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터미디어=정다훈의 문화스코어] 한국초연에 도전하는 국립오페라단의 <파르지팔>과 대구국제오페라축제 개막작 <운명의 힘>을 만나고 왔다.

오페라 <파르지팔>은 제대로 된 바그너 공연을 볼 수 있다는 기대감과 '세계 최고의 구르네만츠'로 일컬어지는 베이스 연광철을 볼 수 있다는 설레임에 사흘 전 공연(약 1500석)이 매진됐다. 오페라 <운명의 힘>은 소프라노 임세경과 바리톤 석상근이 함께 출연 한다는 소식만으로 꼭 봐야 할 오페라로 낙점됐다. 결과적으로 두 작품 모두 성공적으로 객석을 사로잡았다.

■ <파르지팔>이 창조해낸 신비로운 바그너의 세계

필자는 “국내 오페라 역사는 <파르지팔> 초연 이전과 이후로 나뉠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점쳐보기도 했다. 쉽게 올리기 힘든 바그너 극을 소화해낼 성악가, 오케스트라, 스태프 등이 갖춰졌다는 1차적인 성공 외에도 비로소 관객과 함께 완성되는 공연의 특성상 모든 공연은 막이 오른 뒤에 제대로 된 평가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바그네리안 외에도 5시간 30분의 대장정을 소화해 낼 관객의 고도의 집중력과 체력이 받쳐줄까? 우려는 기우로 바뀌었다. 주변 관객들 대부분 진지한 자세로 극에 빠져들었다. 1막 후 이어진 저녁식사 시간엔 <파르지팔>에 관한 내용으로 이야기 꽃을 피웠다. 육중한 바그너 작품이 국내 관객에게 받아들여지기 어렵다는 말은 이제 옛말이 될 것 같다.

지난 5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막을 내린 국립오페라단(단장 김의준)의 <파르지팔>은 바그너가 죽기 1년 전인 1882년 작곡한 작품으로 중세 스페인을 배경으로 성배를 지키는 기사들과 마법사의 얘기를 다루고 있다. 성배의 전설을 바탕으로 종교를 뛰어넘는 숭고한 사상을 가장 장엄한 음악에 담아 낸 작품. 바그너는 인간세계의 미래에 대해 비관적이었으며 구원을 통해서만 미래가 있다고 믿었다. <파르지팔>에서도 바보같이 순진한 자만이 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고 말했다.

연출가 필립 아흘로 (Philippe Arlaud)는 “<파르지팔>을 연출한다는 것은 확답을 줄 수는 없으나 수수께끼를 간직한 채 여러 가지 질문의 의미를 열어본다는 것이다”고 전했다. 실제로 만나 본 <파르지팔>은 ‘서늘한 파란색 질감과 경사 거울로 창조해 낸 신비로운 바그너의 세계로 안내한 오페라’였다. 무대 천장에 설치된 대형 거울이 무대 위는 물론 오케스트라 피트석, 객석까지 비추면서 현 공간이 시간이 되고, 그 시간이 세계가 되는 새로운 경험을 선사했다. 연출과 무대는 물론 조명까지 책임지고 있는 연출가답게 시시각각으로 바뀌는 조명이 환상적이었다. 로타 차그로섹이 지휘한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의 잘 조율된 음악도 작품에 몰입할 수 있게 도왔다.



‘구르네만즈’로 열연한 베이스 연광철은 정확한 가사 전달은 물론 알찬 성량과 진실한 연기로 청중에 대한 설득력을 확보했다. 또한 2008년부터 2012년 까지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스테판 헤르하임 연출의 <파르지팔>과 뮌헨국립극장 페터 콘비츠니 연출의 <파르지팔>에서 베이스 연광철과 함께 지속적으로 호흡을 맞추고 있는 테너 크리스토퍼 벤트리스는 탄탄하고 섬세한 표현으로 ‘파르지팔’ 심리의 변화를 잘 이끌어냈다. ‘쿤드리’역으로 나선 메조소프라노 이본 네프의 양감 있는 가창도 좋은 평을 받았다.

극적 표현과 소리의 조화가 일품인 암포르타스 역의 바리톤 김동섭, 볼륨 있는 힘찬 가창을 들려 준 클링조르 역의 양준모, 출연 비중은 크진 않지만 단 한 장면에 섬세한 시정의 여백까지를 목소리에 담아내 확실한 존재감을 아로새긴 티투렐 역의 베이스 오재석, 모두 꿈의 오페라 <파르지팔>의 일등공신이었다.

