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각보다 시각적으로 관객을 설득한 ‘처용’

[엔터미디어=정다훈의 문화스코어] 지난 8일과 9일 예술의전당 오페라하우스 무대에 오른 오페라 <처용>(극본 김의경, 가사 고연옥)은 ‘2013년 서울에 내려온 처용 이야기’였다. 작품은 9세기 말 통일신라 헌강왕 시대를 배경으로 하지만 무대는 신라의 고도 서라벌이 아닌 서울의 압구정 혹은 청담동을 보는 듯 했다.

브라운의 현대적 코트와 머플러까지 한 젊은 구원자 처용은 부패와 타락으로 물든 신라에 대한 ‘탄식과 경고의 노래’를 들었음에도 지상으로 내려온다. 하지만 절대로 변하지 않는 인간들로 인해 처용이 구원자로서의 사명을 달성하기는 쉽지 않다. 게다가 혼탁한 사회에 내던져진 가난한 기생 가실을 버리면 신라를 구할 수 있다는 예언까지 듣게 되면서 결국 ‘사랑과 구원’ 모두를 잃는다.

작곡가 이영조씨가 만든 창작 오페라 <처용>은 1987년 초연 이후 2013년 새로이 태어났다. 전통적인 선율과 리듬 안에 각각의 등장인물을 상징하는 음악적 주제가 반복 돼 바그너의 유도동기(Leitmotif) 기법을 떠올리게 하는 이번 작품은 한국 전통 음악과 세계 음악과의 조화로운 만남을 시도했다. 특히, 처용이 부르는 시조창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와 ‘승려의 노래’는 서양의 창법으로 한국적인 가락을 살려 내 인상적이었다.

단, 무조음악과 창작오페라와의 만남을 시도 해 일반 관객들의 호불호가 갈리기도 했다. 현대음악을 두려워하는 청중이라면 음악 자체에 빠져들긴 힘들어 보였으니 말이다.

연출가 양정웅은 “향락과 부패로 망해가는 신라를 구하러 온 ‘처용’은 배금주의에 허덕이며 휴머니티를 잃어가는 우리의 자화상일지도 모른다”고 밝혔다. 연출의 의도하에 무대미술(임일진)과 의상(김영지), 조명(여국군) 역시 전통적인 요소들을 현대적 감각으로 상징화▪ 시각화 했다.



미니멀리즘을 고려한 무대 장치는 와이어를 이용한 옥황상제가 등장하는 초반 ‘천상의 장면’ 부터 관객들의 눈을 사로잡았다. 이어 지상에 선 처용 앞에 나타난 가실, 그리고 역신과의 대면을 거쳐 타락에 빠진 신라의 모습을 개탄하고 경고하는 노승의 모습이 2막을 채웠다. 3막은 가실의 죽음과 역신의 승리 그리고 옥황상제의 최후의 심판을 가파른 역삼각형 무대 위에서 입체적으로 그려냈다.

원작을 현대판 미디어와 황금감옥으로 끌고 온 연출은 한 편의 연극을 보듯, 무대에 실시간으로 영상을 비췄다. 무대 사이드에선 캠코더로 영상 취재를 하는 장면이 직접적으로 펼쳐지기도 했다. 무대 프레임엔 수십 개의 형광등을 배열해 차가우면서도 기하학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자본과 물질의 공허함을 상징하는 금색 세트는 2막 팔관회의 연등 장면에서 더욱 극대화됐다.

고연옥 작가는 남성중심의 웅장한 서사로 이루어진 원작을 개작하며 “‘거리의 여자들’과 ‘처용과 세 귀신’ 장면에서 여성합창과 중창을 보완해 남성성과 여성성의 대비를 이루도록 했다”고 밝혔다.

다만, 국립오페라단 <처용>은 청각보다는 시각적인 면이 관객을 설득했다는 점이 아쉬움을 갖게 했다. 또한 각각 캐릭터의 특징과 극의 메시지가 객석에 전달되기 보다는 무대 구성에 주의를 빼앗기거나, 합창단(그란데오페라합창단)보다는 연기자를 무대 전면으로 내세워 합창의 효과가 반감되기도 했다.



또한 가수들의 기량을 충분히 살려내지 않은 점에서 작품 자체의 호감도가 떨어졌다. 처용 역을 맡은 테너 신동원 과 가실 역을 맡은 소프라노 임세경은 모두 풍부한 성량으로 고난도의 드라마틱한 가창을 소화해냈으나, 관객을 제 편으로 끌어들이진 못했다. 처용은 ‘고뇌하는 인물’ 거기서 더 나아가지 못했으며 가실이 왜 구원을 꿈꾸는지 충분히 납득이 되지 않았다. 대본 자체의 문제인지, 캐릭터 연구의 부족인지, 그도 아니면 둘 다의 문제일 수도 있겠다.

역신 역 바리톤 우주호는 ‘역신의 위장’ 장면에서 열연을 펼쳤으나, 과연 관객들이 이 장면을 제대로 이해했을지는 의문이다. 역신이 처용으로 위장했다는 시놉시스를 보지 않는 이상 그 사실을 눈빛과 영상만으로는 이해하기 힘들었으니 말이다. 세 주역의 드라마적 구성이 탄탄하지 못하다는 점이 작품의 약점으로 작용했다.

그나마 서민들의 삶은 생각하지 않은 채 흥청망청 놀기에 바빠 결국 황금과 함께 추락하는 신라의 임금 역을 맡은 바리톤 오승용의 존재감이 돋보였다. 특히, 단순히 흥에 들뜬 임금이 아닌 천상을 버린 세상 앞에서 공허하고 쓸쓸한 군주의 눈과 음성을 덧입혀 캐릭터를 살아 움직이게 했다. 다른 인물들이 배역에 온전히 녹아들지 못한 인상이었다면, 오승용은 배역 과 관객과의 사이에 생긴 유리벽을 깨고 몰입도를 높여 준 점이 박수 치게 만들었다.

지휘자 정치용은 건축적인 대칭구조물 안에 존재하는 쉽지 않은 현대 음악의 화성, 남성중심 오페라의 웅변적인 선율과 합창을 잘 살려내며 프라임필하모니오케스트라를 지휘했다.

2013 대한민국오페라 페스티벌 마지막 작품인 <처용>엔 테너 이원종(처용 언더스터디), 베이스 전준한(옥황상제), 바리톤 박경종(노승), 소프라노 김지현(붉은마녀), 고승희(검은마녀), 메조 소프라노 홍유리(흰마녀) 등이 함께했다.

공연전문기자 정다훈 ekgns44@naver.com

[사진=국립오페라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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