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터미디어=정다훈의 문화스코어] 지금까지 ‘카르멘’은 자유로운 영혼과 육체적인 욕망의 소유자로, ‘베르테르’는 한 여자를 향해 지고지순한 사랑을 불태우는 순정남으로서 전혀 다른 캐릭터로 인식돼 왔다. 하지만 지난 6일 LG아트센터에서 개막한 뮤지컬 <카르멘>과 3일 예술의 전당 CJ토월극장 무대에 오른 뮤지컬 <베르테르>를 보면 생각이 달라진다.

원작소설을 그대로 차용하지 않고 극작가 노먼 알렌과 작곡가 프랭크 와일드 혼의 손에서 새롭게 태어난 카르멘과 독일의 대문호 괴테와 극작가 고선웅이 탄생시킨 베르테르 모두 가슴이 시키는 대로 사랑을 한 남녀인 것. ‘아무것도 해 줄 게 없다는 상대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고 말하는 베르테르’, ‘천국과 지옥을 다 가진 여자 카르멘’은 세상의 이목이나 도덕적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감정에 모든 정열을 쏟는다.

현실을 바꿀 용기가 없어 떠돌아 다니던 카르멘에게 운명처럼 다가온 사랑이 그러했고, 애써 사랑을 지우기 위해 여행을 떠났지만 결국 명확해진 한 가지는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고 말하는 베르테르의 모습이 그러했다. 정혼자가 있는 상대(호세와 롯데)와 사랑에 빠진 점, (예언가와 오르카의)카드 점으로 주인공들의 운명을 암시하는 점, 사랑과 죽음이 공존하는 운명의 바람에 동참한 점, 마지막에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점 또한 묘하게 다른 듯 닮아있었다.

■ 천국과 지옥을 다 가진 여인 <카르멘>의 운명을 새롭게 돌아보다

국립오페라단 <카르멘> 2회, 고양문화재단 <카르멘> 2회에 뮤지컬 <카르멘>까지 합치면 한 달 사이 <카르멘>만 6차례 만난 셈이다. 이미 원작 소설이나 오페라와는 다르게 펼쳐지는 뮤지컬 <카르멘>이란 말을 들었지만 카르멘의 새로운 모습은 놀라움을 주기에 충분했다.

오페라에선 군인 호세와 사랑에 빠지는 것도 잠시 바로 호방한 투우사 에스카미오에게 빠져드는 집시여인 카르멘을 만날 수 있다. 이를 두고 팜 파탈 혹은 한 마리 자유로운 새처럼 날고 싶은 카르멘의 영혼에 더 무게 중심을 실은 것도 사실.

그런데 새롭게 태어난 카르멘은 호세와 처음으로 진짜 사랑에 빠지게 된다. 목숨까지 바칠 수 있는 뜨거운 사랑이다. 물론 바뀐 결말을 두고 ‘원작을 훼손한 값싼 순애보’라고 폄하 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에 한 가지 질문을 던지고 싶다. 작품 자체로선 파격적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 ‘과연 원작 소설이나 오페라에서 카르멘이란 캐릭터에 감정이입이 된 적이 있었느냐?’고.



지금까지는 카르멘보다는 인생 최대의 사건을 만난 호세의 감정변화에 설득됐다면, 이번엔 카르멘과 호세 모두의 행동이 이해가 됐다. 길들여지지 않는 여인 카르멘을 자신만이 구원할 수 있다고 믿는 한 남자의 고집스런 광기가 아닌 두 남녀의 후회하지 않는 사랑이 균형감 있게 녹아들어있기 때문이다.

체코 뮤지컬 <카르멘> 속 카르멘은 관능미를 넘어 당당하고 주체적인 의지와 열정을 가진 여성이다. 넘버 ‘여자답게’(Walk Like a Woman)에게 간파할 수 있듯 자기 자신을 딛고 걸어가는 용기 있는 여인이다. 작품이 설득력을 지닌 점은 단순히 평온의 굴레를 벗어 던지는 경찰 호세의 숨겨진 욕망만을 꺼내놓는 게 아니라 스페인의 평온한 도시민들의 욕망까지 돌아보게 만든 것. 더 나아가 관객들의 욕망도 한꺼풀 벗겨보게 만든다.
어찌보면 샴 쌍둥이처럼 닮아있는 카르멘과 돈호세의 운명은 예언가(태국희)의 노래와 함께 흘러간다. 오페라 속 불길한 ‘스페이드 에이스’ 카드 장면이 새로운 인물로 부활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영원히 반복되는 카르멘의 운명을 상징하는 원형의 무대와 집시풍의 이국적인 그림들, 유럽의 주술이나 전설에서 영감을 얻은 상징물들로 채워진 무대는 <카르멘>의 몽환적이고 화려한 이미지를 고조시킨다.

