] 아직도 배우 허준호를 전설적인 악역 배우 허장강의 아들로 기억하는 이들은 별로 없다. 그는 성실하게 배우의 커리어를 쌓아왔고,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에서 30여 년 동안 얼굴을 비춰왔다. 그는 주말극이나 일일극에서 반항적인 막내아들로 주로 얼굴을 알렸다. 하지만 MBC 드라마 <보고 또 보고> 등에서는 귀여운 로맨스에서도 제법 어울리는 연기도 선보였다.

하지만 아무래도 허준호의 매력은 악역에서 가장 빛났던 듯하다. 날카로운 호랑이상의 허준호는 얼굴부터 뭔가 위압감이 있는 배우다. 거기에 깡마른 체격과 작은 눈매는 속내를 알 수 없는 냉철한 인간에 어울린다. 그렇기에 뭔가 귀여운 악역보다 진짜 피도 눈물도 없는 악역 같은 악역을 맡았을 때, 소름 돋는 싱크로율을 보여준다.

MBC 드라마 '이리와 안아줘'
MBC 드라마 '이리와 안아줘'

MBC 드라마 <이리와 안아줘>에서 허준호는 주인공 윤나무(장기용)의 아버지이자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범 윤희재로 나온다. 피도 눈물도 없는 잔인한 성격의 이 캐릭터는 허준호 악역의 끝판왕이었다. 그저 개 농장 앞에서 눈만 치켜뜨는 것만으로 드라마를 단숨에 시베리아 벌판으로 만드는 위엄을 보였다. 다만 그 때문인지 <이리와 안아줘>는 진한 멜로보다는 진한 스릴러에 더 가깝게 느껴졌다. 채도진으로 개명한 경찰 윤나무와 배우 한재인(진기주)의 로맨스 메인 서사가 그의 싸늘한 악역에 묻힌 것은 당연했다.

영화 '모가디슈'
영화 '모가디슈'

이렇게 악역의 정점을 찍은 후, 허준호는 뭔가 다른 모습들을 보여준다. 그 대표적인 작품이 영화 <모가디슈>이다. <모가디슈>에서 주연 조인성과 김윤석 못지않게 인상적인 배우가 바로 허준호였다. 그는 <모가디슈>에서 북한의 림용수 대사로 등장한다. 허준호에다가 북한의 대사니 악역 아닌가 싶었지만, 막상 영화의 뚜껑을 열어보니 전혀 아니었다. 물론 림용수 대사는 철저하게 공산주의자에 냉철한 인물로 등장한다. 냉철함은 배로 허준호의 트레이드마크이기도 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수많은 식구들을 안전하게 모가디슈에서 탈출시켜야하는 가장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냉철함 사이에서 은은하게 배어나오는 인간적 고뇌는 이 인물을 굉장히 입체적으로 만들어준다. 허준호가 드라마나 영화에서 종종 보여준 싸늘한 광기가 아닌 냉정함 속에 인간미를 감춘 인물을 연기한 것이다. 동시에 배우 허준호의 연기가 좀더 깊어지고 과거의 그와는 다른 방식의 입체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JTBC 드라마 '언더커버'
JTBC 드라마 '언더커버'

이런 허준호는 2021년 JTBC <언더커버>와 2022년 JTBC <설강화>를 통해 또 한 번 변주된다. <언더커버>의 국정원 임형락과 안기부장 은창수가 그러하다. 두 역할 모두 한국의 현대사에서 그늘 속에 숨어 있는 인물들이다. 하지만 임형락과 은창수가 보여주는 면은 전혀 다르다.

<언더커버>의 임형락을 통해 허준호는 교활하고 냉철한 악역을 연기한다. <이리와 안아줘>의 악역이 밑바닥 인생의 사이코패스라면, <언더커버>의 임형락은 화이트컬러 사이코패스에 가깝다.

JTBC 드라마 '설강화'
JTBC 드라마 '설강화'

반면 JTBC <설강화>의 은창수는 좀 다르다. <설강화>에서 단순하고 우스꽝스럽게 만들어진 남태일(박성웅)과 달리 은창수는 복잡하고 미묘하며, 일면 애틋한 부분도 있다. 은창수는 인간미 있고 차분하며 합리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하지만 군인 출신의 그는 주어진 임무에 반항할 수 없는 그런 삶을 살아온 인물로 묘사된다. 허나 딸 은영로(지수)가 호수여대 기숙사 간첩 인질극의 인질이 되면서 그의 삶이 흔들린다. 게다가 아버지와 달리 운동권의 길을 택해 군대로 보낸 아들도 죽은 상황이다.

<설강화>의 메인 서사는 아니었지만, 순간순간 허준호의 은창수가 보여주는 연기는 매력 있었다. 특히 현재의 임무에 충실한 안기부 요원의 모습과 위기에 처한 딸을 걱정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미묘하게 얽히는 순간들이 그러했다. 자신의 직무에 대한 책임과 자식에 대한 인간적 감정 사이에서 고뇌하는 아버지의 감정을 이렇게 섬세하게 그려낸 배우가 있었던가 싶을 정도.

영화 '모가디슈'
영화 '모가디슈'

<설강화> 이후 허준호가 보여줄 장년과 노년의 인물들이 궁금해지기도 했다. 냉철함과 부드러움, 무표정과 희미한 미소가 교차할 때 드러나는 그의 매력을 보여줄 그런 인물들 말이다. 더구나 영화 <국가 부도의 날>의 불행한 서민 가장의 모습처럼, 그는 의외로 여러 계층의 다양한 인물들을 보여줄 수 있는 마스크다.

칼럼니스트 박생강 pillgoo9@gmail.com

[사진=MBC, JTBC, 영화 <모가디슈>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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