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안소설’, 당연한 현실 무시하고 영화가 되나

[엔터미디어=듀나의 영화낙서판] 신연식의 <러시안 소설>에서 가장 신경쓰이는 것은 제목이다. 왜 <러시아 소설>이 아니라 <러시안 소설>인가? 이상하게 들리지 않는다면 이를 다른 나라에 대입해 보자. '러시아 소설'을 '러시안 소설'이라고 부르는 것은 '프랑스 소설'을 '프렌치 소설'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다. 하긴 비슷하게 괴상한 제목으로 <캐리비안의 해적>이 있다. 이 역시 <카리브해의 해적>이라고 멀쩡하게 번역될 수 있는 제목이다.

제목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하기로 하고, 이제 영화 이야기를 하기로 하자. 영화가 시작되면 우린 신효라는 젊은 남자를 만나게 된다. 교육도 충분히 받지 못했고 독서량도 부족한 그는 김기진이라는 작가의 작품을 접한 뒤로 소설가가 되겠다는 야심으로 살아왔다. 그는 김기진이 만든 우연제라는 젊은 작가들의 작업실에서 여러 사람들과 교류하는데, 그들 대부분은 신효의 작품을 높이 평가하지 않는다.

신효와 주변 사람들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영화의 절반은 매혹적이다. 신연식은 네 사람의 인물을 중심으로 그들 각자의 관점과 그들의 경험을 통해 나온 텍스트들을 드라마 위에 겹쳐놓는데, 이렇게 되자 굉장히 문학적인 장치들이 영화라는 영상매체와 결합되어 독특한 구조를 만들어낸다. 그 과정을 통해 그려지는 캐릭터들은 재미있고 현실적인 무게를 갖고 있으며 유머도 풍부하다. 그 중 열등감과 자부심이 최악의 비율로 섞여있는 신효는 기가 막힌 구경거리이다. 그가 여공 출신의 성공한 작가 경미에게 수작을 걸면서 '나이도 어린데'를 끝없이 반복할 때는 배꼽이 떨어져 나가는 줄 알았다. 웃기기도 하지만 기가 막히게 정곡을 찌른다.

전반부의 유일한 단점은 이들의 이야기가 영화 시놉시스에 나와 있는 설정의 준비작업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한 번 시놉시스를 읽어보자. '27년 간의 식물인간 상태에서 깨어난 소설가 신효.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했던 젊은 시절과는 달리 현실에서 그는 '전설'이 되어 있다. 그러나 그는 출판된 소설들이 자기가 쓴 원작과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고, 의문을 풀기 위해 '우연제'와 단서를 쥐고 있는 27년 전의 인물을 찾아 나서기 시작한다...'



재미있지 않은가? 구미가 당기지 않는가? 이 정도면 전반부를 보면서 조바심을 내며 후반부를 기다릴만 하지 않는가? 그런데 슬프게도 영화는 본론인 후반부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내리막이다.

우선 이 이야기 자체가 믿을 수 없다. 영화의 설정은 작가라는 종의 가장 기본적인 본능을 무시하고 있다. 단 한 권의 책도 출판한 적이 없는 무명 작가가 27년 뒤에 깨어나보니 전설의 작가가 되어 있다. 이런 상황에서 주인공이 가장 먼저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자기 책을 확인하는 것이다! 자기 소설이 담겨 있는 종이책을 만지고 읽는 일이야 말로 작가 지망생이 꾸는 꿈의 절정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효는 어떤 대학생이 무심하게 내용을 알려주기 전에는 책을 건드리지도 않는다. 그러면서 자기 소설에 대한 강연을 하고 다닌다. 이게 가능한 일인가? 여러분이 이 말을 믿는다면 로미오와 줄리엣이 결혼 첫 날 밤에 손만 잡고 잤다는 것도 믿을 것이다.

그만큼이나 어이가 없는 것은 책의 내용이 바뀐 것을 알아차렸을 때 신효가 보이는 반응이다. 그는 친척인 출판사 사장을 찾아가 묻는다. "너, 내 책을 손 봤냐?"

이게 무슨 소리인가. 손을 보는 것이 당연하지. 영화의 설정에 따르면 신효는 아이디어는 풍부하지만 문법과 맞춤법 때문에 상당히 애를 먹는다. 이런 작가가 식물인간인 상황이라면 당연히 편집자가 엄청나게 손을 볼 수밖에 없다. 신효처럼 핸디캡이 심각한 작가가 아니라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작가가 원고를 끝냈다고 책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그건 일의 절반에 불과하다. 편집 작업은 나머지 절반이다. 심지어 영미권에서는 편집 작업이 집필할 때보다 더 오래 걸리는 때도 많다. 작가와 편집자가 붙어 1년 동안 끙끙대는 건 당연한 일이다. 아무리 신효가 책 한 권 내지 못한 작가 지망생이었어도 그런 걸 몰랐을까.



점점 영화가 편집과 출판이란 중요한 과정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있다는 것이 명백해진다. 이러니까 핵심이어야 할 중심 이야기도 힘을 잃는다. 영화 후반부는 '누가 신효의 책을 고쳐 썼는가'라는 미스터리를 중심으로 돌아가는데, 영화를 보다보면 이는 시놉시스에 나와있는 것만큼 중요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된다.

우선 미스터리를 풀어봤자 달라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신효보다 글솜씨가 좋은 누군가가 신효의 글을 고쳐 쓴 것이다. 둘째, 이런 일은 늘상 일어나는 일이다. 요절한 작가가 쓴 원고와 출판된 책의 내용이 전혀 딴판인 경우는 흔해 빠졌다. 이들 중엔 교과서에 실리는 작품도 있고 몇 십 년 동안 스테디셀러인 작품도 있다. 다시 말해, 신효의 이야기는 영화가 주장하는 것처럼 추상적인 미스터리가 아니라 책을 찍어내는 사람들의 일상인 것이다. 이 당연한 현실을 무시한 건 <러시안 소설>의 최대 실수이다.

이러니 영화가 담고 있는 '텍스트'에 신경이 쓰이게 된다. 영화에 자막과 내레이션으로 박히는 소설의 인용구들은 종종 매력적이지만 정상적인 편집과 교정을 거치지 않은 것들이다. 그 과정을 거쳤다면 잡아냈을 오타들이 이곳저곳에서 발견된다. 영화의 내용이 출판된 책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이는 무시하기 힘들다. 하긴 이 영화의 각본이 그 과정을 거쳤다면 제목도 <러시아 소설>로 고쳐지지 않았을까.

칼럼니스트 듀나 djuna01@empas.com

[사진=영화 <러시안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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