■ 베르디가 사랑한 두 성악가가 살려 낸 <운명의 힘>

‘소프라노 임세경 레오노라와 바리톤 석상근 카를로의 무대 장악력은 대단했다.’ 베르디가 살아있다면 분명 사랑하는 성악가로 지목했을 듯 싶다.

두 남매에게 닥친 피할 수 없는 운명의 수레바퀴는 청아한 고음과 강렬한 저음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임세경의 황홀한 보이스, 압도적인 호소력을 가지고 있는 석상근의 보이스에서 감지할 수 있었다. 오페라 가수도 분명 연기자이다. 매 순간의 선택과 오해가 낳은 ‘운명이라는 힘’에 농락당하는 나약한 인간들의 고뇌를 온 몸에 담아낸 그들의 치밀한 연기가 관객을 제 편으로 만들었다. 청중을 설득하고 감동을 주어 감흥을 공유하는 결과까지 이끌어낸 까닭이다.

2013 <대구국제오페라축제> 개막작은 소프라노 임세경 이화영, 테너 이정원 하석배, 바리톤 우주호 석상근 등이 함께 한 베르디의 <운명의 힘>(La forza del destino)이다.



<파르지팔>이 파란색 오페라로 기억된다면, <운명의 힘>은 은색 오페라로 기억될 것 같다. 의상은 물론 무대의 주 색조는 흰색과 은색이었다. 언뜻 보면 차가운 ‘사이보그’의 이미지도 그려졌다. 상징적인 무대 역시 미니멀하게 연출했다. 이는 작품이 주는 무게감을 역발상으로 전환한 연출의도로 읽혀진다. 4막, 레오노라가 부르는 아리아 ‘신이여, 평화를 주소서’( Pace, Pace mio dio)는 단상 위로 올라가 부르는 것으로 설정하기도 했다.

정선영 연출은 “베르디가 말하는 운명(運命)이란 필연적으로 불완전할 수밖에 없는 존재인 인간이 일으키는 갈등의 소용돌이”라며 “이번 공연에서는 인간이 얼마나 어리석고 잔인한 존재인지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기 위해 낯설게 느껴지도록 의도했다”고 전했다. 하지만 의상과 무대가 지나치게 밝았음은 물론, 조명의 큰 변화가 느껴지지 않아 다소 늘어진다는 인상을 줘 극 몰입이 쉽지 않았다는 점은 다소 아쉬운 대목이다. 한 편의 오페라에서 조명이 얼마나 큰 역할을 하는지 다시금 일깨워줬다.

<운명의 힘>의 주역은 테너, 바리톤, 소프라노 모두이다. 하지만 가장 큰 기둥은 테너가 맡게 되는 ‘돈 알바로’이다. 돈 알바로는 총기사고로 사랑하는 여인 레오노라의 아버지를 살인하게 되면서 운명의 틈바구니에 휩쓸리게 된다. 그렇게 시작된 운명의 수레바퀴는 분노와 회한을 정리하며 수도사 생활을 하고 있는 와중에도 덥쳐온다.

이 이야기가 그저 작품 안에서만 살아있는 우연의 연속이 될 것이냐? 무대 위에서 설득력을 가질 수 있느냐?는 ‘알바로’의 역량에 달려있다. 하지만 테너 하석배가 분한 ‘알바로’는 극적 표현력이 꼼꼼하지 못했다. 노래에만 집중해 감정적 공감을 갖기 어려운 점이 치명타였다. 프레지오질라 집시여인을 맡은 메조소프라노 김민정의 소리 역시 유연하지 못한 점이 아쉬웠다. 구아르디아노 역 베이스 임용석, 멜리토네 역 바리톤 왕의창의 공명감 있는 발성이 귓가를 감쌌다. 지휘자 실바노 코르시는 역동적인 전주곡을 조금 더 리드미컬하게 살려냈으면 하는 생각이 없지 않았지만 무난하게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갔다.

한편, 제11회 <대구국제오페라축제>는 ‘프리미에르 PREMIERE’라는 주제로 10월 4일부터 11월 3일까지 31일간 대구오페라하우스를 비롯한 대구 전역의 공연장에서 진행된다. 다니엘 오렌이 지휘자로 나선이탈리아 살레르노 베르디극장의 <토스카>, 베이스 강병운의 국내 무대로 화제를 모았던 국립오페라단의 <돈 카를로>, 장수동 연출가에 의해 새로운 옷을 입는 <청라언덕>, 바리톤 정승기가 ‘볼프람’으로 출연하는 독일 칼스루에국립극장의 바그너 오페라 <탄호이저>가 연달아 공연된다.

공연전문 기자 정다훈 ekgns44@naver.com

[사진=국립오페라단, 정다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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