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상호 감독이 ‘정이’를 통해 故 강수연을 추모하는 방식

[엔터미디어=정덕현의 그래서 우리는] (본문 중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실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2194년 기후변화로 인해 해수면이 상승되면서 인류는 우주로 나간다. 지구와 달의 궤도면 사이에 인류가 살 수 있는 쉘터가 마련되고 수십 년에 걸쳐 그 곳으로 사람들이 이주한다. 하지만 일부 쉘터가 스스로를 아드리안 자치국으로 선언하며 지구와 다른 쉘터와의 전쟁이 벌어진다. 넷플릭스 영화 <정이>에서 연상호 감독은 자신이 가장 잘 하는 디스토피아의 세계를 배경으로 가져온다. 그리고 그 곳에 전투 A.I. 정이(김현주)를 탄생시킨다.

윤정이는 이 전쟁에서 전설이 된 용병이다. 마지막 작전에서 큰 부상을 입고 식물인간이 되지만 크로노이드 연구소는 이 전쟁을 끝내기 위해 정이의 뇌를 복제하고 최고의 전투 A.I.를 만드는 실험을 거듭한다. 그런데 이 프로젝트를 이끄는 이는 다름 아닌 윤정이의 딸 서현(강수연)이다. 영화는 최고의 A.I. 전쟁 영웅으로 부활하기 위해 끝없는 고통 속에서 실험을 당하는 정이와 이를 무심하게 실험하던 서현의 감정 변화에 집중한다.

<정이>는 미래 디스토피아 배경의 A.I.가 등장하는 할리우드 영화들이 그러하듯이 화려한 로봇 액션 신들이 먼저 시선을 사로잡는다. 부수고 총으로 쏴 무너뜨려도 다시 일어나 달려들고, 어디선가 똑같이 복제된 또 다른 로봇들의 공격 속에서 정이가 보여주는 액션은 마치 <터미네이터>나 <아이, 로봇>의 한 장면처럼 실감나게 그려진다. 사실 <정이>는 이제 할리우드와 그다지 차이가 느껴지지 않는 SF 장면들을 한국영화에서도 보는 게 이제 어렵지 않게 됐다는 걸 실감케 하는 영화다.

하지만 <정이>가 가진 차별점은 2194년이라는 미래의 세계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A.I.로봇에 대한 서사지만, 그 뇌 복제 기술이 가능해져 계속 의체를 바꿔가며 살아갈 수 있는 상황에서도 드리워져 있는 빈부의 차별을 담고 있다는 점이다. 돈 있는 자들은 충분한 비용을 지불하고 뇌 복제를 통해 의체로 옮겨 살 수 있지만, 돈이 없는 자들은 결혼, 거주 이동의 자유, 아동 입양 등의 기본권의 제한을 받는 B타입(뇌 복제 데이터를 정부기관에 제공하는 대가로 보다 적은 비용이 든다)이나, 기업에게 뇌 데이터를 전부 넘기고 비슷한 클론들을 무수히 만들어내는 C타입(무료)을 선택해야 한다.

즉 클론들이 무수히 만들어질 수 있는 C타입은 사실상 그걸 선택한 인물이 분명한 자기 정체성을 상실함을 의미한다. 똑같은 존재들이 마음대로 만들어질 수 있다면 어떻게 ‘대체불가’라는 한 인간의 고유성을 주장할 수 있단 말인가. 식물인간이 된 윤정이는 ‘전쟁을 끝낼 영웅’을 만든다는 명분으로 C타입을 선택한다. 어린 서현 역시 그것이 엄마의 명예를 지킬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하지만 그건 오판이 된다. 아드리안 자치국들과 타협을 통해 전쟁이 끝날 기미를 보이자 크로노이드 연구소가 연구의 방향을 전쟁 A.I.에서 일상 A.I.로 틀어버리기 때문이다.

이제 정이는 이 지긋지긋한 전쟁을 종식시킬 영웅이 아니라, 일상으로 들어와 누군가를 위해 서비스하고 이용하는 그런 A.I.가 될 처지에 놓인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에이 아이>에 등장하는 섹스 로봇 같은 인간의 쾌락을 위해 활용될 수도 있는 A.I.로 이용될 수 있게 된 것. 그 사실을 알게 된 서현은 충격에 빠진다. 그리고 정이의 뇌에 남아 있는 딸에 대한 마음을 읽어낸 서현은 이제 수십 년 간 ‘전쟁 영웅’이라는 명분하에 갖가지 실험을 당하며 구속되어 있던 정이를 자유롭게 풀어주려 한다.

<정이>는 그래서 정이 역할을 한 김현주의 액션과 더불어 성장한 딸 서현 역할을 한 강수연의 섬세한 내면 연기가 중요한 작품이다. 특히 안타깝게 갑작스레 유명을 달리한 고 강수연의 변화해가는 감정 연기는 <정이>의 메시지이자 여타의 할리우드 SF와의 차별점을 만들기에 충분한 깊이를 보여준다.

처음 정이를 실험하는 장면에서 서현은 별다른 감정적 동요를 일으키지 않는다. 그건 서현이 정이를 엄마 ‘윤정이’가 아닌 하나의 ‘실험체’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서현의 내면을 강수연은 거의 표정에 변화가 없고 감정이 거의 실리지 않는 목소리로 보여준다. 마치 서현이 A.I. 같고 실험을 당하는 정이의 액션 속에서의 절박한 모습이 더 인간 같은 대비를 보여준다.

그래서 이 차갑디 차갑게 느껴지던 서현이 정이에 담긴 엄마의 메시지를 읽어내고 눈물을 흘리는 장면은 더 강한 감정적 진폭을 만들어낸다. 물론 이러한 감정의 폭발이 이 작품을 ‘신파’로 만든 것 아니냐는 불호의 목소리를 만들기도 하지만, 이건 신파의 눈물이라기보다는 인간성의 눈물로 보는 것이 합당해 보인다.

<정이>는 결국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미래 세계를 배경으로 하지만 자본으로 계급화되어 그 기술들 또한 차별적으로 활용되고 돈이 없으면 A.I. 세계에서 복제된 자본의 노예로서 살 수밖에 없다는 걸 보여준다. 서현이 흘리는 눈물은 그래서 엄마에 대한 그리움이나 연민이면서도 동시에 노예화되어 버린 저들을 향한 최후의 보루로서의 인간성의 발현이기도 하다.

복제되어 끝없는 굴욕과 지옥이 펼쳐지는 비인간화된 삶을 살아가는 저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흘리는 눈물. 고인이 된 강수연이 이 마지막 역작에서 흘리는 눈물은 오래도록 우리의 기억에 여운을 남길 것이다. 연상호 감독은 그래서 마치 서현이 엄마 윤정이의 위엄과 존엄을 지키기 위해 구속으로부터의 자유를 선사한 것처럼, 강수연에 대한 위엄과 존엄을 담아냈다. 대배우로서의 면면으로 기억되고 추모되는 고인이 이제 자유롭고 평안하게 눈을 감기를.

정덕현 칼럼니스트 thekian1@entermedia.co.kr

[사진=넷플릭스, 영화 <정이>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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