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흘 간 함께 한 ‘리골레토’ 관람기

[엔터미디어=정다훈의 문화스코어] 노블아트오페라단 신선섭 단장은 지난 24일부터 26일까지 3일 내내 마음 편히 오페라 <리골레토>를 관람하지 못했다.

첫 날 예술의 전당 무대에 오른 주역 바리톤 김동규의 컨디션은 양호하지 못했다. 소리는 윤기 없이 툭툭 끊겼으며, 캐릭터 상 ‘리골레토’는 수십 년 동안 온갖 멸시와 천대를 받으면서 살았을 텐데 꼽추로서의 열등의식도 거의 느낄 수 없었다. 소리는 물론 캐릭터가 흔들려 아슬아슬한 레이스를 지켜보는 듯 했다. 다행이 중간에 주역에 교체되는 일 없이 공연을 끝마쳤다. 이를 지켜 본 신 단장의 속 마음은 바짝 바짝 타들어갔을 게 한 눈에 보였다.

사건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마지막 일요일 공연까지 작은 사고가 끊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선, 원래 공연 시작인 5시보다 약 15분정도 늦게 공연이 시작 됐다. 곧 대다수 관객들은 눈치 채지 못할 정도였지만, 3일 내내 공연을 관람한 필자의 눈엔 성악가와 지휘자 사이의 작은 불일치가 감지됐다. 아니다 다를까, 인터미션 시간이 되자 ‘안젤로 잉글레제의 건강상의 이유로 1막을 서울필하모닉오케스트라 전임지휘자 김봉미가 지휘했다’는 안내 방송을 들을 수 있었다. 마지막까지 단장의 마음은 편치 않았을 듯 싶다.

그럼에도 제4회 대한민국 오페라페스티벌 세 번째 참가 작품 노블아트오페라단 오페라 <리골레토>를 보며 ‘브라보’를 외쳤다. 첫째 날은 스파라푸칠레 베이스 서정수와 막달레나 메조소프라노 백재은을 향한 찬사였다. 살인 청부업자의 포스를 풍기면서 등장한 서정수는 카리스마 가득한 보이스는 물론 깔끔한 저음으로 귓가를 사로잡았다. 리골레토에게 본인의 이름을 확실히 상기시키면서 사라지는 장면 역시 관객이 자꾸 뒤돌아보게 할 만큼 존재감이 강했다. 백재은 또한 안정적인 저음으로 3막을 장식했다.

둘째 날은 <리골레토>의 숨겨진 뒷 이야기를 보는 듯 했다. 그 중에서도 관객이 오페라를 보러 온 보람을 느끼게 한 가수는 바리톤 박정민과 테너 이승묵이었다. 박정민은 딸 질다가 사라진 뒤 궁전으로 돌아 와, 슬픔을 감춘 채 ‘라라라~~라라라~’흥얼거리는 장면에서 대 아리아 ‘천벌 받을 이 몹쓸 가신들’로 이어지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그 감정선을 드라마틱하게 펼쳐 놨다. 지금까지 국내 가수들 중에서 이 감정선을 이렇게 눈물 나게 살려내는 가수는 그가 유일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다.



'리골레토의 헌신'이라고 칭할만한 베르디아노 바리톤 소리도 일품이지만 여전히 박수치게 만든 건 모든 장면 하나 하나를 허투로 하지 않는 점이었다. 끊임없이 꼽추로서의 험난한 발걸음과 아비로서 딸을 생각하는 마음은 무대 저 끝까지 전달됐다. 그날은 질다 역 소프라노 김희정과 함께 낮 무대에 이어 저녁 무대까지 서 주역으로서 쉽지 않은 하루 2회 공연을 한 날이다. 두 주역 모두 조금 지친 기색이 보이긴 했지만 끝까지 최선을 다했다.

새로운 공작 ‘만토바’의 발견은 관객으로 하여금 콧노래를 부르게 했다. 대개 오페라 <리골레토>에서 리골레토가 드라마의 90% 이상을 가져가기 때문에 ‘만토바’는 못된 바람둥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경우가 많았는데 이번엔 달랐다. ‘리골레토와 질다에게 찾아온 나쁜 남자 만토바’란 타이틀을 붙여도 될 정도로 '만토바'가 드라마에 힘을 불어넣었기 때문이다.