원작의 투우 경기장 대신 서커스단을 배경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카르멘이 속한 서커스단을 배경으로 마술사 이은결이 직접 매직디렉터를 맡은 다양한 마술, 애크러배틱, 저글링, 공중 서커스 등 화려한 볼거리도 작품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특히 원형 무대 위에서 회전하는 6개의 3면 기둥은 직접 무대 크루들이 기둥 안으로 들어가 어둠 속에서 움직여 감탄을 자아낸다.

차지연의 마력은 카르멘의 숨겨두었던 마음을 그대로 전하는 넘버 ‘그럴 수만 있다면(If I Could)’에서 감지할 수 있었다. 나무토막처럼 뻣뻣한 관객의 감성도 천천히 차오르게 만드는 그녀의 끝을 알 수 있는 내공은 무대에서 어김없이 발휘됐다. 또 다른 카르멘으로 분한 바다는 관능의 플라멩코와 인간적인 매력으로 승부한다.

평화로운 마을에 찾아든 한 여인이 던진 혼란, 그 혼란을 넘어선 사랑을 진솔하게 표현한 류정한의 캐릭터 해석은 적절하게 무게 중심을 잡아줬다. 그 동안 무대에서 좀처럼 보기 힘들었던 류정한의 왈츠를 볼 수 있다는 점도 예상 외의 수확이다. 단도를 던지며 거친 야성미를 뽐낸 가르시아 역 배우 에녹은 <스칼렛 핌퍼넬>에 이어 다시 한 번 매력적인 악역을 창조했다. 강하게 내지르지 않으면서도 그 이상의 강렬함을 선사하는 악역을 다시 만나기도 힘들 듯 하다.

김동연 연출가는 카르멘의 깃털 눈 포스터에 대해 “원형의 서커스 심볼로 무대 디자인에서도 눈이 그려진다. 카르멘이란 여인의 운명을 바라보는 눈, 죽음을 곁에 두고 즐기는 놀이인 서커스를 바라보는 눈이 함께 담겨있다. 운명적인 카르멘의 삶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고 작품의 핵심을 전했다.



■ 총보다 강렬한 꽃의 울음을 흘리고 간 <베르테르>

<베르테르>의 음악이 가진 서정성과 임태경의 황홀한 보이스가 이렇게 잘 어울릴 수 있을까. 지금까지 임태경은 연기보다 가창력이 한 수 위였다. 하지만 이번엔 연기와 가창이 부창부수처럼 어울렸다. 가슴 속 감정을 마구 내지르기 보다는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정확히 관객과 나눠 가진 점이 박수치게 만들었다. 그 결과 베르테르 가슴 속에서 슬프게 낙하하던 해바라기가 돌부리처럼 마구 올라와 눈물샘을 터트렸으니 말이다.

7년 만에 돌아 온 전설의 베르테르 엄기준의 귀환도 반가웠다. 얼마나 많은 밤들을 롯데를 그리워했는지, '쿵' 하는 절망을 열정의 불씨로 일으켜 세웠는지, 해바라기 사랑을 멈출 수 없었는지, 유명한 돌부리씬에서 한방 그리고 마지막 뒷모습에서 진하게 느낄 수 있었다.

시대와 세대를 초월하여 2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고전 명작으로 읽히고 있는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사랑한다’ 말할 수 없어 더욱 애절한 사랑이야기”이다.

