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을 달래는 연극 2편, <나비잠><천 개의 눈>

[엔터미디어=정다훈의 문화스코어] 나무는 침묵으로 계절을 버틴다...말은 치솟고, 침묵은 스민다. 침묵은 제 안쪽을 향해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 침묵에 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침묵으로 스미는 것 또한 말이다. -<천 개의 눈>

나비가 햇볕 속에 떠서 졸다가... 물고 있던... 것을. 그만 이승에 떨어뜨렸어... ... 사슴은 콧등에 나비가 내려앉으면... 그걸 자기 연인 이라고 착각하고, 숨을 멈추고... 까만 눈동자를 굴리며... 가만히 나비를 바라보지. 숨을 쉬면 날아가 버릴까봐 숨을 멈추고 귀를 씰룩거리며 나비의 숨을 듣고 있는 거야... 이후...사슴이 심장이 멈추도록 숲을 뛰어 다니는 건 한 번 본 그 나비를 쫒고 있기 때문이야. 사람들은 사슴이 왜 저렇게 뛰는지 알지 못해. 사슴이 죽으면 나비가 날아와 가만히 입에 물고 날아가는 것도 보지 못하지... 인연이란 고약한 거야. -<나비잠>

남산예술센터와 ‘상상만발극장’이 공동 제작한 <천 개의 눈>과 서울시극단 2013 서울의 혼 시리즈 첫 번째 작품 <나비잠>은 침묵의 무늬가 살아있는 연극이자, 시적 리듬이 느껴지는 시극이었다. 두 작품 모두 자꾸 곱씹어 보게 되는 대사가 많아 대본집이 프로그램 북에 실렸으면 더 없이 좋았을 작품이다.

■ 한번 들어가면 다시 나올 수 없는 미궁의 연극 매혹의 연극 <천 개의 눈>

연극의 첫 인상은 차곡차곡 스며드는 말의 울림에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가까워 아늑한 연극, 저 먼 곳으로 데려다 주는 아득한 대사들 사이에서 한 차례 꿈을 꾸는 듯한 기분을 느끼기도 했다. 미사 역으로 출연한 배우 정선철의 목소리는 어지러운 말들 사이에서 나락으로 흘러내리는 관객들의 정신을 단단히 붙들어 맸다. 결국 어둠 속에 숨어 베어도 베어지지 않는 수천수만의 시선이 되어 이 모든 걸 지켜보리라 마음 먹었다.

2012년 창작팩토리 지원사업 선정작인 <천 개의 눈>(작가 정영훈, 연출 박해성)은 영웅서사, 고대 그리스의 미노타우로스 미궁신화, 친부살해 신화, 인신공희(人身供犧) 모티브 등 동서양의 신화와 설화들을 바탕으로 쓰여진 작품.

연극 속 주인공은 자로왕과 환관 미사이다. 20년 전 혼탁한 세상에 홀연히 나타난 젊은 자로는 왕이 되기 위해 세자인 ‘타로’의 목이 필요했다. 미궁에 갇혀 인육으로 연명하는 반인반수 괴물이라는 소문 속 주인공 타로를 무찔러 민심을 얻고자 직접 미궁으로 떠났던 영웅이다. 그런데, 이제 늙은 자로는 왕의 자리에서 내려와, 타로처럼 미궁으로 떠나가야 한다. 그리고 20년 전 타로를 처치할 때의 진실을 말한다.



<천 개의 눈>을 움직이는 자는 환관이다. 환관과 함께 엿보는 자 엿듣는 자는 관객이다. 연극의 처음과 끝을 지켜보는 이는 ‘타로’이다. 우리는 환관의 입을 통해 타로가 괴물이 아닌 아버지의 왕권 유지를 위해 희생된 세자임을 알게 된다. 타로의 ‘침묵의 눈’을 통해 진실의 말과 만난다. 하지만 우리를 다시 한 번 일깨우는 이는 ‘자로’이다.

결국 ‘자로’는 죽음을 구걸하는 이가 된다. 몸을 냄새로 기억하는 일은 불우하다고 했다. ‘자로’는 모성을, 죽음의 몸을 냄새로 기억한다. 무대에선 공중에 내걸린 타로의 머리, ‘자로’ 곁을 지키는 목과 팔 다리가 없는 토르소 조각으로 상징성을 더했다. 타로와 자로는 1인 2역으로 설정해 거울효과를 일깨운다.