테너 이승묵 만토바를 한마디로 정의하면 '나쁜 남자'였다. 질다가 '콸티에르말데' 라고 이름을 속인 가난한 남자에게 끌리는 이유도 납득이 됐고, 막달레나가 오빠에게 공작을 죽이지 말라고 당부하는 이유도 알 것 같았다. 수 차례 <리골레토>공연을 보며 만토바에게서 정서적 호소력을 느끼긴 어려웠는데 이승묵의 다채로운 소리와 연기는 관객을 끌어들이는 힘이 분명 있었다.

그렇다면, 보다 젊은 팀으로 구성 된 마지막 날 <리골레토>는 어떤 감동을 이끌어냈는가. 우선 애 끓는 아비 리골레토, 애 간장을 녹이는 난봉꾼 만토바, 애가 타는 여인 질다가 선명히 대비 돼 관객의 가슴에 절절하게 파고 들었다.



바리톤 정승기의 폭발하는 성량 안에 담긴 복수와 부성애는 그 어느 누구도 범접하지 못할 정도로 강렬했다. 마지막에 딸의 죽음 앞에서 ‘저주’를 외치는 피 맺힌 절규는 사랑하는 딸을 잃은 아비의 타 들어가는 내면을 설득력 있게 내 보였다. 물론 아직은 젊은 바리톤으로서 약창의 섬세한 꾸밈이 노련하진 못했지만 생동감 주는 힘찬 호연에 관객들은 환호를 내 보였다.

국내 첫 데뷔인 테너 신상근이 선보인 ‘만토바’는 오페라 마니아는 물론 아직은 오페라가 생소한 어머님 관객까지 사로잡아 스타 탄생을 예고하게 했다. 우선, 여자의 마음을 능수능란하게 사로잡을 수 있는 연애 기술을 발휘하는 공작 임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게 장면 장면에 설득력을 부여했다. 객석에선 ‘저 놈이 나쁜 놈이네’란 추임새도 간간히 들려왔다. 곧 매끄러운 고음과 고운 약창은 물론 강성과 약성의 대비의 폭을 매끄럽게 대비시키는 유연한 프레이징은 청중을 열광시켰다. 조금 더 욕심을 내자면, 만토바의 ‘유쾌한 태평함’을 보다 돋보이기 위해 3막의 여관 씬 캐릭터를 보다 달콤하게 정리했으면 하는 점이다.

질다 역의 소프라노 강혜명은, 처음으로 ‘사랑과 배신’을 알게 한 만토바 공작을 용서한 뒤 결국 자기 자신을 희생하는 청순한 이미지를 적절하게 표현했다. ‘그리운 그 이름’에서 사랑에 눈먼 여인의 간절한 소망을 담아 매끄러운 고음을 선 보였다. 고급스럽고 질감이 좋은 소리에 더해 아버지 리골레토와의 감정선이 조그만 더 입체감 있게 표현되길 기대해 본다.

베르디의 걸작 오페라 <리골레토>는 궁정광대 꼽추 리골레토가 자신의 딸 질다를 겁탈한 만토바 공작에게 복수하기 위해 살인을 청부하지만, 정작 딸이 그 함정에 빠지게 된다는 비극이다.

이번 <리골레토>는 서곡 연주시 어린 질다(조민지)가 등장해 아비‘리골레토’가 자신의 품 안에서 어떤 해로움도 닿지 않게 키우고 싶지만 어느 순간 사라지는 상황을 보여 줘 작품 전체의 의미를 압축적으로 전달했다. 또한 오페라 메신저 윤정인이 공연 시작 전에만 나오는 게 아닌 무대 전환 시간에 나와 작품의 개괄적인 설명을 해주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노블아트오페라단은 ‘이탈리아 부세토 베르디페스티벌 오리지널 프로덕션 초청공연’이라는 타이틀을 붙었으나 실제 공연에선 어떤 특징도 찾을 수 없었다. 안젤로 잉글레제가 지휘한 서울필하모닉 역시 정교한 연주를 들려줬다고 평하기는 힘들 듯 하다. 관악은 물론 현악의 불일치가 계속 작품에 온전히 빠져들지 못하게 했다. 파올로 보시시오 연출가(국내연출 김숙영)는 클래식한 연출로 공연을 선 보였다. 아르테미오 카바시가 무대의상을 책임지고, 노블아트오페라합창단, 씨어터키브 무용단이 작품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대한민국 오페라페스티벌’은 <리골레토>에 이어 고려오페라단의 창작오페라 <손양원>을 선보일 예정이다.

공연전문기자 정다훈 ekgns44@naver.com

[사진=정다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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