2013 <베르테르>는 여러모로 의미가 깊다. 지난 2003년 연출 당시 긴박감 넘치는 전개와 입체감 있는 캐릭터로 뮤지컬의 완성도를 높였다는 호평을 받은 조광화 연출이 10년 만에 다시 돌아왔다. <베르테르>의 초기 공연 음악을 진두지휘한 구소영 음악감독 또한 이번 무대에 합류하여, “실내악”요소를 십분 살린 음악을 직접 들려준다. 대극장 무대의 화려함이 아닌 11인으로 구성된 챔버 오케스트라(피아노1, 현악기10)가 빚어내는 수수하면서도 애잔한 음악은 역설적으로 베르테르의 절박한 열망을 더욱 드라마틱하게 구현해냈다. 새롭게 바뀐 <베르테르>는 냉정과 열정 사이 그 안에서 뜨겁게 끓어오르고 있는 청춘을 보는 듯 했다.



지난 12년간 13번의 재공연을 거듭하면서 매번 새로운 무대를 선사했던 공연답게 올해 <베르테르>는 ‘로맨틱 판타지’라는 콘셉트를 작품 전체에 도입한 것이 특징이다. 특히, 정승호 무대 디자이너의 손을 거쳐 극의 배경인 발하임은 거대 화훼산업단지로 탈바꿈해 베르테르는 노란 해바라기, 롯데는 라임·라벤더, 알베르트는 관엽수로 상정해, 의상마다 다양한 꽃 디자인이 등장한다. 롯데를 상징하는 온실 세트가 등장하는가 하면, ‘자석산의 전설’을 보다 이해가기 쉽게 인형극으로 들려준다. 또한 마지막 베르테르의 자살 장면은 총보다 강렬한 꽃(해바라기)의 울음으로 설정됐다. 이 장면은 그 어떤 계산 없이 거친 사랑 앞으로 달려갈 수 밖에 없었던 한 남자의 뒷모습과 겹치며 진한 여운을 남긴다.

2013 <베르테르>에서는 베르테르와 달리 질서와 이성을 중시하는 알베르트의 모습을 더욱 강하게 보여준다. 알베르트가 무대에 처음 등장할 때 부르는 솔로곡 ‘언젠가 그날’도 추가되었다. 구소영 음악감독은 "알베르트를 나쁜 인물로 보는 경우도 있는데, 각자 살아가고 있는 방식이 다른 것일 뿐 나쁜 인물은 아니다. 이번 새로운 솔로곡이 추가 돼 알베르트의 내면이 더 잘 보일 거라 생각된다"고 전했다.

알베르트의 넘버 외에도 새롭게 추가된 롯데의 "자석산의 전설"은 롯데가 감수성이 풍부한 여인임을 표현함과 동시에 베르테르가 롯데에게 호감을 가지고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는 이유를 들려주며 베르테르에 더욱 몰입할 수 있도록 만든다. 이지혜 롯데의 통통 튀는 감성이 1막에서 빛을 발한다면, 전미도 롯데의 그윽한 매력은 2막에서 제 옷을 입은 듯 매혹적이다.

롯데의 약혼자이자 베르테르와는 완전히 다른 이성적인 사고와 행동방식을 가진 알베르트역에는 작년과 재작년 공연에 이어 올해로 3년째 자리를 지키는 이상현과 <지킬앤하이드> <스칼렛 핌퍼넬>에서 시원한 가창력을 보여준 양준모가 출연한다.

이상현 알베르트는 베르테르를 대하는 그 만의 부드러우면서도 단단한 방식이 설득력을 확보해 ‘알베르트’란 캐릭터를 다시 보게 만든 배우 중 한명이다. 이번 무대에서 역시 따뜻함과 팽팽한 균형감을 자유자재로 오가는 보이스와 섬세한 디테일로 관객의 공감을 얻었다. ‘밤의 산책’ 장면은 로맨틱한 이런 남자를 두고 흔들리는 롯데가 미워질 지경이다. 단 새롭게 추가된 넘버를 부른 뒤 치는 대사의 호흡이 다소 빠른 점은 조금 아쉽다. 배우 최나래(오르카) 이승재, 최성원(카인즈), 김경하(캐시)의 발견도 반갑다. 또한 내년 3월 도쿄 아오야마극장에서 일본 공연도 확정되어 <베르테르>의 콘텐츠 파워를 실감하게 한다.

공연전문기자 정다훈 ekgns44@naver.com

[사진=허영옥, 오넬컴퍼니, 뮤지컬해븐, 프레인, CJ 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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