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야왕>, 욕망의 사다리를 오르는 여자들

[엔터미디어=신주진의 멜로홀릭] 드라마 <야왕>은 1970년대 드라마 <청춘의 덫>의 남성판이라 불릴만하다. 남녀 주인공만 고스란히 뒤바꿔놓았으니 35년 만에 이루어진 <청춘의 덫>의 역전이라고도 볼 수 있다. 김수현 작가 본인에 의해 1999년에 리메이크될 때만 해도 <청춘의 덫>은 낡고 올드하긴 했어도, 사랑과 욕망이 부딪치는 팽팽한 긴장이 그 시기가 맞닥뜨린 시대의 전환을 드러내주었었다.

그러나 <야왕>은 안타깝게도 <청춘의 덫>에서 한 발짝도 더 나아가지 못했다. 작위적이고 상투적인 구도들로 짜 나간 이 드라마에서는 부지런히 꿰어 맞춘 앙상한 이야기만이 빠르게 전개된다. 특히 아이의 죽음이나 변호사인 쌍둥이 형의 설정과 죽음은 하류(권상우)의 복수를 정당화하기 위한 도구로 불편하게 남용되었다. 설정이 독창적이지 않아서 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런 설정들을 너무 뻔하고 안일하게 반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의 문제는 인물들이 공감과 울림을 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왕>은 이 시대의 증후를 드러내고 있다. 우선 절절한 애증의 멜로에서 멜로가 빠진 욕망과 복수의 대결 구도로 이야기는 변했다. <청춘의 덫>의 주인공들은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여자를 배신하고,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남자에게 복수를 행하는 인물들이다. 그런데 <야왕>에서 애증의 멜로는 사라져 버렸다. 단지 여자의 욕망과 배신, 남자의 희생과 복수라는 날선 대립만이 남았다. 그렇다면 치밀하고 치열한 복수극이 되었어야 했다. 그러나 그러기엔 배신하는 쪽이나 복수하는 쪽이나 그 수가 너무나 얕고 치졸하다.

만든 모양새가 어떠하든 어쨌거나 <야왕>은 이 멜로 없는 잔인한 시대의 복수극이다. 그리고 여기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욕망의 사다리를 오르는 여자들이라는 시대적 징후이다. 한 세대가 지나가는 동안 욕망의 사다리를 오르는 쪽은 남자들에서 여자들로 바뀌었다. <세상 어디에도 없는 착한 남자>의 한재희(박시연)와 <청담동 앨리스>의 한세경(문근영)에 이어 <야왕>의 주다해(수애) 역시 목숨을 걸고 아찔하고 가파른 욕망의 사다리를 오른다.



그녀들은 지난 시기의 신데렐라들, <발리에서 생긴 일>의 이수정(하지원)이나 <파리의 연인>의 강태영(김정은)과는 다르다. 가난하지만 밝고 쾌활했던 평범한 여자들과는 달리, 한재희나 한세경, 주다해 같은 지금의 주인공들은 하나 같이 뛰어난 머리와 능력을 지녔다. 타고난 재능과 미모, 남다른 의지와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녀들이 자력으로 자신들의 가난하고 비천한 현실을 벗어날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래서 그녀들은 자신이 이룰 수 있는 그 이상, 자신이 다다를 수 있는 그 너머를 욕망한다.

이 욕망하는 여자들이 또 다시 신데렐라가 되는 것은 필연적 귀결이다. 그것도 이 시대 최고의 덕목인 ‘노력형’ 신데렐라. 잃어버린 구두를 벗어버리고 면접장소에 들어선 주다해의 맨발의 투혼 뒤에는 그녀의 구두 한 짝을 주운 왕자 백도훈(정윤호)이 있다. 주다해가 “남자 하나 붙잡아서 신분상승하고 싶어 하는 천박하고 구역질나는 애.”라는 것을 도훈의 누나이자 엄마인 백도경(김성령)은 바로 꿰뚫어 본다.

그러나 그녀들은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파국을 맞을 때까지 결코 포기하지 않았던 한재희나 끝까지 물러나지 않고 마침내 청담동에 입성한 한세경처럼, 주다해 역시 어떤 악행도 마다 않고 어떤 방해도 물리친다. 그녀가 하류에게 하는 말 중 유일하게 진실한 말은 “오빠, 미안해. 나 오빠한테 못 돌아가. 오빠, 진짜 미안해. 오빠가 무슨 짓을 해도 나 못 막아.”라는 것이다. 더욱이 그녀는 그 누구보다 더 높이 올라간다. 그런데 그녀가 대통령이 아닌 영부인이 된다는 사실이 또한 이 드라마를 신데렐라 구도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게 만든다.



이렇게 욕망하는 여자들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은 이중적이다. 한편에 기대와 선망이 있고, 다른 한편에 두려움과 공포가 있다. 가난과 굴종에서 벗어나 부유한 환경에서 살기를, 내 아이가 남들보다 더 좋은 교육을 받고 더 많은 것을 누리고 살기를, 그녀들은 대다수 사람들의 신분상승의 욕망을 대리한다.

물론 더욱 큰 것은 욕망하는 여자들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이다. 그녀들의 악행에 대한 두려움이 아닌 그녀들의 욕망에 대한 두려움. <청담동 앨리스>의 차승조(박시후)가 보여준 순수한 사랑에 대한 신경증적 집착은 뒤집어 보면 누군가 자신을 이용하고, 자기 것을 빼앗아갈 거라는 상층부르주아계급 남성의 항시적인 공포와 두려움에 다름 아니다.

<야왕>에 오면 그러한 공포와 두려움이 복수와 단죄의 방식으로 치환된다. 욕망의 사다리를 오르는 여자와 그녀를 끌어내리려는 남자. “내가 가면을 벗기고 날개를 꺾어버릴 거니까.” “더 열심히 해서 더 높이 올라가라. 높은 데서 떨어져야지 추락의 고통을 확실하게 느끼지.” 자신이 버려졌다는 좌절, 여자의 부당한 성공에 대한 분노, 그리고 자신은 결코 그녀에게 이르지 못할 것이라는 공포와 두려움이 하류를 복수로 몰아간다. 욕망의 사다리를 오르는 여자들은 처벌되어야만 하고, 그러기 위해 그녀들은 점점 더 나쁜 악녀가 되어야만 한다.

칼럼니스트 신주진 joojin913@entermedia.co.kr

[사진=SBS]

저작권자 ⓒ '대중문화컨텐츠 전문가그룹' 엔터미디어(www.entermedia.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저작권자 © 엔터미디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