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내의 자격>을 미증유의 드라마로 만든 원천기술

[엔터미디어=조민준의 드라마 스코프] 아마도 훗날의 역사가들이 ‘2012년의 종편 채널’을 회고한다면, JTBC의 드라마들은 종편이 남긴 희귀한 업적들 중 하나로 기록할 것이다. <빠담빠담>과 <발효가족>을 거쳐 <아내의 자격>에까지 이른 JTBC의 이 놀라운 행보는 동시대 한국의 어떤 채널들보다 혁신적이면서도 완성도 높은 시도들로 이루어져 있으니 말이다.

다른 지면에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여기에는 지상파 채널들의 시청률 지상주의 또한 지대한 공헌을 남겼다. 말하자면 저 세 작품을 오늘날의 지상파에서 온전한 모습으로 만나기란 거의 불가능했을 거라는 얘기다. 하지만 개국과 함께 무엇보다 채널의 인지도 제고가 시급했던 종편 채널들은 이름난 이들을 공격적으로 포섭해야만 했고, 이러한 기회를 통해 작가들과 연출가들은 지상파의 제약에서 벗어난 자유를 얻었다. 이는 또한, 시청률의 논리에서 벗어났을 때 우리나라의 드라마 창작자들이 얼마만큼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가를 확인시켜준 중요한 예시이기도 하다.

황인뢰 PD가 참으로 오랜만에 성인드라마로 돌아오는 JTBC의 <러브 어게인>이 방영을 앞두고 있는 시점이라 조심스럽긴 하나, 이번 주에 종영한 수목 미니시리즈 <아내의 자격>은 그 중에서도 백미로 꼽을 만하다. 내용과 형식 모두에서 이 드라마는 ‘미증유’라고 해도 좋을 만큼, 지금껏 한 번도 만나지 못한 드라마적 경험을 시청자들에게 선사했다.

하지만 굳이 이 작품의 메시지에 대해 말을 더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역시 조현태(혁권)처럼 슈퍼 갑이 되어야 살아남을 수 있어!”와 같은 어이없는 곡해만 아니라면, 이 드라마를 본 모든 시청자들은 가볍지 않은 울림을 받았을 것이고 또한 저마다 사색의 씨앗들을 얻었을 테니까.

다만 결산의 의미로, <아내의 자격>을 미증유의 드라마로 만든 원천기술만큼은 되짚어보고자 한다. 많은 이들이 지적했듯 <아내의 자격>은 같은 연출가와 작가가 만든 드라마 <아줌마>(2000년)를 떠올리게 한다. 정확하게는 <아줌마>의 업그레이드 버전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옳겠다. 그 업그레이드의 내용은 캐릭터 운용의 변화에서 나온다. <아내의 자격>에 이르러 인물들은 가히 무시무시하다고 해도 좋을 만큼 입체적으로 변모했다.

과거 <아줌마>의 캐릭터들은 대부분 블랙코미디에 어울리는 풍자적인 전형성들을 띠고 있었다. <아줌마>는 주인공 오삼숙(원미경) 대 위선적인 지식인들의 구도로 진행된 작품이었던 만큼, 그 상대들은 대학교수, 문화예술계 인사 등으로 각기 자신의 직분에 어울리는 허위를 우스꽝스럽게 표방하고 있었다. 다만 그 행태들의 디테일만큼은 생생하게 살아있었던 것.

하지만 <아내의 자격>의 인물들은 남편인 한상진(장현성)과 그 부모 정도를 제외하면 그러한 전형성에 매몰되어 있지 않았다. 아마도 역할에 인물을 가두기보다는 현실적인 개연성을 고려하여 인물을 창조한 것에 진화의 비밀이 숨어있을 듯한데, 이렇듯 살아있는 캐릭터들이 대거 가세하면서 드라마는 더욱 다층적인 관점을 제공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기본적으로 주인공인 윤서래(김희애)의 시점으로 극을 좇기 마련이지만 어느 시점에는 그녀에게 전적으로 동의해야만 하는가라는 의문에 직면하기도 한다(예를 들어 아이의 준비물을 사러간다며 가족들을 속이고 태오(이성재)를 만나러 나가던 장면이라든지).

하지만 동의하지 못하겠다고 말하는 순간, 또 다른 덫이 기다리고 있다. 그렇다면 그런 윤서래를 비난하는 당신은 그 시부모들의 윤리관에 동의하느냐고. 이렇듯 윤서래가 짐지고 있는 엄마와 아내로서의 수많은 역할들은 남편과 시댁 가족들, 동료 학부모, 애인인 태오 등 다양한 시각에 의해 다양한 형태로 정의되었고 그것은 시시각각 시청자에게 ‘아내의 자격’에 대한 곤혹스런 질문들을 던졌다.

마침내 시댁으로부터 벗어난 후에도 마찬가지다. 여기서 가장 손쉬운 드라마트루기는 인물들과 세계를 이분법적으로 선명하게 구분하는 것일 터. 강남을 절대악으로 상정한 블랙코미디였다면 바깥의 세계는 상대적으로 온정적이어야 하겠지만 <아내의 자격>에서는 또 다른 지옥도에 불과하다. 땀 흘려 일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건강한 손도 이혼녀의 육체 앞에서는 마수로 변한다. 서래에게는 유일한 자아실현의 수단이었던 삽화 일. 그 일을 맡기던 출판사 편집자들의 속물적인 시선은 또 어떤가.

<아내의 자격>의 다면적인 인물들과, 그로부터 파생된 다면적인 세계는 엄중한 관찰자의 시점을 냉혹하리만치 고수해 온 화면 연출을 통해 완벽하게 관철되었다. 음악마저 극도로 자제한 채, 가끔은 믿을 수 없는 롱 테이크로 인물들을 그저 바라볼 뿐인 카메라는, 심지어 시청자들이 주인공인 서래와 태오에게도 손쉽게 몰입하기를 허락하지 않았다. 우리는 심정적으로는 그들에게 동의할지언정 그 삶의 방식은 선뜻 받아들이지 못할 수도 있고, 윤리적으로는 옳다고 생각해도 사회적인 통념의 벽을 의식하게 될 수도 있다.

요컨대 <아내의 자격>은 시시각각 시청자들에게 난처한 질문을 던지며 역할 바꾸기 게임을 제안하는 드라마였다. 그리고 그것은 말 그대로 속도의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한번쯤은 대답해 봐야 하는 질문들이었다.


칼럼니스트 조민준 zilch92@gmail.com


[사진=JT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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