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배트맨’, 브루스 웨인의 자기 정체성 찾아가기

[엔터미디어=정덕현의 네모난 세상] 브루스 웨인(로버트 패틴슨)은 자경단 2년차지만 자신이 누구냐는 질문에 “복수(vengeance)”라고 답한다. 그는 부모님이 피살된 후 분노에 가득 차 있다. 그래서 이 고담시의 악과 맞선다는 명분을 세우고 배트맨 가면을 쓴 채 자신을 부르는 곳으로 달려가 악당들과 싸우지만, 그 주먹에는 분노의 표출로서의 폭력이 스며들어있다.

매트 리브스 감독의 <더 배트맨>은 배트맨이 이제 막 탄생해 자기 정체성을 찾지 못한 채 불안하게 방황하는 그 시점으로 돌아간다. 만화 같은 배트맨이 아니라 느와르 속 주인공 같은 현실적인 느낌이 가득한 배트맨. 그래서 <더 배트맨>은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다크 나이트 라이즈>와 비교되는 작품이다. 두 작품을 극적으로 나누는 지점은 <다크 나이트 라이즈>가 악당 베인에 상대적으로 더 집중한 면이 있다면, <더 배트맨>은 오롯이 배트맨의 고민과 성장에 대한 이야기에 맞춰져 있다는 점이다.

<다크 나이트 라이즈>를 비롯해 일련의 배트맨 시리즈에는 악역들이 사실상 현실에 대한 문제제기를 던지는 인물들이 등장하곤 한다. 소외된 존재든, 사회가 버린 약자들이 악당이 된다는 점에서 배트맨 시리즈의 특징은 정의를 구현하는 배트맨 만큼 악당의 목소리가 두드러지는 경향이 있다. <더 배트맨>에 등장하는 리들러(수수께끼를 내는 의문의 악당)도 그런 인물 중 하나다. 그는 배트맨에게 전하는 메시지로서 사건들을 터트린다.

마치 탐정처럼 사건을 추적하는 배트맨은 리들러의 수수께끼 같은 질문들을 따라가며 진실에 다가간다. 그 진실은 자신의 정체성과도 연결되어 있다. 리들러가 만드는 사건들은 선거를 앞두고 결탁한 경찰과 범죄자들에 대한 단죄라는 점에서, 마치 배트맨이 하는 행위, 즉 정의로 포장되어 있지만 사실은 폭력적인 복수에 가까운 행위를 닮았다. 그래서 리들러는 배트맨이 자신과 같은 목적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며, 그에게 손을 내민다.

배트맨은 이러한 리들러와 맞서면서 그의 사건을 추적하고 그러면서 리들러가 내놓은 단서들을 통해 자신이 현재 이 길을 선택하는데 있어 지대한 역할을 한 아버지의 진실에 다가선다. 그는 과연 절대적으로 선한 인물이었던가. 아니면 그 역시 선거를 앞두고 부정을 저지른 인물이었던가. 배트맨은 고민에 빠진다. 만일 아버지가 자신이 생각하던 그런 인물이 아니었다면 자신이 가는 이 길은 무슨 의미를 갖는가.

결국 배트맨이 자기 정체성을 찾게 된 계기는 마치 배트맨처럼 가면을 쓰고 테러를 감행하는 리들러의 추종자들을 붙잡아 “너는 누구냐?”고 물었을 때 그가 “나는 복수다”라고 자신이 하던 말을 듣게 된 바로 그 순간이다. 배트맨은 알게 된다. 자신이 해왔던 행위들이 선 하나만 살짝 넘으면 테러와 폭력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더 배트맨>은 무려 세 시간에 가까운 러닝타임(176분)을 가진 영화지만, 그렇다고 굉장한 액션 스펙터클이 펼쳐지는 영화는 아니다. 오히려 배트맨의 불안하고 갈등하는 내면을 따라가는 이야기에 가깝다. 그래서 액션을 기대한 관객이라면 다소 지루한 감을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배트맨이 던지는 정의와 폭력에 대한 질문들을 캐릭터와 연출로 은유해 담아낸 지점들을 의미심장하게 바라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어둠 속에서 눈을 밝히는 박쥐라는 존재를 캐릭터화한 슈퍼히어로. 마치 밤만 존재하는 것처럼 어둡고 질척한 고담시여서 더 밝게 빛나는 배트맨을 부르는 라이트. 무엇보다 흑백갈등 속에서 백인이지만 온몸을 검은 가면과 제복으로 감싼 배트맨에게서 느껴지는 자기반성이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더 배트맨>에는 잘 녹아 들어있다.

너의 정체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드디어 “배트맨”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존재가 된다는 건, 단순히 선악이나 흑백으로 나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그 중간에서 끊임없는 고민을 통해 길을 찾아나가는 과정에서 가능하다는 걸 이 영화는 보여준다. 그리고 이 영화가 제시하는 고민들은 지금 우리도 마주하고 있는 대선 상황 앞에서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고 여겨진다. 결국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가 단순한 ‘복수’와 ‘정의’를 가르는 것이 될 테니.

정덕현 칼럼니스트 thekian1@entermedia.co.kr

[사진=영화 ‘더 배트맨’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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