어둠 속에서 길 잃은 눈들이 바라보는 극장이 바로 미궁이며 세상이다. <천 개의 눈>속 미궁을 빠져나갈 수 있는 아리아드네의 실은 뭘까? 치욕의 삶의 공간에서 발버둥치지만 인간이기를 선택한 이들의 침묵의 언어를, 침묵의 무늬를, 침묵의 질감을 느껴야 한다. 모서리 없는 어둠 속에서 들린 침묵의 목소리는 ‘천 개의 눈’을 일깨웠다. 가장 무서운 것은 내안의 나의 눈이었음을. 배우 정선철, 박완규, 선종남, 김훈만, 변효준이 출연해 단단한 울림의 목소리를 들려줬다.

<영원한 너>와 <그림 같은 시절>에 이어 이번 작품을 쓴 정영훈 작가는 “<천 개의 눈>은 ‘수치와 질투에 관한 이야기’”라고 전했다. 결국 ‘미궁신화’로부터 탄생한 권력과 역사의 실타래를 통해 허위에 가린 진실을 파헤치고, 인간 근원에 내재된 타인에 대한 수치와 치욕을 묻는 작품이다. 22일까지 남산예술센터.



■ 똑같은 울음소리를 나눠가진 당신과 나의 연극 <나비잠>

지난 19일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서 개막한 서울시극단의 <나비잠>은 잠들기 전 가장 외롭고 불안한 머리카락을 누군가 천천히 만져주는 느낌을 갖게 한다. 삶 속에 속고 있던 날선 바람을 잠재우는 듯 순수한 울음 소리가 들려왔다. 숨소리는 나른 한 듯 고요하고 따뜻했다. 슬픔의 박동 소리가 아닌 잠시 잃어버린 어머니의 심장소리가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

<나비잠>(작 김경주, 연출 김혜련▪테오도라 스키피타레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서울의 사대문이라는 공간을 무대에 옮겨 순환과 인연과 회복과 달램의 이야기를 담아낸 연극.

작품의 배경은 모성을 잃어버린 사대문이다. 불면의 세계를 견디며 더더욱 외로운 현대인들의 마음에서 들려오는 본질적인 이야기인 셈. 역사극이 아닌 가공의 창작설화로 불면에 시달리는 인물인 대목장과 악공, 제사장과 스님이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내러티브적 요소보다는 음악적 요소, 이미지 적 요소, 시적인 리듬성이 작품의 매력을 더한다.

그 중 ‘내 안의 박동은 오직 정과 망치로 이루어진 소리뿐’이라고 말하며 엄마의 숨결을 그리워하는 대목장과 엄마의 살 냄새를 그리워하는 악공은 지평선과 수평선처럼 한 형제이다. 이들 두 형제의 상징성은 한 인물이 연기하는 병사형제로 인해 더욱 뚜렷하게 드러난다.



문 안의 ‘흙’과 문 밖의 ‘바람’은 함께 있어야 술 쉴 수 있다. 연극은 신나라가 작곡한 자장가를 통해 자신과 가장 닮은 울음소리를 찾아낸다. ‘흙’이 울고 ‘바람’이 운다. 그리고 천천히 달래준다. 적절히 가미된 그림자극과 인형극의 질감이 상상력을 부채질했다.

연극의 중심엔 순수한 영혼 ‘달래’가 있다. 사람들에게 흉물로 알려진 존재이지만 삶에 아파하는 모든 이들의 소리를 들어 잠을 이루지 못하는 인물이다. 아무도 몰라야 하는 비밀의 소리를 듣는 아이, 한 없이 자라 땅에 끌리는 머리카락만으로도 이 삶이 무거운 아이, 심장이 아파 혀가 참새의 혀만큼 작아져 말을 더듬는 아이이다. 달래의 눈동자엔 내 어머니의 눈동자가 어른거린다. 달래의 심장에선 아늑한 자궁속에서 들었던 내 어머니의 심장 박동소리가 들린다.

드라마틱 스토리를 원하는 관객이라면 정중히 사양한다. 이야기로 채우는 연극이기 보다는 비워내는 시극, 숨소리로 들리는 시, 침묵의 질감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연극이기 때문이다.

배우 이상직, 강지은, 강신구, 김신기, 주성환, 최나라 이재희, 이두성, 최광덕, 나자명, 박신운, 노상원, 김대현, 박익준, 강보미, 인혜선, 이민주, 안채은 등이 출연. 또한 전위예술가 무세중씨가 광대 역으로 특별 출연한다. 29일까지 세종문화회관.

공연전문기자 정다훈 ekgns44@naver.com

[사진=남산예술센터, 바나나문프로젝트, 세종문화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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