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터미디어=정다훈의 문화스코어] 지난 4일 개막한 연극 <해변의 카프카>를 보며 ‘내 안에 나도 모르는 미궁’에 대해 생각했다. 미궁(迷宮)의 원형은 창자이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인들이 짐승 혹은 인간의 내장을 꺼내 미래를 점쳤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어느 지점까지는 들어갔다 무사히 돌아올 수 있지만 그 어느 지점을 넘어가면 길을 잃어 못 빠져 나오는 미궁과도 같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세계가 이렇게 멋지게 무대로 구현될 수 있다니. 벼락을 맞은 것 같은 경험이었다.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는 글자만으로 살려 낸 하루키 식 ‘벼락’이자, 연극이 펼쳐진 환상적인 골프장에서 만나 절대 피할 수 없었던 ‘벼락’말이다.

매년 노벨 문학상 후보에 오르는 세계적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최근 새 장편소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의 순례의 해>를 내 놓아 다시 한 번 하루키 열풍을 예고했다.

그의 역작 <해변의 카프카>는 2008년 프랭크 갈라티 연출에 의해 미국 시카고 스테판 울프극장에서 초연된 뒤 2012년 일본 사이타마 예술극장에서 공연됐다.

소설 <해변의 카프카>는 아버지에게 오이디푸스 왕의 비극을 암시하는 예언을 듣고 자란 소년과 모든 기억을 잃어버리는 대신 고양이와 대화 할 수 있는 능력을 얻은 노인 ‘나카타’의 현실과 꿈 그리고 환상을 오가면서 이야기가 펼쳐져 쉽게 요약하기 힘든 작품이다. 하지만 희곡을 직접 번역하고 연출한 김미혜 연출의 연극 <해변의 카프카>는 훨씬 더 명확한 이미지가 그려졌다.

주인공 다무라 카프카의 아버지는 세계적인 조각가 다무라 고이치로 혁신적인 작품을 주로 발표했다. 즐겨 다루던 주제는 인간의 무의식으로 대표작은 '미궁'이다. 여기서부터 뭔가 새로운 이야기가 상상되지 않는가.



운명에 맞서려는 소년 카프카, 아들을 만든 다음 쉽게 부숴버릴 수 있는 하나의 조각 작품 이상으로 여기지 않는 아버지의 관계를 보면, 하루키가 평생 부성의 억압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작가 프란츠 카프카에서 모티브를 가져온 걸 알 수 있다.

길 잃은 까마귀 ‘카프카’는 지나온 삶을 버리고 강해지고자 한다. 불공평, 불운, 슬픔 같은 외부의 힘을 조용하게 견뎌낼 수 있고 받아들일 수 있는 그런 강함이다. 그런 카프카의 인생 여행길에 길동무이자 말동무인 ‘사쿠라’와 ‘오시마’, 더 나아가 신비로운 여인 ‘사에키’가 나타난다. 타인이었던 이들이 꿈을 통해 서로의 인생에 발을 들여놓게 된 것.

인간은 누구도 혼자서는 살 수 없다. 연극은 이런 사실 하에 진짜 삶을 살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사쿠라’(카프카의 누나 일지도 모르는), 여성의 육체에 남성의 정체성을 가진 독특한 인물 ‘오시마’를 불러냈다. 특히, ‘오시마’의 입에서 들을 수 있는 ‘플라톤의 향연’ 중 아리스토파네스가 말한 인간 유형 세 가지 이야기는 사에키와 카프카의 아버지가 잃어버린 시간의 기억을 되찾아오게 만든다.

연극은 소년 카프카의 이야기와 노인 나카타의 이야기를 오가며 진행된다. 그림자 반이 떨어져 나간 인간인 나카타와 사에키의 처음이나 마지막 만남은 이야기의 마지막 퍼즐을 풀게 만든다. 우리가 사는 세상과 비슷하지만 또 다른 세상이 계속 펼쳐지는 식이다.



제목 역시 강물과 바닷물이 뒤섞여 흘러가는 ‘해변’의 까마귀(카프카)이다. 결국 작품 속에서 만나는 인물들은 바람이 세게 부는 가지 위에 앉아있는 까마귀들이자, 빗나간 시간의 모퉁이에서 잠들어 있던 해변의 인간들인 것이다. 작품 속에선 카프카의 또 다른 자아인 까마귀로 불리는 소년이 함께 등장하기도 한다.

상호 관계에 대한 메타포가 매혹적인 작품이다. 즉 밖에 있는 사물들은 네 안에 있는 것들의 투영이자 자신 안에 있는 것들은 밖에 있는 사물들의 투영이란 의미이다. 예이츠의 ‘꿈속에서 책임이 시작된다’는 말도 들을 수 있다. 책 한권 없는 텅빈 도서관 같은 나카타와 악명높은 고양이 킬러 조니워커, 1년 내내 알로하셔츠를 입는 열혈 청년이자 긴 스토리는 싫어하는 호시노로 이어지는 연결 끈이 흥미롭다.

작품 속엔 여러 가지 이야기가 중첩돼 있다. 카프카의 작품. ‘성’. ‘심판’, ‘변신’, ‘유형지에서’, 나치 본부로부터 유대인을 최종 처리하도록 지시받은 고문기술자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에 관한 책, 앙리 베리그송 '물질과 기억'등 은 극중 인물들의 숨겨진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단서들이다. 특히 커넬이 불러낸 철학 전공 섹스머신 여인이 호시노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속에서 많은 상상력을 펼칠 수 있다. 단 순수한 호시노가 보기엔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이자 골 때리는 이야기들이다.



작품 속의 또 다른 작품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해서 미리 겁 먹을 필요는 없다. 중요한 건 입구의 돌이 있다는 것, 그 돌을 하루키가 만들어낸 어렵고 긴 스토리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였을망정 유머러스한 호시노가 들어 올렸다는 점. ‘벼락 같은 연극’을 맛 보았다는 점이다.

실제 연극 후반엔 번개가 치고 둥글고 단단한 입구의 돌이 들리며 입구가 열린다. 그들처럼 어딘가에서 또 다른 세계로 향하는 입구를 찾았다면 이미 당신은 뭔가를 얻은 것이다. 세상의 끝 어디에도 내리는 비를 맞으며 카프카는 어른이 되기 위한 단단한 문지방을 넘었다. 오시마가 씌어주는 파란 우산에게 따뜻함이 느껴진다.

소설에는 없는 ‘문지방을 형상화한 프레임’을 에필로그와 프롤로그에서 만날 수 있다. 하루키의 환상적인 작품 세계와 맥을 같이 하며 샤막을 무대에 올려 몽환적인 이미지를 강조했다. 가벼운 연극이 넘쳐나는 대학로에서 간만에 만난 신선한 작품이었다.

다만 몇몇 장면에서 대사에 숨겨진 의미가 충분히 객석까지 전달되지 못한 경우가 있었다. 소설에서 바로 튀어나온 것 같은 나카타 역 배우 이남희와 호시노 역 배우 윤정섭, 오시마 역 배우 김준호의 캐릭터 궁합이 좋다.

배우 이호협, 정홍섭, 이남희, 강지원, 장지아, 윤정섭, 김준호, 이석우, 장용철, 전민규 등이 출연한다. 공연은 6월 16일까지 동숭아트센터 동숭아트홀에서 만날 수 있다.

공연전문기자 정다훈 ekgns44@naver.com

[사진=pac 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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