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자들과 함께 돌아 본 내 삶에 숨은 ‘알리바이’

[엔터미디어=정다훈의 문화스코어] 지난 3일 국립극단 소극장 판에서 개막한 연극 <알리바이 연대기>는 발터 벤야민이 제안했던 과거를 향해 내딛는 ‘호랑이의 도약(Tigersprung)을 떠오르게 했다. 작가 겸 연출 김재엽은 “‘알리바이 연대기’ 속 시공간은 섬광처럼 번쩍이는 어떤 기억을 움켜잡기 위해 과거로 뛰어드는 공간이다”며 “과거의 형상을 움켜잡아서 그것으로 현재를 진짜 위기상태로 만드는 ‘호랑이를 도약하게 만드는 공간’이 될 것이다”고 연출의도를 전했다.

<알리바이의 연대기>는 개인의 권리를 억압하는 격동의 한국 현대사 속에서 자신을 지켜내야 했던 아버지와 두 아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한 개인의 사적인 연대기를 바탕으로 그 사이를 파고드는 역사의 한 순간을 정밀하게 조명해보는 다큐멘터리 드라마 형식이다.

연극은 1930년 출생인 아버지(고 김태용)의 실제 연대기를 중심으로 1964년 출생인 형 재진과 1973년 출생의 필자(작,연출)인 재엽 자신을 포함한 한 가족의 사적인 시공간에서 출발한다. 작품 제목인 <알리바이 연대기>는 한 개인의 인생 연대기와 나란히 공존하는 한국 현대사의 연대기를 의미한다.

막내아들의 훈련소 앞에서 아버지가 흘린 눈물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아버지의 일생을 추적해 보면서 극은 시작된다. 재엽(정원조)이 직접 화자로 나서 극을 열고 닫는다. 지극히 사실적이고 사적인 이야기에서 출발하지만, 국민으로서 한 개인이 자신의 인생에서 국가라는 존재와 맞닥뜨리게 되는 순간을 지나 곧 굴곡진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개인들이 어떻게 ‘알리바이’와 함께 해왔는지를 성찰해 보게 한다.

무대는 책이 숲처럼 우거진 서재를 좌우에 둔 채 펼쳐진다. 개인의 알리바이, 사회의 알리바이, 역사의 알리바이가 중첩되는 순간들이 흥미롭다. ‘앞에 나서지도, 뒤에 처지지도 않는 중간, 즉 ’가운데의 삶‘을 선택한 아버지의 알리바이, 아버지에게 선물 받은 장난감 총과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손가락 총을 가슴에 새긴 83학번 형의 알리바이, 역사가 제대로 알려주지 않은 역대 대통령들의 알리바이, 아버지의 시공간을 추적하며 ’진실과 함께 할 수 없으면 알리바이는 계속 생산된다‘는 걸 알게 된 재엽의 알리바이가 관객과 만나는 순간, ’쨍‘하는 깨달음이 온다.



역사는 모든 사람을 기억하지 않는다. 역사에 기록되는 사람은 승리자다. 이런 역사의 공허함을 독일의 철학자이자 문화비평가 발터 벤야민은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에서 언급했다.

연극의 시선 역시 승리자의 시선이 향하고 있는 미래가 아니다. 거짓된 알리바이의 작성자들 때문에 불행한 삶을 살게 된 잊혀지고 기록되지 못한 이들의 비명이 들려오는 과거이다. 정직한 알리바이가 새롭게 쓰여져야 할 공간에서 마주한 부자의 마지막 상봉 장면이 동시대의 소시민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돌아보게 한다.

<알리바이 연대기>엔 내 아버지의 헌책 냄새, 역사의 자전거 굴러가는 소리, 서민들의 짜디짠 간장 냄새, 83학번 내 형제의 체류탄 냄새, 병원 냄새가 들어있다. 부끄러운 조상이 되고 싶지 않다던 장준하 선생의 숨결도 넘실댄다. 무엇보다 거짓 알리바이 연대기로 고통 받은 이들의 체온이 살아있는 연극이다.

국립극단 젊은 연출가전 시리즈로 공연되는 <알리바이 연대기>는 15일까지 국립극단 소극장 판에서 공연된다. 아버지 김태용 역할은 중견 배우 남명렬이 맡아 잔잔하면서도 뜨거운 연기를 선보인다. 맑은 인상의 배우 정원조가 아들 ‘재엽’ 역을 맡아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존재감을 보였다. 이외 배우 지춘성, 이종무, 전국향, 유준원, 유병훈, 백운철이 출연한다.

공연전문기자 정다훈 ekgns44@naver.com

[사진= 정다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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