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고로 보결 대결이라면 무대를 찢는 공연을 보고 싶다(‘두 번째 세계’)

[엔터미디어=김교석의 어쩌다 네가] <두 번째 세계>는 제목을 영리하게 지었다. JTBC의 음악예능 라인업에 새롭게 추가된 이 프로그램은 걸그룹의 래퍼 포지션 아이돌들이 보컬 경연을 펼치는 오디션쇼다. 단독 파트가 적고, 비교적 주목을 받지 못하는 포지션의 멤버에게 스포트라이트를 건네면서 두 번째 세계로 나아갈 기회를 만든다. 지금까지 아무도 보지 못했던 무대라는 점, 출연자들도 지금까지 해보지 못했던 경험이라는 점, 더 나은 미래를 향한 도전이란 가치를 품고 있다는 점에서 ‘두 번째’는 콘셉트에 딱 맞아 떨어진다.

착한 경연을 지향하며 음악성과 무대 연출을 중시하는 JTBC 음악 예능답게, 경쟁의 자극도를 낮추고 무대의 예술성을 높였다. 케이팝 전성시대에 전현직 아이돌이 참여하는 무대인만큼 여타의 경연 예능보다 무대 구성과 연출에 힘을 주고 있고, 진정성과 전문성을 보여주는 스케치 영상도 꽤나 길게 붙는다. 참가자가 단 8명이지만 80분 분량의 방송에서 첫 번째 대결 미션만 3회에 걸쳐 방송했을 정도다. 가수 김범수를 중심으로 정은지, 서은광, 김민석, 정엽 등으로 구성된 젊은 보이스 리더(심사위원)진도 신선한 편이다. 데뷔가 걸려 있지 않고, 보컬을 중점으로 보는 쇼의 성격상 아이돌 산업의 바깥에서 활동하는 발라더와 보컬로 유명한 동료 아이돌 멤버가 심사를 맡는다.

그런데 방송을 보기 전부터 4회까지 보고난 지금까지 안 풀리는 의문이 있다. 왜 래퍼가 전문분야가 아닌 보컬 경연으로 평가를 받는가라는 근원적인 궁금증이 여전히 머릿속을 맴돈다. 감춰진 재능을 발산해 기존에 보지 못한 볼거리를 보여주는 이벤트성 무대라거나 이를 통해 경력 단절을 딛고 재기를 꿈꾼다면 그나마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쇼는 두 번째 세계를 펼쳐야 하는 이유를 오랜 갈망, 마음속에 꿋꿋하게 품고 있는 소중한 꿈 등의 ‘절실함’으로 답한다.

설정은 새로운데 스타 등용문 격의 기존 오디션쇼에서 너무나 익히 봐온 익숙한 접근의 반복이다. 이미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했다고 해도 좋을 아이돌 그룹 멤버가 노래를 너무 하고 싶었고, 자신의 무대를 갖고 싶었다며 눈물을 보인다. 일면 이해는 하지만 이들의 짠함을 오디션쇼의 성장서사로 삼기에 너무나 약하다.

과거 H.O.T나 젝스키스가 활동하던 시대에는 외모가 출중하거나 춤 실력은 최상인데 노래를 못하면 래퍼를 맡았다. 전문 분야, 장르의 존중보다는 가창력과 래핑을 우열의 관계로 보는 시각이 일반적이었다. 그때는 가수의 기준과 평가 범위가 지금보다 훨씬 좁았고, 흑인음악이 우리나라 대중음악 시장에서 하나의 독립된 장르와 예술로 인정받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드렁큰 타이거는 노랫말에 래퍼라는 말을 숱하게 반복하면서 정체성을 대놓고 외쳐야만 했다.

몰론 지금도 아이돌 그룹을 제작하는 입장에서는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아이돌 산업은 소위 4세대 이상 진화를 거듭하며 전세계 MZ세대의 트렌드를 선도하는 글로벌 콘텐츠로 거듭났다. 아이돌 멤버들은 각자 가진 아티스트의 면모와 재능을 부각하고 세계관까지 입힌 캐릭터로 스토리텔링을 하는 시대다. 그런 이때, 보컬과 래퍼를 전문 분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우열의 관계로 설정하고 실은 나도 노래를 하고 싶었다는 고백이 얼마나 공감대를 만들 수 있을까. 자칫 절실함을 내보이려다 지금까지 쌓아온 정체성과 전문성이 뒤흔들릴 수도 있다. 바로 이 지점이 이 쇼가 팬심을 흔들지 못한 결정적인 이유일 수도 있다.

<두 번째 세계>에는 그간 팀에서 비교적 주목을 받지 못한 포지션의 아이돌끼리 만드는 ‘연대’의 무드가 깔려있다. 이는 주지하다시피 다분히 엠넷 <스우파>에서 비롯된 영향이다. “포지션이 다르기 때문에 위치, 자리가 달라졌다”는 심사위원석에 앉은 정은지의 멘트가 인상적이다. 그러나 <스우파>의 출연자들은 자기가 선택해서 걷는 길에 대한 자부심과 단단한 자존감 위에서 절실함을 표출했다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아이돌 콘텐츠는 시청률보다도 팬덤에서 불씨가 지펴져서 인터넷 커뮤니티, SNS 등에서 회자되는 화제성이 성패의 기준이 된다. 이를 알아볼 수 있는 건 시청률보다 유튜브 등에서 인기를 끄는 클립 영상의 조회수다. 그런데 이 쇼가 존재하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잠잠하다. 마침 나영석 사단에 합류해 대세 예능인으로 떠오른 미미가 출연한다는 호재도 잘 살리지 못했다. 시청률 또한 이젠 더 낮아질 수도 없을 것 같은데 매주 하향 그래프를 이어가고 있다. 시청률은 0.75%로 시작해서 0.47%까지 3주 연속 떨어졌다.

아예 본 적 없는 그림을 그리고픈 기획의도와 도전은 좋다. 그러나 여러 방송사들이 음악 예능 안에서 너무나 많은 대결과 경쟁을 만들다 보니 귀도 지치고 마음도 지친다. 게다가 <두 번째 세계>는 보컬 대결이라고 했는데 막상 까보니 무대와 퍼포먼스에 너무 힘을 준 나머지 정작 가창력, 목소리의 매력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이 모든 아쉬움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선입견을 깨는, 소위 무대를 찢는 공연이다. 기대 이상으로 출연자 전원이 수준급의 가창력을 발휘하긴 하지만 매 무대마다 감동과 환희를 표하는 심사위원들의 리액션만큼은 아니다. 이런 방식으로 착해서는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무대 연출, 콘셉트, 퍼포먼스의 비중이 무척 높다보니 오히려 가창 능력이 잘 드러나지 않고, 가창을 평가하기 위해 심사위원석에 앉아 있는 발라더 가수들이 감동하는 리액션 이외에 해줄 수 있는 역할이 딱히 없어지면서 더욱더 소구되는 볼거리가 듬성듬성해진다.

차라리 진정 숨겨진 가창력을 보여주고 싶었다면 무대 연출과 퍼포먼스를 걷어내고 가창력과 음색이 두드러지는 어쿠스틱한 무대로 쇼를 진행하고, 평가 자체는 냉정했으면 오히려 시청자들과 소통이 더 원활하지 않았을까 싶은 아쉬움이 남는다.

칼럼니스트 김교석 mcwivern@naver.com

[사진=JT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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