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 있는 자와 타협하지 않고 힘없는 사람들한테 고개를 숙이겠습니다. 위를 바라보지 않고 아래를 살피겠습니다. 가난이 자식들한테 대물림되지 않는 세상을 만들겠습니다. 서민들의 친구가 되겠습니다. 힘없는 사람들의 희망이 되겠습니다.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대한민국을 저 강동윤이 여러분과 함께 만들겠습니다.

- SBS <추적자 THE CHASER> 중에서 대선후보 강동윤(김상중)의 한 마디

[엔터미디어=정석희의 그 장면 그 대사] 몰라서 한 잘못이면 가르쳐서 바로 잡으면 되고, 깨우치고 반성하고 다시는 그 잘못을 반복하지 않으면 된다. 문제는 배울 만큼 배우고 가질 만큼 가진 사람이 자신의 이익을 쫓아 남에게 치명적인 해를 입히는 잘못을 버젓이 저지른다는 것, 그리고 일말의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 아닐는지. 그리고 무서운 건 부지불식간에 나나 내 가족도 피해를 입을 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생때같은 내 딸이 의문의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그나마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구했다 싶었는데 누군가의 음모에 의해 무참히 살해당하고 말았다면? 게다가 모든 증거가 치밀한 계획 하에 감쪽같이 사라지고 결국 딸의 죽음을 조롱하던 범인이 겨우 벌금 200만원 형에 처해졌다면? 억장이 무너질 일이 아닌가.

“지금부터 내가 검사고 이 총이 판사야. 내 딸도 그랬겠지. 살려달라고. 근데 넌 어떻게 했지? 살려달라고, 제발 살려달라고 매달리는 내 딸에게 넌 무슨 짓을 했지? 말해, 네 입으로!” 나 같아도 총을 들고 백홍석(손현주) 형사처럼 법정으로 뛰어들고도 남았을 것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내게는 총이 있을 리 없지만. 설상가상, 머리에 돌만 찼는지 한류스타인지 월드스타인지 하는 피의자 PK준(이용우)의 팬들은 무죄판결에 환호성을 울리고 있었다. 거듭 얘기하지만 이 또한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상황이라는 게 한심하고 무섭다.

마냥 밝고 순수했던 백 형사의 딸 백수정(이혜인)은 자신이 그토록 좋아하는 가수 PK준의 차에 치는 교통사고를 당했다. 엄밀히 말하면 처음엔 PK준을 태운 서지수(김성령)가 사고를 냈고, 자신을 알아봤을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PK준이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수정의 몸을 무참히 깔아뭉개버린 것이다. 그것도 몇 차례씩이나. 수정이 자신의 콘서트 티켓을 손에 쥐고 있었다는 걸 두 눈으로 목격했음에도 말이다. 잔인하기 짝이 없는 PK준, 그리고 PK준과 밀회 중이던 재벌 서 회장(박근형)의 딸이자 대권후보 강동윤(김상중)의 부인인 서지수. 알아서는 아니 될 일을 목격했기에 수정은 억울하게 희생되고 말았다.

더 분통이 터지는 건 수정의 죽음으로 반사 이익을 얻으려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장인 서 회장이 ‘마름이 똑똑하면 지주 아들을 잡아먹는 법’이라며 대권 불출마 선언을 강요하자 강동윤은 아내 서지수가 저지른 사고를 이용하기로 마음먹는다. 아내가 교통사고를 냈고 심지어 뺑소니까지 쳤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공표하겠다고 장인을 협박하는데, 누군가에겐 가슴 아픈 불행이 그에겐 천재일우의 기회가 된 셈이다. 그래서 수정이를 반드시 살려내겠다고 약속했던 백 형사의 죽마고우 윤창민(최준용)은 30억이라는 산더미처럼 쌓인 5만 원짜리 돈다발에 강동윤에게 우정도, 의사로서의, 아니 인간으로서의 양심을 팔았다.








한때 SBS <시크릿 가든>의 김 사장(현빈)에 의해 ‘사회 지도층’이라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지만 비윤리적인 사회 지도층을 너무 많이 봐왔기 때문일까? 나는 재벌이나 대권 후보 같은 사회 지도층의 표리부동과 부도덕보다 믿었던 윤창민의 변심이 더 무섭다. 누군가가 만약 남의 목숨을 빼앗는 일은 아닐지라도 은밀히 내게 수십억을 대가로 윤리에 어긋나는 일을 제안한다면, 내 마음도 윤창민처럼 흔들리면 어쩌나 싶어서.

윤창민을 사주해 수정을 무참히 살해한 강동윤은 대선출마 연설문을 통해 힘없는 사람들의 희망이 되겠다고 외친다. 헛웃음이 절로 나올 일이지 뭔가. 얼마 전 국가 고위층이었는지 경찰의 삼엄한 호위 아래 신호를 무시하고 달리는 고급 승용차 무리를 봤던 게 기억난다. 문득 든 생각. 그들은 굳이 신호를 지킬 일도, 기름 값이며 교통비 인상을 걱정할 필요가 없는 이들이 아니겠나. 지위며 법인카드가 모든 걸 다 해결 해주니까. 그런 이들이 어찌 서민 생활의 애환을 짐작이나 할꼬.

백 형사가 겪고 있는 일련의 억울한 사건들이 드라마 속의 일만은 결코 아니기에, 엄연한 법치국가이건만 법을 어기고도 처벌을 받지 않는 이들이 실제로 존재하는 세상이기에 두렵고 무섭다. 총도 없고 아무런 지위도, 권력도, 배경도 없는 나는 억울하기 짝이 없는 일을 당한다한들 범인을 직접 응징할 수는 없을 터, 아마도 겨우 법원 앞에서 일인 시위나 하게 될 것이다. 부디 백 형사와 같은 재수 없는 일이 나에게는 닥치지 않기를 기도할 뿐. 친딸과 다름없었던 수정의 목숨을 빼앗은 윤창민처럼 돈과 권력에 흔들리지 않을 것도 더불어 기도하련다.


칼럼니스트 정석희 soyow@freechal.com


[사진=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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