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헤중’·‘한 사람만’·‘서른, 아홉’...요즘 시한부 소재 왜 이리 많아졌나

[엔터미디어=정덕현] 또 시한부야? 혹자들은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JTBC 수목드라마 <서른, 아홉>은 시작부터 누군가의 장례식을 보여줬고, 그 장례의 주인공이 바로 정찬영(전미도)이라는 걸 알려줬다. 차미조(손예진)와 장주희(김지현)의 둘도 없는 친구. ‘가족 같다’라는 말로는 다 설명이 되지 않을 정도로 친한 친구다.

그가 췌장암 4기라는 걸 먼저 알게 된 후 충격과 절망에 빠진 차미조는 찬영의 사무실을 찾았다가 거기 김진석(이무생)의 아내 강선주(송민지)가 친구를 몰아세우는 소리를 듣게 된다. 이미 결혼해 다른 여자의 유부남이 되었지만 관계를 끊지 못하고 때때로 만나 밥을 먹고 차를 마시는 찬영과 진석은 그들은 로맨스지만 차미조의 시선으로 봐도 불륜처럼 보인다. 그래서 화기애애하게 놀다가도 진석의 이야기만 나오면 정색하며 빨리 정리하고 선을 긋는 차미조다.

그래서 강선주가 찾아와 자신의 남편과 당신이 무슨 관계냐고 찬영에게 다그치는 건 차미조가 생각해도 이해할 법한 상황일 테다. 하지만 찬영이 췌장암 4기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차미조는 강선주가 친구에게 “구질구질하다”거나 “평생 남의 남편 옆에서” 같은 말을 꺼내놓는 걸 참지 못한다. 결국 뺨을 때리고, 강선주가 경찰에 신고를 하자 진짜 폭력이 뭔지 한 번 당해보라며 머리채를 잡는다.

<서른, 아홉>이 담은 시한부 소재는 그 자체로는 이제 식상해진 드라마 코드처럼 보인다. 각별한 워맨스가 로맨스보다 더 중요하게 다뤄지는 이 드라마에서 그 중 한 사람의 시한부 선고는 그 후에 일어날 많은 사건들을 어느 정도 예상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사실을 알고 절망하고, 그 사실을 어떻게 전할까 전전긍긍하고, 전하는 그 순간 깊은 슬픔에 빠졌다가 그저 포기할 수 없다는 자각에 뭐든 해보려 했다가 결국에는 이를 수용하고 ‘찬란한 마지막 순간’을 함께 보내겠다고 마음먹고는... 대략 이렇다.

하지만 <서른, 아홉>의 시한부 소재를 그저 뻔한 클리셰로 치부하는 건 이 드라마에게는 어딘가 억울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이 작품이 제목에 담겨 있는 것처럼 서른아홉이라는 나이, 즉 이제 40줄에 접어드는 그 시간대에 겪게 되는 일을 소재로 하고 있어서다. 청년에서 중년으로 넘어가는 나이에 가장 큰 사건(?)이라면 ‘죽음’을 경험하고 그것이 나와는 유리된 딴 세상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들의 이야기로 받아들여지게 되는 그런 것이 아니겠나.

실제로 그 나이는 친구의 결혼식장을 가는 것보다 누군가의 부음을 듣고 장례식장을 가는 일이 조금씩 많아지는 시기다. 그리고 때로는 너무 이른 나이에 먼저 떠난 친구의 죽음을 경험하고 삶을 달리 바라보게 되기도 한다. 40대를 불혹이라 말하지만, 사실 그 나이 대에 우리는 더 흔들리는 경험들을 하게 된다.

최근 들어 시한부를 소재로 하는 드라마들이 부쩍 늘었다. SBS <지금, 헤어지는 중입니다>에서 하영은(송혜교)의 친구 전미숙(박효주)은 시한부 선고를 받고 결국 친구들의 온기 속에서 웃으며 떠나간다. JTBC <한 사람만>은 아예 시한부 선고를 받고 온 이들이 모인 호스피스 요양원을 배경으로 한다. 그 곳에서 표인숙(안은진)은 강세연(강예원)과 성미도(박수영)를 만나 우정을 쌓아가고, 민우천(김경남)과 서로의 단 ‘한 사람’이 된다.

시한부 소재가 실제로 일종의 드라마 코드로 활용되는 건 사실이지만, 최근 들어 이렇게 연달아 그 소재가 등장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도 존재한다. 그것은 삶의 욕망이 얼마나 헛된가를 드러내는 것이고, 삶에서 진짜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꺼내놓기 위한 장치로서 쓰이기 때문이다. 마치 최근 K드라마들이 지옥 같은 디스토피아를 설정해 그 안에서 헛된 욕망이 아닌 진짜 소중한 것들이 무엇인가를 찾아내려 하는 것처럼, 세상이 무너져 내리는 시한부 소재가 그런 장치로도 쓰인다는 것.

시한부 소재가 많이 등장한다는 건 그만큼 지금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현실들이 죽음을 마주하고야 비로소 별거 아닐 수 있을 만큼 만만찮다는 걸 에둘러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동시에 이 소재는 너무 익숙한 클리셰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호불호는 나뉠 수밖에 없다. 뻔해보여도 그 절절함에 현실의 무게를 더해 더욱 공감하는 이들이 있는 반면, 또 시한부냐는 목소리도 적지 않을 테니 말이다. 그래도 <서른, 아홉>을 위한 변명을 해주자면, 그 나이대에 죽음에 대한 경험을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건 그 자체가 현실 부정일 수 있다는 것이 아닐까.

정덕현 칼럼니스트 thekian1@entermedia.co.kr

[사진=JT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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