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의자’, ‘본’ 시리즈 따라하기 왜 비난받을까

[엔터미디어=듀나의 영화낙서판] 원신연의 영화 <용의자>는 최근에 갑자기 유행하기 시작한 '북에서 내려온 인간병기' 장르의 최신작이다. 왜 이런 영화들이 갑자기 인기를 끌고 있는지, 지금까지 몇 편이나 나왔는지는 필자도 모르겠다. 하여간 누구 말마따나 지금까지 나온 영화들만 모아도 <어벤저스> 영화가 한 편 나올 정도다. 이게 언제까지 계속 되려나?

그래도 등급을 매긴다면 <용의자>는 <의형제>나 <베를린>보다는 조금 떨어지지만 다른 영화들보다는 월등히 나은 작품이다. 액션은 잘 짜여져 있고 일련의 액션을 연결하기 위한 임시방편에 불과하긴 하지만 별 무리 없이 흐른다. 결말이 지나치게 많고 대책없은 낙천주의에는 동감할 수 없지만 그래도 한반도의 정치상황을 적절하게 이용한 괜찮은 오락영화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경을 긁는 것이 있다. 이 영화에는 레퍼런스가 너무 많다. 스토리는 <도망자>에서 대부분을 가져왔고 액션은 그린그래스의 <본> 시리즈에서 가져왔다. <도망자>의 이야기야 워낙 보편적이니 그냥 그러려니, 할 수 있지만 그린그래스의 영향을 무시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이건 그냥 한반도를 무대로 한 제이슨 본 영화다.

장르 영화에서 레퍼런스를 물고 늘어지는 것처럼 무의미한 일은 없다. 레퍼런스는 장르의 전부이다. 장르물이란 것이 대부분 이런 태도로 만들어진다. "어? 저 사람이 정말 재미있는 걸 만들었네? 나도 비슷한 걸 만들고 싶어!" 이런 태도를 금지했다면 셜록 홈즈도 없었고 아시모프도 없었고 러브크래프트도 없었다. 장르란 수많은 레퍼런스들의 장대한 흐름이며 그 베끼고 또 베끼는 과정에서 창의성이 태어난다. 그렇기 때문에 오로지 레퍼런스만으로 만들어진 영화라도 고유의 목소리를 가질 수 있다. 히치콕 인용으로 도배된 브라이언 드 팔마의 영화가 그렇다.



그러니 원신연 감독이 레퍼런스를 극복할 자기만의 목소리를 찾았다면 <용의자>의 레퍼런스 도배를 굳이 비난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이 영화에서 가장 '자기 목소리'에 가까운 것은 한반도의 분단상황을 그린그래스 액션에 이식했다는 것이다. 이건 분명히 자기 목소리이긴 하다. 하지만 9.11에서부터 소말리아 해적에 이르기까지 온갖 소재를 다 다루는 그린그래스의 소재 선택을 생각해보면 이는 그리 튀지도 않는다. 단지 내수용 관객들에게만 의미가 있을 뿐이다. 이 역시 나쁜 건 아니지만 충분하지는 않다.

그럼 그 다음으로 분명한 장점은 그린그래스 액션과 비슷한 무언가를 만들었는데 그걸 한국에서 훨씬 싼 값에 해치웠다는 자부심 정도일 것이다. 이건 분명히 중요한 기술적 성과이긴 하지만 역시 영화가 자기 목소리를 냈다는 의미는 아니다.

결국 다시 그린그래스 액션으로 돌아간다. 불길한 것은 이 영화에 이런 식의 모방에서 따르기 마련인 열화의 흔적이 발견된다는 것은 아니다. 그건 드러나는 액션 대신 그 뒤를 지탱하는 캐릭터와 드라마에서 발견된다.



이 모든 흔적은 '허세'로 요약할 수 있다. 그린그래스의 <본> 시리즈에서 예상 외로 찾기 어려운 건 바로 이 남성적인 허세이다. 본은 거의 수도승과 같은 금욕적인 존재이며 그는 폭력 상황의 쾌락보다는 자신이 지은 죄의 무게를 더 많이 느낀다. 본을 추적하는 상대방측도 허세를 부릴 여유는 없다. 프로젝트와 자신의 목숨이 걸린 문제이기 때문이다. 사실 그린그래스 액션에서 가장 튀는 것은 기술적인 현란함이 아니라 그를 지탱하는 현실의 무게이다. 만약 후자가 없었다면 그의 액션은 정확히 같은 스타일을 고수했다고 해도 그냥 무난해보였을 것이다.

<용의자>에도 자기만의 심각함이 있다. 분단상황은 가벼운 문제가 아니다. 가족을 잃고 복수 대상을 찾아 돌아다니는 남자의 고통을 무시할 수 없다. 하지만 영화는 이 소재들을 지나치게 가볍게 본다. 그 때문에 사람들의 인생에 영원한 흉터를 남기는 이런 사건들은 쉽게 두 주인공의 남성적 허세를 위한 재료로 떨어지고 만다. 아무리 배우들이 노력해도 허세의 꾸밈이 너무 강한 것이다. 이들은 그냥 '설정'인 것이다. 지금까지 나온 '북한에서 온 인간병기' 영화들이 대부분 그랬던 것처럼.

칼럼니스트 듀나 djuna01@empas.com

[사진=영화 <용의자>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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