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게 <해양경찰 마르코>야, <런닝맨>이야
- 본전 욕심에 주객전도된 연예인 목소리 캐스팅

[엔터미디어=듀나의 영화낙서판] <해양경찰 마르코>의 시사회를 보고 오는 중이다. 이 영화의 정체가 무엇이냐고? 덴마크에서 만든 컴퓨터 그래픽 애니메이션 영화이다. 주인공 마르코는 원숭이들만 사는 작은 독재국가의 경찰관인데, 변신 로봇을 이끌고 침공한 적과 홀로 맞서 싸운다. 거창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코미디 성격이 강한 어린이용 소품이다.

이 정보는 이 영화의 관객들이나 마케팅 담당자들에게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영화를 만든 사람들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주인공 마르코와 여자친구 룰루의 한국어 더빙을 이광수와 송지효가 한다는 것이다. 시사회가 시작할 무렵 극장 안 아이들이 외쳤던 것도 바로 이광수의 이름이었다. 소문으로만 들었던 초통령의 위엄을 확인하는 날이었다.

영화를 보면 주객전도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도입부의 프롤로그부터 우리는 화면 구석에서 주인공의 목소리를 연기한 이광수의 모습을 본다. 영화가 끝나면 이광수와 송지효가 튀어나와 이 영화의 '미션'에 대해 이야기하고, 엔드 크레딧은 역시 두 사람의 녹음 엔지 장면들이 차지한다.

그렇다면 본편은 어떠냐고? 둘의 성우 작업은 괜찮다. 하지만 '미션'에서 짐작할 수 있듯, 그들에게는 노골적인 <런닝맨> 대사들이 주어진다. <런닝맨>이라는 프로그램이 뻔뻔스럽게 언급되고, 미스 멍, 배신의 아이콘, 에이스, 능력자와 같은 익숙한 표현들이 나온다. 눈을 감고 들으면 지금 <해양경찰 마르코>를 보고 있는 건지, <런닝맨>을 보고 있는 건지 구별이 안 갈 정도이다. 몇몇 대사들은 내용과 연결도 안 된다. 예를 들어 마르코는 룰루를 미스 멍이라고 한 번 부르는데, 정작 룰루는 그 장면에서 똘망똘망하기만 하다.

<해양경찰 마르코>는 조금 심한 편이다. 연예인 성우를 내세운 모든 애니메이션 영화들이 다 이렇지는 않다. 가끔 성우들이 자신의 유행어를 외치기도 하지만, <마르코>만큼은 아니다. 물론 이런 경향이 심해질 가능성은 분명 있다. 중저가 애니메이션을 수입해서 연예인 성우를 덧입혀 파는 지금의 유행이 어디까지 갈지는 나도 모른다. 하지만 많은 영화들은 절제를 하는 편이다. 나는 <메리다와 마법의 숲>이나 <주먹왕 랄프>의 더빙은 보지 못했지만, <몬스터 호텔>은 보았는데, 그 영화의 더빙은 컬투의 연예인 캐스팅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상식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몬스터 호텔>을 볼 때 갑갑함을 참기가 어려웠다. 가장 큰 문제는 아무리 상식적인 번역과 목소리 연기를 더해도 더빙은 어쩔 수 없이 원작이 가진 진짜 정보를 차단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특히 애니메이션 영화의 경우 어린 관객들의 수준에 맞추는 것이 필수다. 그러니 나 같은 관객들, 그러니까 유니버설 호러나 기타 장르물에 대해 썩 잘 아는 편이라서 그들의 농담과 인용을 대부분 이해할 수 있는 성인관객들은 더빙을 지나오는 동안 사라지는 진짜 정보가 무엇인지 몰라 갑갑해진다. 고로 난 애니메이션의 경우라 해도 자막을 선택할 권리가 관객들에게 주어져야 한다고 믿는다. 적어도 자막은 더빙처럼 정보를 완전하게 차단하지 않는다.

하지만 자막도 끔찍해지려면 얼마든지 끔찍해질 수 있다. 차라리 자막을 포기하고 원래 대사에 집중하려 해도 끔찍한 자막으로부터 시선을 돌리는 것이 불가능할 때가 있는 것이다.

얼마 전 개봉된 <로봇 앤 프랭크>가 바로 그 끔찍한 경우였다. 은퇴한 금고털이와 가사 로봇의 우정을 다룬 영화 자체는 우아하고 간결한, 거의 초기 아시모프를 연상시키는 SF 소품이었다. 당연하지만 영화의 대사도 그 스타일에 맞추어 깔끔하고 명쾌했다. 특히 공장생산된 기계인 로봇은 당연히도 무개성적이고 담담한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그런데 영화 자막은 이 영화의 분위기를 완전히 망쳐버렸다. 자막에서 로봇은 마치 5년 묵은 인터넷 게시판처럼 서툰 인터넷 용어로만 이야기한다. '나님은 로봇임, 안녕하삼, 방가방가' 정도의 대사를 생각해보시면 된다. 시사회에서도 끔찍했는데, 소문을 들어보니 극장판은 더 심각했던 모양이다.

이 소동은 번역자 모모c가 자신의 블로그에 자막만큼이나 이해불가능한 변명을 늘어놓은 뒤 불꽃처럼 인터넷에 번지기 시작했다. 번역자는 불법 다운로드와 회사 사정에 대해 횡설수설하더니, 뜬금없는 작별 인사를 남기며 글을 끊어버렸고, 분노한 관객이 영문으로 감독에게 이메일을 보낸 통에, 이미 그쪽에서도 사정을 다 알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걸 뭐라고 하나? 국제적 망신이라고 한다.

한국 관객들에게 자막과 더빙은 선택의 여지를 주지 않는 통로이다. 아마 이들을 통로로 삼지 않고 영화를 볼 수 있는 사람들은 이 나라에서 극소수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 통로를 위해 작업하는 사람들은 그 작업에 대해 최소한의 성의를 보여야 한다. 그리고 그 성의의 가장 기본적인 조건은 자신을 숨기는 태도이다.

<로봇과 프랭크>의 자막은 정상적인 두뇌로는 이해가 불가능한 일종의 재난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할 말 자체가 없다. 수입사가 최소한의 양심을 갖고 사고를 마무리하길 바랄뿐이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애니메이션 영화를 수입해놓고, 연예인 캐스팅의 본전을 뽑고 싶어하는 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까짓 거 나도 유행어 한 둘 정도는 이해하겠다. 하지만 여기에도 상식적으로 건너지 말아야 할 선이 있다. 관객들의 반응이 어떻건, <해양경찰 마르코>는 그 선을 좀 많이 넘었다.

칼럼니스트 듀나 djuna01@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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